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 인민은
우리 인민이 지니고있는 커다란 민족적긍지와 자부심, 유구한 력사를 가진 조선민족의 한 성원이라는 높은 민족적자존심에도 일찌기 우리 민족의 기원에 대한 견해를 바로잡아주시여 우리 나라 력사의 첫 페지에 관한 문제를 빛나게 해결하도록 이끌어주신
《인류의 발생발전과 사회의 발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는것은 우리 학생청년들이 과학적인 세계관, 옳바른 사회력사관을 가지는데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집니다.》 (
어느 나라 력사에서나 중요하게 제기되는 문제는 그 나라의 력사를 창조한 사람들은 누구이며 그들이 언제 어디서 발생, 발전하였는가 하는 력사의 첫 시작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이 문제는 단순한 학술상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유구성 특히 우리 민족의 기원문제와 직접 잇닿아있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그러나 1950년대말까지만 하여도 우리 나라 력사학계에서는 우리 민족 의 기원에 대한 문제, 구석기시대의 존재문제에 대한 옳바른 견해가 서있지 않았다.
지난날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일제와 그 어용학자들은 조선에는 구석기시대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신석기시대에 와서야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와 청동기시대를 거치지 않고 주변나라들의 도움으로 석기와 청동기, 철기를 함께 쓴 금석병용시대를 거쳤다고 떠벌이였다. 이 《금석병용설》은 우리 나라의 유구한 력사와 슬기로운 조선민족을 모독하는 반동학설로서 우리 나라 인류문화발전의 한 단계를 뭉청 잘라버리고 조선민족이 《렬등민족》이며 우리 민족의 문화는 《수입문화》이라는것과 조선의 력사발전이 기형성을 띠고있다는것을 《론증》해보려는 어리석은 목적으로부터 출발한 반동적인 궤변이였다. 일제는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을 합법화하기 위하여 그러한 궤변을 고안해냈던것이다.
한편 당시 조선력사에 대하여 쓴 글들이나 교과서들에는 우리 나라에서 사람의 기원에 대하여 명백하게 쓰지 않고 매우 모호하게 쓴 글들이 적지 않았다. 지난날 사대주의에 물젖은 일부 학자들은 우리 나라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굴되지 않았다고 하여 우리 나라에는 구석기시대가 없었으며 다른 지역에서 구석기시대를 거친 사람들이 신석기시대에 우리 나라 땅으로 이주해왔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일부 학자들이 철두철미 조선사람의 넋을 가지고 자기 나라의 력사를 연구하려는 립장에 서지 않고 교조주의적이며 사대주의적인 견해에 매달려있은것과 관련되였다.
그후 주체52(1963)년 봄 라선시 굴포리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굴됨으로써 일제의 반동적인 궤변과 일부 학자들의 사대주의적이며 교조주의적인 주장은 여지없이 론박되였으며 우리 나라에도 구석기시대가 있었고 그때에 벌써 우리 나라 땅에서 사람이 살고있었다는것이 과학적으로 해명되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알려진 굴포리유적외에도 구석기시대 전기, 중기, 후기에 해당하는 검은모루유적, 동암동유적, 대현동유적, 덕천승리산유적, 만달리유적, 부포리유적, 청파대동굴유적, 금옥동굴유적을 비롯한 수많은 구석기시대유적들과 고인화석, 신인화석, 조선옛류형사람의 유골들과 함께 많은 유물들이 발굴됨으로써 우리 나라땅에서 인류력사의 려명기부터 사람이 살았으며 인류진화발전이 합법칙적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는것이 과학적으로 확증되게 되였다.
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