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세상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내고있는 천하제일의 보물-고려청자기

 2019.12.18.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고려자기는 색과 문양, 모양이 독특하고 아름답습니다. 세상사람들은 예로부터 고려자기를 천하제일이라고 하면서 보물처럼 여겨왔습니다.》 (김정일전집》 제2권 183페지)

중세 우리 민족의 첫 통일국가였던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정치와 경제, 군사, 문화 등 사회생활의 여러 분야에서 상당한 발전을 이룩하여 《고려》(Corea, Coro)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있다.

고려라는 이름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데는 고려자기가 상당히 발전한것과도 적지 않게 관련되여있다.

고려자기는 바탕색을 기준으로 볼 때 청자기, 백자기, 검은자기, 밤색자기, 진홍자기로 갈라볼수 있고 장식기법으로 보면 돋을무늬자기, 오목무늬자기, 뚫음무늬자기, 굵은무늬자기, 상감(무늬박이)자기, 분장자기, 화금자기 등으로 갈라볼수 있으며 형태(모양)에서는 물형자기와 사생형자기로 나누어볼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자기는 바탕색에서 청색(비색), 문양에서는 상감기법, 형태에서는 물형 등이 다 결합된 자기인 상감청자물형자기였는데 이것이 고려자기를 대표하였다.

상감청자물형자기는 그 신비로운 색갈과 아름답고 독특한 문양(상감), 부드럽고 우아한 형태(모양)로 하여 중세 도자기예술에서 극치를 이루고있었을뿐아니라 세상사람들의 경탄의 대상으로 되여있었다.

이 글에서는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도자예술의 극치》, 《세계의 일등예술품》이라고 절찬을 아끼지 않았던 천하제일의 보물-고려청자기(상감청자물형자기)가 당시로서 얼마나 우수한 공예품인가 하는데 대하여 소개하려고 한다.

고려청자기의 발전단계는 세단계로 나누어볼수 있다.

첫단계는 10세기 중엽에 청자의 초기발전단계으로서 청자기의 색갈이 완성된 시기였으며 둘째 단계는 11~12세기로서 상감수법이 적용된 청자기들이 높은 수준에서 만들어진 시기였고 셋째 단계는 13~14세기로서 청자기가 여러가지 형태를 띠고 실용성과 예술성이 결합되여 만들어진 시기였다.

고려청자기는 세계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독특하고 세련된 색갈과 기법, 여러가지 다양한 형태미를 갖춘것으로 하여 세상사람들의 경탄의 대상으로, 천하제일의 보물로 되여왔다.

세상사람들이 고려청자기를 천하제일의 보물로 여겨온것은 첫째로, 그 색갈이 너무나도 황홀하여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도자예술의 신비한 세계에로 빠져들어가게 하기때문이였다.

이리보면 맑고 푸른 가을 하늘이 그대로 비낀 듯 저리보면 심산계곡 깊은 못의 수정 같은 물에 담그어 놓은 듯 청아한 빛을 내는 고려청자기를 가리켜 옛 사람들은 비취옥과 같은 색갈을 낸다는 뜻에서 《비색청자》(翡色靑磁)라고도 불렀다.

청자기가 사람들을 도자예술의 신비한 세계에로 빠져들어가게 한것은 우선 청자기가 그 어느 나라보다 가장 이른 시기에 출현한것과 관련되였다.

중세시기에 도기로부터 자기로 이행하면서 세계 여러 지역에서는 독특한 도자기문화가 발전하였다.

12세기말 영국의 런던지역에서는 광택이 있는 도자기들이 만들어졌으며 13세기초에는 프랑스에서 루앙물주전자가 출현하였고 에스빠냐에서는 프랑스와의 대대적인 포도주무역을 위해 많은 포도주병들을 만들어냈다. 이 도자기들은 돌재료로 된 안료를 바른 거칠고 광택이 없는 자기들이였으며 도자기업이 비교적 발전하였다고 하는 에스빠냐의 발렌씨아지역에서는 15세기에 와서야 겉면에 광택이 나는 도자기들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도자기들은 색갈이 밤색 또는 흙색이였다.

유럽에서는 14세기에 와서야 고려에서 들어온 청자기를 알게 되였는데 그것이 너무도 신비하여 각이한 이름으로 불리우다가 18세기 프랑스의 작가 뒤르페가 쓴 장편소설의 주인공 《썰라돈-Celadon》(청자기)의 이름을 딴 때로부터 청자기로 명명되였다.

그리고 중국의 당나라(618-907년)에서 연청색을 띤 도자기가 나왔다고는 하지만 고려청자기처럼 청록색을 띠지 못하고 연한 풀색 또는 흰색에 가깝게 제작되였으며 그것이 송나라(960-1279년)에로 이어져갔다.

고려의 주변나라였던 일본에서는 청자기를 만들어낼 엄두도 못하였다.

일본은 도자기업이 성행한 나라였다고는 하지만 고려가 존재하던 당시에는 청자기를 전혀 만들어내지 못하였다. 현재 일본의 대표적인 도자기생산지인 세도, 니나미, 고마에, 신다노, 쯔부시마에, 쯔에스게는 중세시기에 스에끼(자기)생산의 6대요업산지로 불리우고있지만 이 지역들에서도 청자기는 16세기 이후에야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청자기를 10세기 중엽에 처음으로 창조해냈다.

10세기 중엽에 고려청자기가 창조되였다는 근거는 949년에 죽은 고려의 제3대왕 정종의 무덤에서 청자기들이 나온것과 황해남도 봉천군 원산리에서 발굴된 고려청자가마터가 992년것으로 확증된것을 통해서 알수 있다.

그러나 고려청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13세기라고 보는 잘못된 견해들이 제기되고있다. 대표적으로 일본학자 노모리 겡은 고려청자기가 13세기에 만들어졌다는 그릇된 견해를 발표하였다.

그가 고려청자의 출현시기를 13세기라고 발표한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그것은 노모리 겡이 1991년에 발굴된 황해남도 봉천군 원산리가마터의 발굴보고서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13세기라고 글을 써낸데 있으며 더우기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 이른 시기에 청자기가 만들어졌다는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제의 강도적인 본심을 그대로 대변하였기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려청자기가 다른 지역이나 나라들보다 가장 이른 시기에 나왔으며 그 신비한 색갈을 처음으로 알게 되였다는것을 말해주고있다.

청자기가 사람들을 도자예술의 신비한 세계에로 빠져들어가게 한것은 또한 색갈이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창조된것과 관련되였다.

조선민족은 예로부터 아름다운것을 지향하는 정서적감정을 가지고있다.

고려시기에 이러한 감정과 정서를 도자기예술에 구현한것이 바로 청록색이라고 말할수 있다.

청록색에는 색갈에 대한 고려사람들의 지향과 요구, 고상하고 아름다운 정서가 반영되여있다.

일반적으로 도자기의 색갈에 대한 느낌은 그것을 보는 순간에 포착할수 있다.

고려청자기의 색느낌은 형언할수 없이 깊고도 은근한 감정이 오래도록 젖어드는 심원한 정서로 안겨오게 하고있는데 그 매력이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자면 소지전체의 바탕색갈을 고르롭게 발색시켜야 하는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고려공예가들은 소지에 균일하게 확산되여있는 산화철점토를 사용하여 유약이 녹기전에 환원소성처리를 먼저 하였다. 이렇게 처리한 고려청자기의 색갈은 밝으면서도 무게있는 색갈로, 깊이있는 색갈이 은근히 살아나는 독특한 색채미로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도자기에 쓰는 유약은 불투명유약을 기본으로 쓰는것이 보편적으로 되여있는데 청록색에는 다른 나라들에서 찾아볼수 없는 높은 과학기술이 집약되여있다.

당시 고려공예가들은 청자기를 색조를 깊은 소지속에서부터 비쳐나오게 색갈의 선명선을 더욱 두드러지게 살리기 위해서 노력하였으며 이러한 성질을 잘 나타내기 위해 두가지의 난문제를 기술적으로 해결하였다.

하나는 유약원료에 맑은 청록색만을 얻기 위하여 산화철의 환원색외에 다른 색갈을 나타내는 불순물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청록색소제원료만을 엄격히 정선하여 쓴것이였고 다른 하나는 소지색갈을 먼저 발색시킨 후에 유약의 색이 발색하도록 소지의 소결온도와 유약의 융점과 시발온도를 적절하게 조절한것이였다.

고려공예가들은 청자기 색갈의 선명성을 해결할수 있는 합리적인 원료조성을 손색없이 해결하였을뿐아니라 재료의 성질과 잘 어울려 다양한 형태의 선흐름에도 알맞게 매우 부드럽고 우아한 느낌을 주게 창조하였다.

고려청자기의 청록색은 색채미와 재료가 잘 결합되여있는것으로 하여 토기나 도기의 색채미와는 달리 더욱 부드럽고 정교로운 점토의 질감이 윤기도는 사기물로 통일되여있다. 다시말하여 그것은 굳으면서도 부드럽고 깊고 무거워보이면서도 따뜻한 정서를 자아내는 독특한 느낌으로 친근감을 보여주고있다.

하기에 고려청자기를 감상할 때면 저도 모르게 그것을 만져보고 쓸어보며 두드려보려는 충동을 금할수 없게 된다.

이런 정서적느낌을 가질수 있게 한것은 고려청자가 색갈에서나 굴절에 있어서 미묘한 조화를 최상의 수준에서 완성한 과학기술의 결과물로 이루어졌기때문이였다.

하기에 13세기에 고려의 유명한 시인이였던 리규보는 고려청자기의 색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얼른거림은 푸른옥의 빛이요

령롱함은 수정의 모습이다

치밀한 옥은 살결과 같고

손을 대이매 옥살갖을 만지는것 같아라

이처럼 고려청자기의 청록색은 색채적미의 유기적인 통일을 이루고있어 단순한 표현으로 명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신기하고 우아하며 아름다운 극치를 이루고있다.

그렇기때문에 중국과 일본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도 고려의 청색자기를 천하제일로 여겼다.

중국의 옛기록에는 청자기의 청록색에 대하여 《도기색갈이 푸른것을 고려사람들은 비색이라고 하는데 근년(12세기-역자)이래 제작솜씨가 정교해지고 색갈의 광택이 더욱 아름다워졌다.》라고 하였으며 고려청자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고려도자의 연구》라는 책을 쓴 일본사람인 노모리 겡은 자기의 저서 첫머리에서 《고려시대에 모든 공예품이 그밖의 미술과 나란히 발달하였지만 그가운데서 가장 특색을 나타내여 세계적으로 이름높은것은 청자뿐이다.》라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려자기의 청록색이 세상사람들을 신비한 세계에로 빠져들게 하였다는것을 응변적으로 보여주고있다.

세상사람들이 고려청자기를 천하제일의 보물로 여겨온것은 둘째로, 당시로서는 그 어디에서 찾아볼수 없는 독특한 상감수법이 청자기에 훌륭하게 구현되여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냈기때문이였다.

조선민족은 오래전부터 도자기분야에 상당한 토대를 가지고있었다.

고려청자기에 적용된 예술적기법인 상감(무늬박이)수법은 고려시기에 적극 리용되였다.

고려청자기에 상감수법이 적용된것은 중앙집권적인 수공업생산체계와 함께 직업적인 공예가들이 도자기생산에 전심할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여있은것과 관련되였다.

당시 고려에서는 중앙집권적인 전문수공업 담당기구인 중상서, 도교서 등 10여개의 관청이 있었고 도자기생산을 위한 수십개의 업종을 맡아보는 기구체계도 정연하게 서있었다.

황해남도 봉천군 원산리가마터는 고려에서 도자기생산이 활성화되고있던 당시의 형편을 그대로 보여주고있다.

이 가마터는 1991년에 발굴되였는데 10세기초부터 14세기경까지 존재하였으며 거기에서는 청자기를 비롯한 수많은 유물들이 드러났다. 가마터는 1호부터 4호까지 있었는데 1호가마터는 고려이전시기의 가마터였고 2호, 3호, 4호는 고려초기의 청자기 가마터였다. 2호가마터 4차가마바닥에서는 쟁반형접시가 나왔는데 그릇 밑굽의 변두리에는《순화3(임진-992)년 태묘 제4실 제사그릇 장공인 왕공탁 만듬》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다.


황해남도 봉천군 원산리2호자기 가마터자리
황해남도 봉천군 원산리2호자기 가마터자리

황해남도 봉천군 원산리2호자기 가마터에서 발굴된 도자기와 거기에 새겨진 글자
황해남도 봉천군 원산리2호자기 가마터에서 발굴된 도자기와 거기에 새겨진 글자

이 자료들을 통해 10세기말에 봉건정부안에 도자기생산을 전문적으로 맡아하고있는 부서가 있었으며 원산리가마터가 매우 큰 규모와 높은 생산수준, 합리적인 가마구조와 소성용구들, 째인 생산방법, 유능한 공예가들에 의하여 운영되고있었다는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해주고있다.


청자기의 반죽 및 성형과정
청자기의 반죽 및 성형과정

고려공예가들은 11-12세기에 세계에서 유일하게 독창적인 장식기법인 상감기법을 청자에 적용하여 여러가지 무늬를 형상하였다. 특히 자개박이와 금은실박이기술은 청자공예에 널리 리용한 기법이였다.

상감기법은 청자표면에 무늬를 그리는것이 아니라 무늬모양대로 홈을 파고 거기에 여러가지 색갈의 흙(일명 도약)을 박아넣어 무늬를 나타내는 매우 독특한 장식방법이였다.


청자기의 모양잡기
청자기의 모양잡기
청자기의 상감장식기법-1
청자기의 상감장식기법-1

청자기의 상감장식기법-2
청자기의 상감장식기법-2
청자기의 상감장식기법-2

이것을 완성하자면 먼저 7~15%정도의 습도가 보장된 반제품에 칼이나 도장으로 무늬새김을 진행하고 도안에 근거하여 백도약과 흙도약을 여러번 반복하여 박아넣었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소지의 습도와 도약의 습도가 일치되였을 때 긁개칼로 덧놓은 도약층을 바탕면과 수평이 될 때까지 긁어주었다.

상감기법이 적용된 청자기가 완벽하게 되자면 소성을 잘해야 한다.

도자공예를 일명 불의 예술이라고도 할만큼 고려공예가들은 환원소성법을 과학기술적으로 실현하여 고려청자의 제작에 리용하였다. 우선 불을 지펴 건조단계(400~450℃)를 하고 산화상승단계(산화1단계 450~980℃)와 산화지속단계(산화2단계 980~1 050℃) 그리고 환원단계(1 050~1 180℃) 및 중성, 숙성단계(1 180~1 300℃)의 온도까지 올린 다음 서서히 랭각시켰다.


청자기의 소성과정
청자기의 소성과정

이렇게 만들어진 청자기는 높은 온도에서도 무늬색소가 녹아 흐르거나 흐리터분하지 않으며 선명한 유약밑층속에 깔려있기때문에 은근하게 안겨오고 바탕색과 잘 통일되여있다.

고려사람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청자를 상감청자라고 하였으며 비색바탕에 상감을 한 청자를 특별히 비색상감청자라고 하였다.

이처럼 고려청자기는 고려공예가들이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발전된 상감기법을 계승하여 새로운 력사적환경에 맞게 창조된것으로써 인류의 도자기문명을 가져오는데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그렇기때문에 세상사람들은 예로부터 아름답고 고상한 상감무늬가 적용된 청자기에 대하여 경탄과 부러움을 금치 못하였던것이다.


모란꽃새김무늬비색청자꽃병(12세기)
모란꽃새김무늬비색청자꽃병(12세기)(Celadon flower-vase with carved peony)

이에 대하여 1927년에 도이췰란드에서 출판된 《조선미술》에는 《고려시기의 청자는 색갈과 문양적인 양상에 있어서 류례없는 방법과 형태의 고전적인 완비 및 표현의 다양성으로 인하여 동부아시아에서뿐아니라 모든 문명한 나라들의 모든 시기에 있어서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한다.》고 평가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후에 도이췰란드에서 출판된 《조선인과 그들의 문화》에서도 《고려청자의 첫 종류는 같은 시기의 중국 송나라 제품보다 반투명의 보다 맑은 록색의 정결한 표면을 가지고있으며 … 이런 종류의 고려청자를 수집한 사람들은 모두 찬탄을 금할수 없어한다. 즉 오직 고려청자는 세계에 류례없는 일품이라고 평가하고있다.》라고 하면서 청자기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예술적기법을 높이 찬양하였다.

세상사람들의 경탄과 부러움을 자아낸 상감청자는 송나라에서도 전혀 도입되지 못하였고 오직 고려에서만 만들어졌으며 바로 여기에 고려청자기의 독특한 매력이 있는것이다.

세상사람들이 고려청자기를 천하제일의 보물로 여겨온것은 셋째로, 청자기가 실용성과 예술성이 결합된 다양한 형태미를 갖춘것으로 하여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 누구나 쓰고싶은 충동을 금할수 없기때문이였다.

고려청자의 형태는 기본적으로 물형자기와 도형적인 양상으로 된 기하형으로 만들어졌다.

고려청자의 형태미는 청록색의 색갈과 문양에 잘 어울리는 개성적이고도 참신한 모양으로 형상되여있다. 모든 형태미들이 실용성을 갖추고있으면서도 세련된 균형을 높은 수준에서 정교하게 구성하는 률동적인 형태의 다양성이 색갈과 문양의 통일속에서 매혹적인 정서를 안겨주고있다.

특히 고려물형청자의 부드럽고 우아한 형태미는 고려공예가들의 사물에 대한 세밀한 관찰력과 생동하고도 진실한 형상수법, 세련된 공예적솜씨에 의해 이루어진것이였다.

《모란꽃새김무늬비색청자꽃병》, 《참대순형비색청자주전자》,《련꽃모양비색청자꽃병》 등은 고려청자기들의 모양에서 걸작품들로 널리 알려져있다.

하기에 1123년에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송나라 사람인 서궁은 《참외모양의 술단지는 우에 작은 뚜껑이 있는데 련꽃에 오리가 엎으려있는 모양이다. 대접, 접시, 잔, 항아리, 꽃병, 탁잔도 잘 만들었다. 그중 술단지가 다른 그릇보다 특별히 잘되였다.》고 하면서 물형청자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였다.

일본에서는 16세기 이전까지만 하여도 청자기로 된 잔과 잔대를 성(자기의 령지)한개나 쌀 1만석과 바꾸었다는것은 고려청자기가 얼마나 수요가 높은 공예품의 하나였는가 하는가를 잘 보여주고있다.


청자국화무늬박이잔과 잔대(12세기-13세기)(Flower-shaped celadon cup and stand with carved floral design)
청자국화무늬박이잔과 잔대(12세기-13세기)(Flower-shaped celadon cup and stand with carved floral design)

유럽에서도 고려청자기를 보물처럼 여겼는데 실례로 1930년대 중엽에 일본의 한 학자가 베를린에서 살고있던 도이췰란드의 유명한 귀족을 방문하였을 때 그 귀족이 일본학자를 만나자마자 자랑거리로 제일먼저 고려청자를 꺼내놓고 보여주었다고 한 사실은 유럽사람들이 청자기를 값진 보물로 귀중히 여겼다는것을 말해주고있다.

이러한 고려청자기가 세상사람들속에서 특출한 색과 무늬, 참신한 형태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우아하고 고상한 《최고의 일등공예품》으로, 천하의 보물로 되여온것은 자명한 일이였다.

이처럼 고려청자기는 도자기문화로 그 이름을 떨치던 고려사람들의 재능과 지혜에 의해 창조되고 세계에 빛을 뿌린 인류문명의 걸작이였다.

그러나 고려문화의 걸작으로 창조된 청자기는 근대시기에 와서 제국주의렬강들에 의하여 수많이 략탈당하여 세계 각지에 소장되게 되였다.

민족의 재보이고 자랑인 고려청자기는 해방후 조선로동당의 주체적인 민족미술건설사상과 현명한 령도에 의해 비로소 재생의 빛을 뿌리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지난날 력사에 묻혀버렸던 고려청자기를 시대적미감에 맞게 계승발전시켜나가기 위한 방향과 방도를 뚜렷이 밝혀주시였으며 그 실현을 위한 현명한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그리고 오늘도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만수대창작사에 도자기를 전문적으로 창작하는 도자기창작단이 주체공예예술의 화원을 활짝 꽃피우고있다.

그리하여 백두산절세위인들의 세심한 손길아래 마침내 고려청자기는 500여년간의 잠에서 깨여나 청자로서의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현대고려청자기에 대한 세상사람들의 관심이 얼마나 높은가 하는것은 주체74(1985)년 10월 일본 도꾜에서 진행된 《현대고려청자기와 회화명작전》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그때 전시장을 보고난 일본의 어느 인사는 《조선의 고려청자기는 세계에서 으뜸가는 훌륭한 청자기이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도예기구에서 조선말이 그대로 쓰이는것만 보아도 그것을 잘 알수 있다. 우리가 일본의 청자기를 발전시키자면 조선의 고려청자기를 적극 따라배워야 한다.》고 하면서 감탄을 금치 못해하였다.

청자상감학구름무늬 주전자(1985년)
청자상감학구름무늬 주전자(1985년)
Celadon pitcher with inlayed willow pattern
청자상감모란꽃무늬 큰 호로병(1985년)
청자상감모란꽃무늬 큰 호로병(1985년)
Big celadon gourd-shaped jarwith inlayed peony pattern

이러한 사실은 고려청자기가 오늘도 세계에서 으뜸가는 훌륭한 자기였다는것을 그대로 실증해주고있다.

이처럼 고려청자기는 조선민족의 슬기와 창조적재능이 집약된 우수한 공예품의 하나였으며 세상사람들의 찬탄을 자아내는 인류문명의 보물로 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