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우리 나라 중세인장의 가치

 2016.10.19.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력사유적과 유물은 우리 민족의 슬기와 재능이 깃들어있는 민족의 재보이며 우리 나라의 유구한 력사와 발전된 문화를 전해주는 귀중한 유산입니다.》 (《김정일선집》 증보판 제1권 96~97페지)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이 창조한 문화재들가운데는 인장도 있다.

오늘날 흔히 도장이라고 하는 인장은 문자나 그림을 청동이나 옥, 상아, 금, 은, 동과 같은 재료에 주조, 뚫음, 새김 등의 수법으로 반대로 새겨서 최종적으로 종이나 천, 진흙 등 그우에 찍는 물건이다.

우리 인민이 오랜 옛날부터 널리 사용해온 인장에는 일정한 력사적시대의 사회제도와 사람들의 정치생활, 경제생활, 생활풍습 등이 반영되여있는것으로 하여 그 가치는 자못 크다.

중세인장의 가치는 첫째로, 중세 우리 나라 력사연구에 도움을 주는 자료를 제공해준다는것이다.

인장은 중세 우리 나라 력사연구에 도움을 주는 봉건국가에서의 왕의 호칭에 대한 자료를 알수 있게 해준다.

《발해국지장편》 권20 금석고적조에 의하면 1922년에 동경성 즉 옛 발해수도였던 상경성주변에서 《발해대왕》이라는 글이 새겨져있는 도장이 발견되였다고 한다. 물론 이 도장은 후세에 전해지지 않지만 이것은 698년에 성립된 발해의 지위를 보여주는 자료로 되며 대왕이라는 표현이 발해봉건사회에서 널리 사용되던 왕에 대한 호칭의 하나였다는것을 반증하여준다.

중세인장의 가치는 둘째로, 우리 인민이 이루어놓은 찬란한 문화전통을 리해하는데 도움을 준다는것이다.

중세인장은 우선 중세 우리 인민의 문자생활에 대하여 알수 있게 해준다.

중세 봉건통치배들의 사대주의로 인하여 문자생활에서 이 시기 한자는 대다수의 지위를 차지하고있었다.

그러나 발해의 기와들에 새겨진 글자들은 대부분이 도장을 찍은것인데 여기에 새긴 문자들은 한자로 읽을수 없는 문자들이 적지 않다.

이것은 단순히 한자의 오기로 볼수 없는것이다. 도장자체가 잘못 새겨진것도 있을수 있겠지만 한자로 보기 힘든 특수한 문자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발해에서 자기의 고유한 문자가 있었다는것을 짐작하게 한다.

이밖에도 인장에는 발해문자와 우리 글로 된것도 있었다.

중세인장은 또한 우리 인민들의 우수한 문화적재능을 실물로 보여주는것으로 하여 문화사적가치를 리해할수 있게 한다.

인장은 그 모양과 형태의 섬세성으로 하여 하나의 공예미술적작품이라고 할수 있다.

두꺼비장식도장 부조예군도장(밑면) 부조예군도장(측면) 두꺼비장식도장 부조예군도장(밑면) 부조예군도장(측면)

인장은 처음에는 실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였지만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이르러서는 감상의 각도에서도 만들어졌기때문에 하나의 기호품으로 되였고 그 내용과 함께 형식에도 상당한 관심이 기울여졌다. 그 형식은 력사적으로 이루어진것으로서 해당 시기 사람들의 미학정서적요구와 당시의 금속가공기술, 금속주조기술을 보여주며 인장의 글씨는 당시의 조각기술과 서예수준을 말해준다.

인장꼭지(손잡이)에 생동하고 섬세하게 조각된 거부기, 룡, 사자, 물고기, 새 등의 형상, 인장함과 인끈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장 부속품들을 하나하나 품을 들여 가공한것 등은 다 우리 인민들의 높은 예술적창조능력을 집중적으로 보여주고있다.

인장에서 특히 중요하게 찾아보게 되는것은 우리 선조들의 서예이다.

우리 나라 인장들에는 우리 나라에서의 서예발전정형을 리해하는데 참고로 되는 자료들이 반영되여있다.

일반적으로 서예란 글자를 미학정서적요구에 맞게 써놓은것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감상하면서 생겨난 말이다.

다감한 정서와 높은 예술적감수력을 가지고 살아온 우리 선조들은 인장의 글씨를 우아하고 정중하게 새겨놓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가능한 한 당대 이름난 서예가들의 글씨를 가지고 인장을 만들었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이르러 사람들은 인장을 감상하는것을 하나의 취미로 여기고 인면에 자기의 자나 호, 성구들을 새기고 서체와 형태, 그 내용을 감상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이르러 인장의 감상적기능이 높아진것도 실은 인장의 문자를 비롯하여 거기에 리용된 글씨를 감상하기 위한데 목적이 있었다.

1924년에 우리 나라 력대서예자료를 수집하여 간행한 《해동력대명가필보》에 인장의 문자를 탑본한 자료가 많이 수록된것도 인장의 문자가 서예자료로 인정되였기때문이였다.

이처럼 인장은 서예자료를 그대로 전해주고있어 우리 나라에서의 서예발전정형을 리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인장은 또한 금속가공기술과 출판인쇄문화의 발전을 알수 있게 해준다.

우리 나라에서는 대체로 금속인장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금속가공기술의 력사를 보여준다.

정백동무덤떼에서 나온 놋도장과 은도장들은 우리 나라에서 고대시기부터 금속주조기술과 금속가공기술이 발전하였다는 증거로 된다.

인장의 발전은 출판인쇄문화의 발전이라고 말할수 있다.

나무나 돌, 금속, 상아 등에 글을 새기여 그것을 종이나 천, 진흙 등 그우에 찍었다는것은 출판인쇄의 기초라고 할수 있다.

그러므로 고대시기의 인장유물들은 우리 나라에서 고대시기부터 출판인쇄문화가 발전하여왔다는것을 보여준다.

중세인장의 가치는 셋째로, 해당 시대 사람들의 신분관계를 알수 있게 해준다는것이다.

지난날에는 신분에 따라 인장의 재질과 크기, 용도가 달랐다.

지난날 증명문건들에서는 인장의 파생 또는 모방형태로 볼수 있는 손바닥도장과 손가락도장, 필인(筆印:붓으로 그린 그림도장) 등을 볼수 있다.

손바닥도장은 이른바 수장(手掌)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녀자들이나 신분적으로 지위가 낮은 녀자노비들이 사용하던 방식인데 종이우에 오른손바닥의 형태를 그리거나 오른손에 먹물을 묻혀 종이에 찍는 방식으로 하였다.

손가락도장은 이른바 수촌(手寸) 또는 좌촌(左寸)이라고도 하는데 천민이나 노비들이 사용하던 방식이다. 《공식문건에 쓴 노비의 수표》를 이르는 말로써 왼손 가운데손가락의 첫째 마디와 둘째 마디사이의 길이를 재여 그림을 그리여 도장대신으로 썼다.

이처럼 손바닥도장, 손가락도장, 필인 등은 다 인장의 파생형태로서 당시 신분관계를 리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인장은 인면에 새긴 문자로부터 그 형식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민의 우수한 민족적재능이 깃들어있으나 인민들에 대한 착취와 압박을 강화하고 봉건통치배들의 반동적인 법과 제도를 강화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리용되였다.

민족문화유산들에는 우리 인민의 우수하고 뛰여난 민족적재능이 깃들어있는것만큼 앞으로 민족문화유산들을 더 많이 찾아내여 우리 민족의 유구성과 우수성을 더욱 빛내여나가야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