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반일민족해방투쟁사에 기록된 순국처녀

 2019.3.23.

올해 전체 조선민족은 우리 민족의 해방투쟁력사에 길이 빛날 3.1인민봉기 100주년을 기념하였다.

3.1인민봉기는 일제의 야만적식민지통치를 반대하고 나라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싸운 전민족적반일애국투쟁이였다.

우리 나라의 근대 반일민족해방투쟁력사를 돌이켜보면 일제침략자들에게 빼앗긴 조국을 되찾고 민족의 자주권을 고수하기 위한 투쟁의 앞장에는 언제나 청년들이 서있었다.

우리 나라의 청년학생들은 3.1인민봉기가 발발했을 때에도 선봉결사대로 나서서 대오를 이루고 노도와 같이 총검을 박차고 투쟁의 거리로 달려나갔다.

이러한 투쟁들에 떨쳐나선 조선의 청년학생들은 하나같이 감옥도, 죽음도, 교수대도 두려워하지 않는 과감한 애국투사들이였다.

물론 애국적인민들과 청년학생들이 벌린 이 모든 투쟁들은 탁월한 수령을 모시지 못한것으로 하여 그때마다 실패로 끝났지만 피어린 성전들에는 민족의 장한 아들딸들의 고결한 넋이 슴배여있었다.

1905년 《을사5조약》의 날조와 《통감통치》에 뒤이은 10년간의 중세기적인 무단통치하에서 식민지노예의 비참한 운명을 강요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우리 인민은 드디여 주체8(1919)년 3월 1일 전민족적인 반일항쟁에 귈기하였다.

강도 일제에게 빼앗긴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되찾고 식민지노예의 멍에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민족적인 반일항전에 자기의 고귀한 청춘도 생명도 아낌없이 바쳐싸운 애국적인 청년학생들의 대오에는 순국처녀 류관순도 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나라 현대력사에는 류관순이라고 부르는 이름난 순국처녀가 있다. 류관순이라고 하면 먼저 기미년 3.1운동을 회상하게 된다. 리화학당에서 교비생으로 학업에 전심하던 처녀는 3.1운동의 열파로 학교가 페쇄되자 고향 충청남도 천안에 내려가 독립만세시위를 조직하고 그 시위를 진두지휘하다가 일본헌병들에게 체포되였다.》 (김일성전집》 제97권 312페지)

애국적인 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3월 1일 폭발한 시위투쟁은 삽시에 전국적범위에로 확대되였으며 그것은 점차 폭동적성격을 띠고 발전하였다.

조선인민의 전민족적인 반일항쟁에 질겁한 일제는 조선주둔 제19, 20사단무력과 헌병, 경찰력량을 총동원하였으며 그것도 모자라 본토로부터 6개 대대병력과 수백명의 헌병을 더 끌어들여 가장 야만적인 방법으로 우리 인민의 투쟁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한편 《조선총독부》는 반일시위투쟁이 폭발하자 즉시 각 학교들에 일제히 휴교령을 내려 정상적인 학업을 중단시키고 청년학생들이 항쟁의 거리에 떨쳐나서지 못하도록 하는 비상조치를 취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이러한 강압적인 조치에 따라 리화학당도 페교되였고 이 학교의 중등과 1학년에서 공부하던 류관순도 외출을 포함한 일체 행동이 금지되고 기숙사에 갇히게 되였다.

기숙사에 갇혀 매일과 같이 하늘땅을 뒤흔드는 만세소리를 들으며 끓어오르는 격정을 금할수 없었던 류관순은 학교당국의 조치에 의해 그해 3월 13일 고향인 충청남도 천안군 지령리(현재의 천안군 병천면 룡두리)로 돌아왔다.

당시 류관순의 일가는 지방에서는 보기드문 교육자가정이였다. 류관순이 세살나던 해인 1907년에 그의 아버지 류중권은 고모다라는 일본인고리대금업자에게 자기 땅을 저당잡히고 돈 300원을 꾸어 흥호학교라는 사립학교를 세우고 후대교육사업을 적극적으로 벌리였다.

그후 리자로 하여 불어난 3 000원의 빚을 갚지 못하여 고모다로부터 온갖 멸시를 당하며 매를 맞아 피를 흘리는 아버지와 행패를 당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류관순의 머리속에는 일본놈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족속들이라는것이 새겨지게 되였다.

류관순이 12살때인 주체5(1916)년을 전후하여 리화학당에서는 인재육성을 목적으로 전국적인 범위에서 우수한 녀학생들을 모집하는 사업을 진행하였다. 천안지역에서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류관순이 단연 뽑히게 되였으며 그리하여 그는 부모의 슬하를 떠나 공부하게 되였고 3년후에는 3.1인민봉기를 맞이하게 되였던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류관순은 아버지와 삼촌인 류중무에게 반일시위투쟁의 규모와 격렬성, 일제의 야수적인 학살만행에 대하여 상세히 이야기하면서 왜놈들을 피타게 절규하였다.

류관순의 말을 통하여 경성에서의 반일시위투쟁의 실상과 일제의 학살만행을 자세히 알게 된 류중권과 류중무는 그 내용을 이 지방의 유지들과 청신학교 교장 등에게 전하는 동시에 천안지역에서의 반일시위투쟁을 계획하고 해당한 준비사업을 진행하였다.

류관순은 시위투쟁준비사업으로서 주변의 여러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부녀자들에게 자기가 체험한 사실을 이야기해주는것과 함께 그들을 동원하여 시위참가자들에게 나누어줄 수백매의 《독립선언서》도 등사기로 찍어냈다.

천안지방에서의 독립만세시위투쟁은 4월 1일로 정해졌다. 그것은 이날이 바로 음력 3월 1일이며 천안지방에서 가장 크게 열리던 병천장날로써 장을 보러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는 사정을 고려한것이였다.

드디여 투쟁당일인 4월 1일 새벽이 밝아오자 류관순을 비롯한 핵심성원들은 투쟁이 벌어지게 될 병천장으로 들어가 여러 길을 통하여 장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며 투쟁열기를 고조시켰다.

낮 1시 장마당 한복판에 설치된 가설연단에 나선 이 지방의 유지인 조인원이 먼저 사회자가 되여 《독립선언서》를 랑독한데 이어 연단에 오른 류관순은 자기가 목격한 반일시위투쟁과정과 일제의 야수적인 탄압책동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면서 시위투쟁에 나설것을 격조높이 호소하였다.

10년간에 걸친 일제의 야만적인 무단통치하에서 식민지노예의 운명을 감수하며 망국의 한을 가슴에 안은채 몸부림치던 군중은 류관순의 호소에 호응하여 일제히 독립만세를 웨치며 병천읍에 있는 일본헌병분견소로 노도와 같이 밀려갔다.

당시 병천헌병분견소에는 보총과 권총으로 무장한 일제헌병들과 두명의 헌병보조원들이 있었다.

분노한 군중의 투쟁기세에 질겁한 일제헌병들이 쏘아대는 총탄에 맞아 맨 앞장에서 나가던 류관순의 아버지 류중권이 그 자리에서 숨졌으며 류관순의 어머니 리씨도 헌병들의 총에 맞아 죽었다.

부모의 희생에 격분한 류관순이 선참으로 헌병에게 달려들었으며 이리하여 천안헌병대본부로부터 도착한 증원부대까지 합쳐 군중과 헌병들사이에는 치렬한 격투가 벌어졌다.

이날 병천에서는 15명이나 희생되였고(일부 자료에는 30명이상이라는 기록도 있다.) 수많은 부상자들이 발생하였으며 수백명이 체포되였는데 류관순도 그중의 한 사람이였다.

헌병들이 류관순의 가슴에 총을 들이대고 사건의 주모자를 대라고 을러매며 그의 머리채를 감아쥐고 총탁으로 마구 두들겨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였지만 그는 굽어들지 않았다.

일명 《병천사건》이라고 하는 일본헌병들의 살륙전은 오후 5시가 지나서야 끝났다.

일제헌병들에 의하여 체포련행된 사람들은 곧 천안헌병대에 끌려가 악착한 고문을 당하였다.

천안헌병대장이 류관순을 달래며 《어린 네가 그러한 큰 일을 주모했다는것은 안될 말이다. 주모자를 바로 대면 너는 석방하겠으니 바로 말하라.》고 하니 류관순은 대노하여 《나는 … 비록 나이는 어리나 그보다 더 큰 일도 할수 있다.》라고 당당히 말하면서 헌병대내에 있는 류치장을 향하여 독립만세를 힘껏 불렀다. 이에 호응하여 류치장안의 조선사람들이 일제히 독립만세를 웨쳐 류치장을 뒤흔들어놓았다.

놈들의 악착한 고문에 의하여 나어린 류관순의 온몸은 불과 며칠사이에 만신창이 되였으나 기어이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고 부모들의 원한을 풀겠다는 일념은 매일 아침저녁 같은 시간에 웨치는 독립만세소리로 온 류치장에 울려퍼져 놈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일제교형리들은 살인적인 재판을 열고 10대의 나어린 처녀인 류관순에게 7년형이라는 중형을 언도하였다.

일제가 15살밖에 안되는 그를 어느 정도로 무서운 중죄범으로 보았는가는 3.1인민봉기를 최초에 선도한 33인에게 가한 형기가 최고 3년에서 최하 1년이라는것과 그 가운데서 무죄선고를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는 한가지 사실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얼마후 류관순은 3.1인민봉기에 참가하였던 애국자들로 초만원을 이른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였다.

온 조국강토를 들었다놓으며 반일투쟁열기로 들끓던 1919년도 어느덧 저물고 해는 바뀌여 1920년에 들어섰다. 이해 4월 28일 일본 도꾜에서는 일제의 정치적책략에 따른 영친왕 리은과 나시모또노미야 마사꼬와의 결혼식이 진행되였다. 이 결혼식은 영친왕의 아버지인 고종이 사망한지 불과 1년 3개월만에 진행되는것이였다.

당시 우리 나라에는 부모가 사망하면 3년동안 상복을 벗지 않는 풍습이 있었지만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는 조선에 대한 저들의 식민지통치를 미화분식하기 위하여 강제적으로 혼례를 치르게 하였던것이다.

이 정략결혼을 계기로 일제는 식민지조선에서 기만적인 《대사령》을 발표하고 3.1인민봉기 당시 구금된 많은 《정치범》들을 석방하였다. 540명의 정치범들이 석방되였지만 류관순만은 여기에서 제외되였다.

일제는 아침저녁으로 독립만세를 웨치며 저들의 죄행을 준렬히 규탄하는 류관순을 가장 불온한 인물로 보았던것이다.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후에도 류관순의 투쟁열의는 조금도 식지 않아 놈들을 전률케 했다.

아침저녁 울리는 독립만세로 류관순은 악착한 고문을 받았으나 그의 일과는 날마다 반복되였다.

리화학당 교사였던 박인덕이 보기가 딱하여 류관순을 만류하였으나 그는 자기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작정하였다, 우리가 10분의 1만 목숨을 바친다면 독립은 꼭 성취될것이라고 태연히 대답하였다.

류관순에 대한 악형은 날로 심하였으며 왜놈들은 그의 밥에 쇠가루와 모래까지 섞어넣었다. 그러나 왜놈들은 그의 반항기세를 꺾을수 없었다. 왜놈들의 가혹한 악형으로 만신창이 된 류관순의 육체는 여름철의 무더위를 더이상 이겨내지 못하였다.

주체9(1920)년 10월 12일 류관순은 서대문형무소에서 불과 16살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이렇게 류관순은 《조선독립 만세》의 환호를 가슴에 새기고 망국의 원한을 안고 눈을 감았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류관순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 후 우리 민족은 지금까지 줄곧 그를 《조선의 쟝느 다르크》라고 부르며 뜨거운 애정을 담아 추억하고있다고 하시였으며 그후에도 류관순이 나이가 많아 3.1이 낳은 영웅으로 민족사에 남아있는것이 아니라고 감회깊이 회고하시였다.

우리 인민의 반일민족해방투쟁사에 기록된 류관순은 전민족적인 반일항쟁인 3.1인민봉기에 자기의 청춘을 서슴없이 바침으로써 조선사람들은 남의 노예로 살기를 원치 않는 자주정신이 강한 인민이라는것을 세계에 보여준 순국처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