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우리 인민은 예로부터 늘 바다를 사랑하며 개척하여왔습니다.》 (
예로부터 개척되여온 조선동해는 고려에 이어 조선봉건왕조시기에도 우리 선조들의 활무대였다.
조선동해가 조선봉건왕조시기에도 우리 선조들의 활무대였다는것은 우리 인민들이 동해에 대한 관측과 어로활동을 활발히 벌린데서 잘 알수 있다.
우리 선조들은 우선 조선동해에 대해 관측하여 기록하거나 관측자료들을 가지고 론의하였다.
이 시기 조선동해에 대한 관측자료를 보면 1415년 양양지방에서 길주지방까지 동해의 물이 범람하여 바다물의 높이가 5~13척이 되였는데 륙지의 어떤 곳은 5~6척, 또는 100 여척이나 물이 찼으며 바다물의 진퇴가 조수와 같았다고 한 기록(《태종실록》 권29 15년 4월 임신)과 1605년에는 동해의 물이 붉어졌다는 기록(《선조실록》 권189 38년 7월 기해), 1647년 동해의 물이 거꾸로 흘렀다는 기록(《인조실록》 권48 25년 4월 정축), 1655년에 1565년처럼 또다시 동해에 얼음이 어는 재변이 일어났다는 기록(《효종실록》 권14 6년 4월 을묘), 1702년 동해의 물흐름이 바뀌였다는 기록(《숙종실록》 권37 28년 7월 경술), 1737년 동해에 또다시 붉은 조수가 밀려왔다는 기록(《영조실록》 권46 13년 11월 병진) 등이 잘 보여준다.
이 시기 조선동해관측에 대하여 론의한 정형을 보면 1450년 정린지가 명나라사람과 동해상의 밀물이 없는 문제를 가지고 론쟁을 하였고(《세종실록》 권127 32년 1월 임자) 성종(1470-1494년), 인조(1623-1649년), 영조(1725-1777년)때에 경연석상에서 동해의 밀물이 없는 리유를 론의하였다는 기록 등이 그것을 말해주고있었다.(《성종실록》 권65 7년 3월 신미), 《인조실록》 권19 6년 10월 병신, 《영조실록》 권96 36년 12월 임신)
이와 같이 조선동해에 대해 관측하거나 론의한 자료들은 조선봉건왕조시기 동해가 우리 선조들의 탐구와 연구의 대상이 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조선동해가 조선봉건왕조시기에도 우리 선조들의 활무대라는것은 또한 우리 인민들이 동해에서 어로활동을 활발히 벌린 사실을 통해 찾아볼수 있다.
조선봉건왕조시기 우리 선조들은 여러가지 바다물고기를 많이 잡거나 어장을 크게 확장하였다.
15세기 우리 선조들은 함길도와 강원도, 경상도의 앞바다에서 어로활동이 적극화하여 고등어, 청어, 련어, 황어, 빙어 등 고급어족들을 많이 잡았다.((《세종실록》 지리지 권155 함길도 고원, 북청, 길주목, 강원도 고성, 삼척, 경상도 동래, 영일)
자료에 의하면 1693년 여름 동래부의 능로군(배길을 안내하는 사람)출신인 안룡복은 울산의 어부 40명과 함께 물고기잡이를 떠났다가 풍파를 만나 울릉도에까지 갔다고 한다.(《증보문헌비고》 권31 여지고 19 해양1 동해 울진)
《림원십륙지》에 의하면 18세기말 19세기 전반기 우리 선조들이 어로활동을 활발히 벌리면서 동해에서 쥐치, 가오리, 도루메기, 멸치 등 새로운 물고기들을 잡았다고 한다.(《림원십륙지》 전어지)
특히 조선동해가의 명천지방에서 오래전에 잡아오던 명태의 생산량이 부쩍 늘어나면서 1902-1903년경 함경남도 홍원지방으로부터 오늘의 단천시 룡대(배나루)에 이르는 수역에 명태어장이 형성되여 흥성거렸다고 한다.
이처럼 조선동해에서 우리 선조들이 구체적인 관측과 함께 어로활동을 활발히 벌렸다는 사실은 조선봉건왕조시기에도 조선동해가 우리 선조들의 활무대였다는것을 명백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