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흥호가 건설되여 봉산, 은파, 사리원일대의 관개용수문제가 해결되였을뿐아니라 수천세대의 농민들이 수중생활에서 해방되였으며 이 일대의 풍치도 아름다와지고 전기도 생산하게 되였습니다.》 (
인민들의 행복한 생활을 위하여, 인민들이 겪고있는 생활상고통을 풀어주시기 위하여 새기신
긴긴 세월 해마다 들이닥치는 물란리에 가꾼 낟알과 집마저 잃어버리고 가난에 시달리던 태상벌, 오늘 이곳에 자리잡은 강안마을이
지난날 태상벌농민들은 물이 많아 못살고 물이 없어 고생한 기막힌 사람들이였다.
태상벌농민들은 량쪽에 재령강과 서흥강을 끼고 살면서도 논농사는 물론 밭농사도 제대로 할수 없었다.
모내기철에는 가물에 바닥이 갈라터지다가도 장마만 지면 량쪽 강에서 물이 넘어나 순식간에 농토가 물에 감기다보니 논농사도 밭농사도 할수 없었다.
한해 농사가 끝나면 다음해 모내기철까지 그 넓은 벌판에 물을 가득 잡아두기때문에 이 일대는 늘 물속에 감겨있었고 농민들은 그속에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오죽했으면 이고장 농민들이 이웃에 가자고 해도 《함지배》를 타고다녀야 했으며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여름에는 《함지배》를 타고 학교에 다니고 추운 겨울에는 얼음판으로 걸어다니거나 썰매를 타고 다니였다.
이처럼 우리 농민들이 세기를 두고 당하는 고통을 마침내
그러나 조국해방전쟁으로 인하여 공사는 착공하지 못하였다.
가렬처절한 전쟁의 나날에도 이고장 농민들의 불행을 늘 마음속에 안고계시던
그런데 일부 일군들로부터 몽리면적으로 보나 경제적효과성으로 보나 어지돈관개공사는 투자가 너무 많다고 의견이 제기되자
이렇게 되여 태상벌농민들은 서흥호에서 내려오는 관개용수를 받아쓰면서 마침내 《수중생활》에서 영원히 해방되였던것이다.
어지돈관개공사를 하여 물의 재난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고도 그 이후에도 큰 강을 사이에 두고있는 이 고장 농민들이 걱정되시여 해마다 제방공사를 잘할데 대하여 강조하시였으며 주체63(1974)년 5월 26일과 9월 5일에는 강안리를 찾아주시고 손수 재령강의 수위와 제방의 높이를 가늠해보시고 막대한 투자를 하여서라도 제방을 무조건 쌓도록 하시고 인민의 생명재산과 관련된 문제에서는 한치도 양보해서는 안된다고 절절하게 말씀하시였다.
그리하여 80여리 제방을 보강하는 방대한 공사는 그해 겨울에 끝나게 되였으며 그 어떤 거세찬 물결이 밀려들어도 성벽처럼 둘러싼 강뚝은 끄떡이 없이 재난많던 어제날을 옛말로 전하고있다.
막대한 투자를 하여서라도 인민의 생명재산과 인민들의 겪는 고생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한치도 양보해서는 안된다는것이 우리
이렇듯 한평생 인민을 하늘처럼 내세우고 인민에게 의거하여 혁명과 건설을 령도해오신
하기에 전체 조선인민은 이민위천을 좌우명으로 삼으시고 이 땅우에 인민이 주인된 인민대중중심의 사회주의국가를 일떠세워주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