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혁명의 본질은 로동의 본질적차이를 없애고 근로자들을 힘든 로동에서 해방하는것입니다.》 (
근로자들을 어렵고 힘든 로동에서 해방할데 대한 정치는 이미 해방직후부터 실현되였다.
우리 나라 북변에 있던 과거 일본자본가가 운영하던 성진제강소(당시)의 원철로는 로동조건이 불비하여 수많은 우리 로동계급의 생명을 빼앗아간 저주로운것이였다.
그러나 해방후 우리 로동계급은 나라의 주인된 긍지와 새조국건설의 열망으로 그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강재를 생산하고있었다. 강재 한t이 귀중하였기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보고받으신
전후 우리 나라에서 아무러한 경험도 없이 자력갱생으로 뜨락또르를 생산하도록 한것도 단순히 뜨락또르를 농촌에 내보내여 농업생산을 늘이기 위한것만이 아니라 농민들을 힘든 로동에서 해방하기 위한 인민적조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새 기술이 생산을 발전시키는데는 크게 작용하지 못해도 그것이 근로자들을 힘든 로동에서 해방할수 있다면 주저없이 받아들이는것이 정책으로 되고있다.
어느 나라나 경제건설을 하면서 기술을 발전시키는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기술을 발전시키면서 거기에 기술개건, 기술적진보라는 개념은 썼지만 그것을 인간해방을 위한 기술혁명으로 명명한적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회제도를 변혁하기 위한 사회혁명에서 로동계급의 정권을 세울 때까지 혁명을 계속할데 대한 문제는 제기되였지만 사회주의제도가 선 다음 착취와 압박에서 해방된 근로자들을 힘든 로동에서 해방하는것을 계속혁명의 과업으로 내세운 력사도 없었다.
기술발전을 로동자들을 힘든 로동에서 해방하는 기술혁명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사회주의제도가 선 다음 계속혁명의 과업으로 제시한것은 인민중시, 인민존중, 인민사랑의 정치가 실시되고있는 우리 나라에 고유한것이다.
착취와 압박에서 해방된 근로자들을 힘든 로동에서까지 해방하는것을 정책화하는것은 인민사랑의 정치, 인덕정치의 화원에서만 있을수 있는 일이다.
력사에 《백성이 첫째요, 왕권은 둘째》라는 주장이 나온적도 있었지만 그것이 정치에 구현된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로동자들이 고열로동, 힘든 로동을 하는것을 보시면 가슴아파하시며 그들을 어렵고 힘든 로동에서 해방시켜야 하겠다는 결심을 굳히시며 온갖 로고를 다 바쳐오시였다.
지금까지의 정치사에서는 인민들에게 정치적권리가 보장되고있는가, 물질생활이 어떻게 보장되고있는가 하는것이 론의의 대상으로 되여왔지만 인민들을 힘든 로동에서까지 해방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오직 인민사랑의 정치가 펼쳐지고있는 우리 나라에서만 제기되고있는 문제이다.
그러기에 우리 나라를 방문한 세계의 이름있는 인사들은
언제인가 우리 나라를 방문한적이 있는 미국의 빌리 그라함목사가 귀국후 어떤 기자로부터 《목사님은 왜 조선에 성경책을 전하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을 받은적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목사는 《성서는 인간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뜻을 담고있다. 그런데 그 나라에서는 인민사랑이 국책으로 실시되고있다. … 이러한 나라에 성경책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답변하였다.
인민을 하늘처럼 여기시는
인민들의 정치적권리는 물론 일자리걱정, 먹고 입고 쓰고 살 걱정이 없을뿐아니라 힘든 로동에서까지 해방시키는 참다운 인민의 나라가 바로 우리 나라이다.
근로자들을 힘든 로동에서까지 해방하는 계속혁명과업은
오늘 우리 나라에서는 사회주의강국건설위업을 실현하기 위한 사상,기술, 문화의 3대혁명이 전인민적인 대중운동으로 힘있게 추진되고있다.
이 과정에 사상혁명, 문화혁명과 함께 근로자들을 힘든 로동에서까지 해방하는 기술혁명이 높은 단계에서 실현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