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조국해방전쟁사에 뚜렷한 자욱을 남긴 조선녀성종군기자들의 위훈

 2015.10.7.

전쟁마당에 종군의 력사가 새겨진 때로부터 수세기가 지나갔다. 이 기간 유명무명의 종군기자들이 남긴 위훈은 후세에까지 전해지고있다. 그렇지만 이들의 대다수는 남성들이였다. 그것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취재집필임무를 담당수행하기에는 남성들같은 육체적준비가 필요하였기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중에는 녀성들도 있었다.

미국의 안나 루이스 스트롱은 중국주재 UPI통신사기자였던 애버스런과 같이 1930~1940년대의 적지 않은 나날을 중국의 항일전장들과 해방지역들에서 글을 썼다. 중국혁명에 이바지하는 진보적인 언론활동과 중국인민에 대한 깊은 리해와 동정으로 하여 주은래총리와도 친교가 두터워졌던 그는 산서, 섬서, 동북의 해방지역들을 거쳐 1947년 8월에는 우리 나라를 방문하고 위대한 수령님의 접견까지 받은 저명한 문필가였다.

그가 두주일간의 체류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위대한 수령님께 올린 편지에서 《지금 귀하는 이곳에서 전 조선장래의 력사를 창조하고계십니다.》라고 한 말과 영국의 《뉴스 테이츠먼 인드레이슌》지에 실린 글에서 조선의 혁혁한 성과를 찬양하면서 《김일성위원장은 통일조선의 대통령이 되기에 가장 합당한 령도력과 자질을 갖추신 분》이라고 지적한것은 국제적인 파문을 일으켰다. 중국사람들이 《왕관을 쓰지 않은 녀왕》이라고 평가하고있는 이 이름난 언론인도 중국혁명의 근거지인 연안이나 해방지역의 후방에서 글을 썼지 총포탄이 날리는 일선참호들에는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인민의 조국해방전쟁사는 녀성들이 남자들과 똑같이 포연탄우속을 뚫고 싸우는 1선참호들에 달려나가 취재집필활동을 과감히 벌려 전사들을 원쑤격멸에로 고무격려한 훌륭한 글을 써낸 위훈을 자랑스럽게 전하고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항일혁명투쟁시기 <3.1월간>이나 <종소리>에 실린 기사들은 항일혁명투사들이 전투의 여가를 타서 직접 쓴 글들이였으며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에도 종군기자들은 총포탄이 쏟아지는 전투장에서 글을 썼습니다.》

조영은 인민군신문사의 종군기자로 활동하였다. 작은 키에 귀염스럽게 생긴 그는 연약한 녀성이였지만 남성들과 같이 전장을 누비며 다니였고 좋은 글을 써냈다. 그의 글은 그 녀자의 성격과 같이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맛이 있었다. 《두 공병의 대담성》, 《굴하지 않는 통신병》, 《용감한 정찰병》등에서 보는바와 같이 그 어느 군종, 그 어느 병종을 다치지 않는데가 없었다.

녀성종군기자로서 얼마나 많은 가렬처절한 싸움마당에로 달려갔겠는가를 상상할수 있다. 전투실기 《백절불굴의 투지》에서와 같이 항일의 혁명전통을 이은 인민군전투원들의 무비의 대중적영웅주의와 불굴의 의지를 내용으로 한 글이 있는가 하면 《교묘하고 령활한 전술로 적련대부를 습격》과 같이 전사들의 용감성과 지혜로움을 주제로 한 글도 있었다.

녀성의 몸으로 혼자서 다양한 대상을 취급한 기사들로 신문 한면을 다 차지하는 중점편집도 맡아하였다.

리계심은 인민군대의 군단신문주필가운데서 전군적으로 유일한 처녀녀성주필이였다. 그가 만든 군단신문 《강철부대》는 총정치국후열에서 언제나 모범으로 평가되였다.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 1학년에서 문학공부를 하다가 군복을 입고 반격의 길에 오른 그는 일선사단의 군의소준의로 복무하였다. 군의소시절의 리계심은 웃기를 잘하고 짬만 있으면 시를 쓰는 태평스러운 처녀였다.

그가 시를 잘 쓴다는 소문이 군의소담장을 넘어 사단으로, 군단으로 날아가 지휘관들의 귀에까지 들어갔으며 그후 군단신문주필로 되였다.

매사에 정열적이고 승벽이 센 새 처녀주필은 남자들을 찜쪄먹게 부서관리를 잘 하였고 신문도 빈틈없이 만들었다.

그는 언제나 나의 위치는 제1제대, 1참호라고 하면서 1211고지전투때에는 련대전방지휘소로, 거기서 또 최전방인 돌출부로 나가 탄약도 날라주고 부상병도 처치하다가 적들이 다가들면 수류탄을 던지고 총도 쏘면서 짬시간마다 기사를 썼다. 이렇게 만든 신문은 군단을 들끓게 하였다.

리계심은 습격조활동에 대한 기사를 통하여 천재적군사전략가이시며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신 최고사령관동지의 탁월한 군사전법을 세상에 전하기 위하여 습격조를 따라 적후로 들어가 적수송렬차행렬과 땅크집결처를 죽탕쳐버리는 습격조원들의 통쾌한 모습을 부상당한 몸으로 구술하여 《밤호랑이들의 위훈》이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발표하였다.

기사는 신문에 나가자마자 군인들속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도 그럴것이 그 글은 리계심동무가 습격조성원들과 같이 행동하면서 자기 눈으로 보고 듣고 체험한것을 방불하게 그려냈기때문이였다.

얼마후 리계심은 인민군신문사에 소환되여 전전선을 취재하는 종군기자로 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키워준 군단신문주필시절을 잊지 못하였다.

전후에 시인으로 이름을 날린 그는 개인시집을 내는데 만족하지 않고 젊은 시절의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추억을 더듬어 2건의 중편소설을 썼다.

하나는 군의소시절의 생활을 담은 《녀준의의 일기》였고 하나는 처녀주필의 잊지 못할 사연을 엮은 《박우물》이라는 소박한 제목의 소설이였다.

리종희는 당시 조선중앙방송위원회 정치편집국 기자로 활동하였던 24살의 처녀였다.

원산에서 출생하여 어느한 녀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해방후 인민학교 교원을 거쳐 원산교원대학 교무과장을 하던 그는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입대하여 땅크부대에서 소위로 복무하다가 내각간부학교를 나오고 주체41(1952)년 8월부터 방송기자로 사업하였다.

당시 전선방송사업에 대하여 깊은 주의를 돌리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선과 후방을 련결하는 교량적역할을 하는 방송프로가 있으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그것은 인민군장병들에게 큰 힘이 될것이라고 가르쳐주시였다.

중앙방송위원회에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받들고 《전방에서 후방에 보내는 편지》, 《후방에서 전방으로 보내는 편지》형식의 고정방송프로를 주에 몇시간으로 정하고 그 담당자로 리종희를 선발하였다.

리종희는 이 직무에서 1년간 쉬임없이 종군의 나날을 보내였다.

그가 쓰고 편집한 글들은 그대로 전선에서 싸우는 전사들과 후방인민들을 원쑤격멸에로 불러일으키는 비수가 되였다.

리종희가 마지막으로 한 사업은 정전담판에서 포로교환문제가 합의되고 병상자교환사업이 시작되자 리상벽방송원과 함께 판문점에 파견되여 우리측 포로들에 대한 미제의 야수적만행을 폭로하는 현장방송이였다.

주체94(2005)년 77살을 일기로 세상을 마칠 때까지 그는 종군하던 나날의 정신을 잊지 않고 살았다.

계민성은 해방후 평안북도 선천에서 공청에도 들고 당에도 입당한 후 평안북도당과 중앙당에서 사업하였으며 1948년 1월부터 로동신문사 기자로 일하였다.

이미 《선거와 안해》라는 소설을 발표한바 있는 그는 국립연극단에서 본격적인 극작가로 준비하고있던 시기에 전쟁을 맞았다.

그는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의 배려로 받은 집이 적들의 폭격에 형체가 없이 무너져내리는것을 보았을 때 원쑤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끓는 가슴을 달랠수 없었다.

그는 그 걸음으로 딸애를 친정어머니에게 맡기고 군대에 입대하였다.

엄마품에서 떨어지기 싫어하는 철모르는 어린 딸을 친정어머니에게 맡기고 떠나는 계민성의 심정이야 오죽하였으랴만 그는 가정의 행복도 조국의 운명보다 귀중치 않다는 생활의 철리를 심장에 새기고 조국보위초소로 결연히 떠났다.

배치된곳은 최고사령부 통신지휘국 직속 무선강습소였다. 군인들속에서 대학생들과 전문부문일군들을 제대시킬데 대한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의 명령에 의하여 계민성도 제대되게 되였다. 그러나 그는 군복을 벗을수가 없었다. 계민성은 곧바로 남편이 싸우고있는 중앙통신사 전선지사로 파견해줄것을 요구하여 승낙을 받게 되여 철령너머 돌골에 자리잡고있는 전선지사에 가게 되였다.

계민성은 전선동부에서 남편과 함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싸우는 고지와 참호들을 뛰여다니며 참신한 종군기를 썼다.

정전될 무렵 그는 개성판문점 정전담판회의장에 나가 포로교환사업이 진행되는동안 해설대표단성원으로 사업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의 녀성종군기자들은 청춘도 생명도 가정의 행복도 오로지 사랑하는 자기 조국의 수호에 바친 열렬한 애국자들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