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박사 부교수 허순복
2024.11.4.
1947년 6월 2일 만경대에서는 우리 나라 녀성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시며 조선의 위대한 어머니이신 강반석녀사의 묘이장식이 엄숙히 거행되였다.
만경대에 강반석어머님의 묘소를 옮겨모시기까지에는 참으로 가슴뜨거운 사연들이 깃들어있었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혁명의 길에 나서신 때로부터 기나긴 세월 인간이 당할수 있는 모진 슬픔과 괴로움을 다 겪으시면서도 오직 혁명만을 생각하시였으며 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치시였다.》
해방후 조국에 개선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중국동북지방에 흩어진 항일혁명렬사들의 유가족을 찾아 조국으로 데려내오는 사업을 조직하시며 안도와 무송에도 일군들을 파견하시면서도 자신의 부모님의 묘소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비치지 않으시였다.
희생된 전우들의 유해를 찾아오고 그들이 부탁하고 간 자식들을 해방된 내 나라 강산으로 데려오기 전에는 자신의 부모님들의 분묘를 옮겨올수 없다는것이 위대한 수령님의 결심이였던것이다.
항일혁명투사들이 위대한 수령님께 부모님의 묘소를 옮겨오는 문제에 대하여 거듭 말씀을 올리였지만 수령님께서는 매번 그 문제는 차후에 보자고 막아버리군 하시였다.
그러던 1947년 초봄 어느날 김책동지가 위대한 수령님의 집무실을 찾아와 사업보고를 마친 다음 오늘은 꼭 결론을 받아야겠다고 하면서 전사의 도리로 보나 인민들의 요구로 보나 이제는 그 일을 더는 미룰수 없다고 간절하게 말씀올리자 수령님께서는 안타까우신 음성으로 지난날 산에서 싸우던 여러 동무들의 부모들도 다 이역땅에 묻혀있는데 어떻게 내 부모님이라고 하여 먼저 모셔내오겠는가고, 이 문제는 더이상 이야기하지 말자고 간절히 말씀하시였다.
김형직선생님과 강반석어머님의 묘소를 하루빨리 해방된 조국땅 고향 만경대에 모시려는 간절한 소원을 품은것은 항일혁명투사들뿐이 아니였다.
해방후 위대한 수령님께서 만경대고향집을 처음으로 찾으시였던 날 밤 리보익할머님께서는 수령님께 부모님의 묘소를 옮겨오는 문제를 화제에 올리시였다.
그러는 할머님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보다 먼저 은인들을 찾은 다음 천묘를 하겠다고 말씀드리시였다.
김책동지가 위대한 수령님의 승낙을 받지 못하고 돌아간지 보름쯤 지난 4월 어느날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께서 어리신 위대한 장군님과 함께 만경대에 찾아가시였는데 시조부모님들의 안색이 흐려있는것을 보게 되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 몸이 어디 편치 않으신가고 물으시며 왕진을 청해오자고 하시자 할아버님께서는 수심어린 어조로 이제는 우리 나이도 80을 넘겨다보니 깊어지는 생각이 있다고 하시면서 너희 시부모들로 말하면 다 나라찾는 일에 몸을 바쳤는데 해방이 된 오늘에는 죽은 넋이라도 제 나라 땅에 심어주어야 산 사람들의 마음도 편할게 아니냐고, 나라가 해방된지 두해가 잡히도록 이국땅에 무주고혼으로 남아있는것을 생각하면 어쩐지 가슴이 아프다고, 이 늙은이들은 생전에 자식의 뼈도 보지 못할것 같다고 속마음을 터놓으시였다.
할아버님께서는 그러시면서 장군이 정사에 바쁘다는것은 모르는바가 아니나 늙은이들의 마지막부탁일수도 있으니 돌아가면 장군께 전하라고 당부하시는것이였다.
사실 손자며느님께 그 말씀을 하기까지는 여러모로 생각을 깊이 하신 할아버님과 할머님이시였다.
그날 저녁 댁으로 돌아오신 김정숙동지께서는 만경대 시조부모님들의 그 절절한 심정을 위대한 수령님께 그대로 말씀드리시였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앞에서는 그런 내색을 조금도 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사업에만 전념하시였다.
김정숙동지를 통하여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항일혁명투사들과 가까이 있는 일군들의 자책감은 이루 말할수가 없었다.
특히 위대한 수령님께 이미 여러 차례 부모님의 묘소를 옮겨올것을 제의한바 있는 김책동지는 더는 그대로 있을수 없다고 생각하고 먼저 강반석어머님의 유해를 모셔오는 사업을 조직하고 이어 김형직선생님의 유해를 모셔오는 사업을 조직하였다.
이렇게 되여 그해 5월초 강반석어머님의 유해를 모셔내오는 일행이 평양을 출발하였다.
강반석어머님의 유해를 모셔간다는 소식이 어떻게 안도땅에 퍼졌는지 길가에 수많은 인민들이 늘어서서 심심한 조의를 표시하였다. 특히 소사하에서는 송강을 비롯한 주변사람들까지 다 떨쳐나 어머님의 유해를 향나무로 만든 관에 정히 모시고 멀리 안도에까지 따라나오며 눈물을 흘리였다.
강반석어머님의 유해를 모신 차가 국경도시 도문에 도착했을 때에는 조중 두 나라 인민들이 고이 간직했던 무명필들을 내다가 그것으로 유해를 모신 차를 끌고 두만강다리를 건넜다.
이리하여 6월 2일 강반석어머님의 유해가 만경대에 도착하였다.
소복단장을 하고 이제나저제나 손꼽아 기다리시던 할머님께서는 령구를 붙잡고 《왜 이렇게 돌아왔느냐! … 살아서 아들, 손자를 앞세우고 오면 못쓴다더냐!》라고 하시며 오열을 터치시였다.
이날 만경대에서는 수많은 일군들과 인민들의 참석하에 이장식이 장중히 거행되였다.
현지에 나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책동지에게 무슨 의식을 이렇게 요란하게 준비했는가고 하시면서 동무들의 성의는 감사하다, 그러나 생전에 우리 어머님은 식을 내고 틀을 차리는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진실하고 소박한것을 좋아하시였다고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오로지 나라의 해방을 위해서 모진 고생을 달게 여기시며 꿋꿋이 살아오신 조선의 어머니, 림종의 순간에도 수난당한 민족의 운명을 절감하시며 나라를 찾기 전에는 묘지를 찾지 말라고 유언하신 어머님, 존경하는 강반석어머님의 유해는 혁명전사들의 손에 받들리여 정히 안치되였다.
이날은 항일혁명투사들과 조부모님들 그리고 온 나라 인민의 간절한 소원이 풀린 실로 뜻깊은 날이였다.
김형직선생님의 유해는 그해 7월 5일에 도착하였다.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다시는 의식을 크게 가지지 말도록 이르시였다. 그리하여 이장식은 조부모님들과 몇몇 일가분들 그리고 가까이에서 사업하는 몇몇 일군들만이 참석하여 간소하게 치르게 되였다.
그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형직선생님과 강반석어머님의 묘소를 잘 꾸리려는 일군들의 제의도 들어주지 않으시였다.
오늘도 만경대를 굽이돌아흐르는 대동강의 물결은 력사의 증견자로 어버이수령님의 그 고결한 풍모를 천세만세에 길이 전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