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많은 돈과 재물을 가진 자산가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돈주머니가 크고 재물이 많아도 그것이 개인의 치부만을 위한것이라면 삶의 가치가 없을것이며 사회와 민족의 복리에 바쳐진다면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을것이다.
우리 민족의 대성인이신
절세의 위인의 은혜로운 품속에서 해방전 평양의 큰 부자로 소문났던 백선행도 애국적인 자산가로 민족사의 갈피속에 남아 길이 전해지게 되였다.
백선행(1848-1933)은 상상을 초월하는 근면과 검박, 절약으로 마련한 거금을 제민족, 제나라를 위하는 선한 일에 고스란히 바치여 인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은 애국적녀인이다.
《사람들이 백선행을 존경한것은 그가 사회를 위해 유익한 일을 많이 하였기때문이다. 수중에 돈이 많았지만 그는 부귀영화를 조금도 탐내지 않고 조반석죽의 수수한 생활을 하면서 자기가 평생을 두고 저축해온 그 돈을 사회를 위해 아낌없이 바치였다.》 (
백선행은 16살에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가 된데로부터 백과부라고 불리우다가 해방전에 평양에서 자선사업으로 이름이 높아지면서 백선행으로 찬양되였다.
평생 아무 교육도 받지 못한 그는 콩나물장사, 두부장사 등을 하면서 한푼두푼 모은 돈으로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승호리의 돌박산(석회석광산부지)을 헐값으로 사두었다가 일본인자본가에게 본전의 몇십배나 되는 비싼 값으로 팔아 평안남도일대에서 굴지의 자산가가 되였으며 평생동안 저축해온 돈을 사회를 위해, 조선사람들을 위해 아낌없이 바치였다.
여러 학교들에 많은 토지와 자금을 기증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소문없이 돌봐준 백선행의 덕행을 길이 전하기 위하여 창덕학교 교직원들과 학부형들을 비롯한 이곳 인민들이 힘을 모아 비석을 해세웠다.
본래 이 비는 1927년 7월에 창덕학교근처의 비석골에 세웠던것인데 오늘날 련광정앞에 있는 3층짜리 석조건물인 평양공회당이 《백선행기념관》으로 되면서 여기에 백선행의 석상을 세우고 비석을 옮겨놓았다.
네모난 받침돌우에 세운 비몸은 높이가 약 1.58m, 너비는 43cm이며 두께가 31cm정도이다. 비몸우에는 합각지붕모양의 머리돌을 얹었다.
앞면에 《백씨선행기념비》라는 7글자의 제목글과 5언시 한편을 새기고 뒤면에는 11행, 매 행에 43자씩 백선행의 행적을 찬양하는 글을 기록하였으며 왼쪽과 오른쪽면에 비석을 세우는데 관여한 평양사람들과 창덕학교 교직원, 학부형들의 이름자들을 써놓았다.
비문에 의하면 백선행의 본관(시조가 난 고장을 말함. 관향이라고도 한다.)은 수원이고 고향은 평양인데 그는 일생을 선량하고 청렴결백하게 살아온것으로 하여 이름자그대로 명실상부하였다고 한다. 비문에서는 백선행이 재물을 내여 다리를 놓게 하고 광성학교와 숭현학교의 운영을 보장하였으며 특히 창덕학교에 거액에 달하는 대동군 룡산면의 토지를 기증함으로써 민족교육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데 대하여 쓰면서 이것은 실제한 사실에 의거한것임을 강조하였다.
비문은 한자로 씌여졌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앞면]
《백씨선행기념비》
재물보다 중한것 의리로 여겼기에
사회의 리익위해 자선을 베풀었네
학교교육 진흥시켜 인재를 키워냄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전해오는 법이라네
[뒤면]
부인의 성은 백씨이고 이름은 선행인데 본관은 수원이나 본래의 고향은 서도(평양)이다.
세상사람들의 일을 대략적으로 이야기한다면 명분과 실제가 서로 부합되는것은 드물고 명분과 실제가 모순되는것이 많다.
부인의 평생 해놓은 일을 보면 명분과 실제가 부합되는구나!
왜 그러한가. 청상과부로 절개를 지킨것은 그의 지조요, 청백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해놓은 일은 그의 행실이라. 선량하고 부지런하며 검박하게 모은 재물은 물의 원천이 무궁하듯 류통되고 공동의 리익되는 사업에 재물을 내여 서도의 영광으로 빛을 뿌렸거니 그런즉 절개를 지킴은 백씨성처럼 결백하고 해놓은 일은 그 이름처럼 착하며 이루어놓은 재산은 그 본관처럼 물의 근원으로 되여 그 고향 서도에 혜택을 베풀었으니 이는 가히 명실상부하여 고금에 희한한 일이라고 말할만 하다.
사실을 들어본다면 빈궁을 구제하여 남몰래 쌓은 공적이 조용히 가리워져 사람들의 알지 못하는것이 헤아릴수 없었으며 사회의 리익을 위한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 힘을 발휘하였다.
객산교를 설립하여 교통의 편의를 도모하였고 광성학교와 숭현학교를 도와 교육의 발전에 기여하였으니 이리하여 사람들이 찬양하는 목소리는 곳곳마다에서 들리였다. 특히 창덕학교의 경영이 곤난함을 념려하여 또다시 은택을 베풀어 대동군 룡산면에 있던 토지를 기증하였으니 그때의 가격으로는 거액의 재산이였다. 이로하여 학교의 형편은 이전에 비해 곱절로 좋아지고 주변의 청년자제들은 문명의 세계에 여유있게 들어서게 되였으니 부인의 이러한 미거는 창덕학교 하나의 기쁨과 행복만이 아닌 온 나라 전체의 복리였거늘 그 공이 어찌 거룩하지 않으랴.
이 지방의 인사들은 축하하여 마지 않고 학교당국에서는 더욱 감탄하여 그 은혜의 만분의 하나라도 보답하려고 부인이 평생 애지중지하던 객산교를 정성다해 관리하고 마산 동쪽기슭에 꾸려놓은 부인의 무덤을 매해 봄가을 두 절기마다 돌보도록 협의결정하였으며 또 부인의 사적을 영구히 기념하기 위하여 먼저 석재를 사오고 나에게 이 글의 서문을 지을것을 부탁하였다.
이 보잘것없는 재주로 어찌 감히 이런 중임을 감당하랴만 나 역시 학부형의 한사람으로서 의리상 사양할수가 없어 참람하고 망녕됨을 헤아리지 않고 부인의 실지 사실에 의거하여 기록한다.
정묘년(1927) 가을 7월 16일
배천사람 진사 조지홍 삼가 짓고 배준렬 삼가 글씨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