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일본군《위안부》제도의 조작목적

 2019.3.23.

인류력사의 갈피에는 수많은 침략전쟁이 기록되여있고 침략자들이 강점한 지역과 나라들에서 살인, 강도, 강간, 략탈과 같은 범죄행위를 감행한 사실은 이루 헤아릴수 없이 많다. 그러나 국가권력을 총발동하여 《위안부》제도를 만들어놓고 녀성들을 강제로 전쟁터에까지 끌고다니며 성노예생활을 강요하고 학살한 그런 나라는 오직 일본밖에 없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일본군처럼 전쟁마당에 〈위안부〉까지 끌고다니며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사람들을 도살한 군대는 세계전쟁사에서 더는 찾아볼수 없을것이다.》 (김일성전집》 제97권 199페지)

일본군《위안부》제도의 조작목적은 첫째로, 일본침략군의 전투력저하를 방지하려는데 있었다.

원래 일본의 군부에서는 력대적으로 군인들이 부대주변 매음녀들을 찾아다니거나 공창이나 사창에 출입하는것을 풍기문란으로, 군사규률위반으로 단속통제한것이 아니라 묵인하여왔다. 이것으로 하여 군인들속에서 성병환자들이 수많이 생겨났으며 특히 전시환경속에서는 그것이 더욱 심화되여 전투력을 심히 약화시켰다.

일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통하여 대량적으로 산생된 사상자의 발생과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현지군인들의 휴가제의 페지, 장기전선근무를 강요하였다.

언제 끝날지 기약할수 없는 침략전쟁은 병사들속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염전사상을 만연시켰으며 정신도덕적으로 부패타락한 병사들은 가는 곳마다에서 부녀자들에 대한 야수적인 성폭행만행을 미친듯이 감행하였다.

일제침략군의 점령지들에서 벌어진 살륙, 략탈 특히 녀성들에게 감행된 성폭행만행은 군대내에 성병을 만연시켰으며 그로 인하여 군대의 전투력이 저하되는 사태를 가져왔다.

일본의 군부는 이것을 수습함이 없이는 전투력을 보존하기도 어려우며 나아가서 《대동아전쟁》에도 커다란 부정적영향을 줄것이라고 인정하고 제국주의군대의 악습 그대로 군인들의 성적요구를 체계적으로 충족시켜주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당시 상해전선에 파견되였던 제11군 병참부의 후방담당 장교였던 센다 가꼬는 《군대에 있어서 병사들의 성을 통제하지 않는 한 현재의 현상과 같은 사태가 계속되면 씨비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전투력이 격감되지 않겠는가 하는 공포와 근심 … 그래서 군으로서 관리매춘제도의 설립, 군직속의 관리매춘부를 모을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일제는 식민지나라들에서 처녀들을 대대적으로 끌어다 일본침략군의 성적요구를 충족시켰다. 일제가 자국이 아니라 식민지들에서 처녀들을 성노예로 끌어간것은 결코 일본녀성들의 권리를 생각해서가 아니였다.

언제인가 일본의 한 녀성은 일본잡지 《세까이》에 발표한 글에서 일본군이 자국처녀들을 성노예로 끌어가지 않은것은 인륜도덕이나 인권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단지 인적자원의 재생산력으로서의 일본녀성들의 생식능력이 없어지는것을 두려워했기때문이라고 썼다.

결국 일본은 자국이 아니라 식민지나라들과 강점지역에서 녀성들을 강제유괴하여 일제침략군의 발길이 미치는 다른 지역으로 끌고가 성노예생활을 강요하였던것이다.

일본군《위안부》제도의 조작목적은 둘째로, 조선민족의 피줄을 끊고 민족전체를 멸살시키려는데 있었다.

일본군《위안부》제도는 조선녀성들뿐아니라 중국과 필리핀,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과거 일제의 침략을 당한 아시아 여러 나라 녀성들에게도 강요되였다. 그러나 일본군《위안부》구성에 있어서 어느 나라 민족녀성에 비하여 압도적다수가 조선녀성들이며 그 구성에 있어서도 대다수가 미성년의 처녀들이다.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간 조선녀성이 현재 20만명으로 추산되고있는것은 공인된 사실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되는 문제가 군대성노예로 징발된 녀성들의 나이구성이다. 일본군《위안부》로 랍치된 조선녀성의 대다수가 10대의 미성년, 20살안팎의 젊은 미혼녀들이였다.

일본군《위안부》의 조선녀성 20만명중 대부분이 처녀들이였다는 사실은 그 목적이 조선민족말살정책을 획책한 뚜렷한 증거의 하나라는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실례로 되는것이다.

일제는 수많은 조선녀성들을 《위안부》로 끌어넣고 그들의 생식기능을 소멸함으로써 장차 조선민족의 혈통을 끊어놓으려고 하였던것이다. 만일 전쟁이 10년이상 지속되였더라면 조선의 젊은 녀성들은 거의다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갔을것인데 그렇게 되면 조선민족존재자체가 위기에 처하였으리라는것은 명백한 사실이였다.

일제는 또한 조선의 젊은 녀성들을 해외각지에 체계적으로 징발하여 민족자체를 와해시키려고 획책하였다. 이것 역시 한 민족의 지역적공통성을 말살하기 위한 민족말살정책의 또 하나의 뚜렷한 증거로 볼수 있는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여러 문서들과 피해자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조선녀성들이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간 지역은 다음과 같다.

조선-경흥, 웅기(라선), 혜산, 라남, 함흥, 풍산(김형직군), 부산, 인천, 창원 등

중국-베이징, 상해, 남경, 광동. 장춘, 운남, 홍콩, 마카오 등 50여개 지역

일본-오끼나와, 오사까, 히로시마, 구마모또 아오모리, 시즈오까, 와까야마, 나고야, 혹가이도 등 10여개 지역

인도네시아-쑤마떼라, 쑤라바야, 쟈바, 할마에라 등 20여개 지역

먄마-양곤, 라시오, 미코키나 등 10여개 지역

이밖에 싱가포르, 싸할린, 몽골, 캄보쟈, 인디아, 필리핀, 브루네이, 파푸아뉴기니아, 꾸릴렬도, 사이판섬, 괌도, 니고바르 등이다.

이것은 일제가 침략전쟁을 저지른 그 어디에나 반드시 조선녀성들을 《위안부》로 끌어갔다는것을 보여주며 동시에 이것은 조선민족말살정책의 중요한 고리로 삼았다는것을 말하여준다.

이렇게 끌려간 대부분의 녀성들이 그리운 고향과 부모형제들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제침략군의 폭행과 학대, 집단학살 등으로 무참히 목숨을 빼앗기였다.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간 20만에 달하는 조선녀성들가운데서 살아 돌아온 녀성들은 그 몇백분의 1도 되지 않으며 그것도 《위안소》에서 도망치거나 전쟁의 혼란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일본군《위안부》제도의 조작목적은 셋째로, 일제침략군의 점령지들에서의 반일감정을 무마하기 위한 이른바 《치안유지》를 강화하려는데 있었다.

일본침략군의 점령지들에서 감행되는 무차별적이고 야수적인 성폭행만행은 그곳 주민들의 반일감정을 폭발시켰다.

특히 1937년 《로구교사건》조작이후 일제는 남경, 상해를 점령하면서 중국인민에 대한 야수적인 학살과 부녀자들에 대한 치떨리는 강간, 폭행, 학살만행을 대대적으로 감행하였다.

일제의 악귀같은 만행으로 남경에서만도 11~53살에 이른 중국녀성가운데는 강간당하기를 37회, 어떤 녀성은 백주에 17명의 군인들에게 륜간당하기까지 하였다.

일제야수들에 의해 살해된 녀성수는 전후 도꾜국제재판소의 판결에 의하더라도 11만 9 000명이라고 하였으며 한 중국력사가는 《중국혁명사 강의》에서 일본침략군의 남경점령전후의 한달 남짓한 사이에 시내에서 발생한 강간사건은 2만건이상이 되였다고 썼다.

점령지들에서 감행되는 일제침략군의 야수적인 살인과 략탈, 성폭행은 점령지역 인민들의 반항을 극도로 격화시켰으며 이것은 그들을 반일항전에로 불러일으키는 주요한 원인으로 되였다.

이와 관련하여 1938년 6월 《군인, 군대의 대주민행위에 관한 건 통첩》에는 북부지역의 남방면군 참모장 오까베가 《강력한 반일의식을 격성시킬 원인은 각처 일본군인의 강간사건이 전반에 미쳐 실로 예상외의 심각한 반일감정을 조성시키는데 있다.》, 그러니 《… 될수록 빨리 성적위안의 설비를 갖추》는것이 필요하다고 한데서 명백히 드러나고있다.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 많은 성노예피해자들이 있지만 조선녀성들처럼 일제침략군의 발길이 미치였던 모든 지역들에 그렇게 대규모적으로 끌려간 례는 도저히 찾아볼수 없다.

일본정부는 과거청산에 대한 그릇된 자세와 립장을 버리고 일본군《위안부》문제를 비롯하여 조선인민에게 저지른 모든 반인륜적범죄행위에 대하여 성근하게 반성하고 그 진상을 깨끗이 밝히며 충분한 사죄와 배상을 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