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인민들과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신
한없는 검박성은
대원들과 꼭같이 한가마밥을 드시며 항일혈전을 헤쳐오시였고 전화의 그날엔 인민들이 조밥을 먹으면 우리도 조밥을 먹어야 한다고 하시며 검박한 생활을 하여오신
한평생을 인민행렬차에서 보내신
《나는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언제나 대원들과 같이 한가마밥을 먹고 같은 잠자리에서 자군 하였습니다. 조국해방전쟁시기에도 인민들이 조밥을 먹을 때 나도 조밥을 먹으며 싸웠습니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지난 시기처럼 생활하고있습니다. 그렇게 하여야 마음이 편안합니다.》 (
하늘땅을 뒤덮은 짙은 포연속에서 바야흐로 전화의 세번째 봄이 다가오고있던 주체42(1953)년 2월 21일이였다.
백양산기슭에 어둠도 걷히지 않은 이른 새벽 또다시 어느 한 공장의 로동계급을 찾아주신
그이께서는 인사를 올리는 로동자들에게 따뜻이 답례하시고 국이 식는데 어서 식사하라고 이르시였다.
하지만 누구도 선뜻 수저를 들지 못했다.
그러시고는 밥을 받으려고 배식구앞에 서있는 로동자들을 둘러보시며 밥은 어떻게 내주는가고 물으시였다.
한 일군이 식권을 받고 내준다고 말씀드리자
그런데
취사원아주머니는 로동자들이 배식구에 대고 늘 하는 말과 신통히도 같은 말씀이여서 범상히 듣고 밥이며 찬을 담아가지고 배식구로 다가오다가 깜짝 놀라 굳어졌다. 식사를 청하신분이 다름아닌
그이께서는 밥은 여러 사람이 같이 먹어야 맛이 있다고 하시면서 수저를 드시고 밥이며 찬을 일일이 맛보시였다.
노란 통강냉이밥, 시래기국에 김치가 전부였다.
로동자들이 먹는 식사그릇을 손수 받아드시고 로동자들옆에 스스럼없이 앉으시여 수저를 드시던
이렇게 이어간
하지만 오직 혁명밖에 모르시는 그이께서는 사치와 랑비를 극도로 미워하고 멀리하시였으며 검박하게 사시는것을 제일 큰 락으로 여기시였다.
주체81(1992)년 5월 5일 새벽 5시 30분에
아직은 사위가 어둠에 잠겨있고 온 도시가 단잠에서 깨여나고있던 때였다.
수행일군은 차가 달리는 동안 초조감을 누르지 못하고 연송 손목시계에 눈길을 주었다. 어차피 개성에 도착하여
시계바늘이 7시를 가리킬 때 승용차는 개성을 14km 앞둔 금천읍을 지나고있었다.
앞서달리던
순간 일군들은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다.
한것은 아침식사를 개성시 현지에 가서 하는것으로 계획하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떠난것으로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그러시면서
봄이라고는 하지만 농장원들도 아침저녁이면 솜옷을 껴입는 쌀쌀한 날씨에 인가도 없는 대도로옆에서
현지에 가면 인민들에게 페를 끼칠가보아 아침밥을 미리 준비시키신 사려깊은 우리
동서고금의 어느 력사의 갈피를 뒤져보아도 한 나라의 수령이 인민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길가에서 아침식사를 하시였다는 례는 없으며 수행일군들이 배고플세라 달리는 차안에서 맞춤한 장소까지 골라보시고 아침식사를 하라고 이르시는 자애롭고 다심한 사랑 또한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는것이였다.
이것은 우리
곽밥은 여느 곽밥보다 약간 클사하였는데 열어보니 식은 밥에 콩나물과 도라지무침이 반찬으로 정갈하게 담겨져있었다.
이날
그리하여 식사는 15분도 못되여 끝나고말았다.
7시 20분에 승용차행렬은 다시금 개성을 향해 달려 7시 50분에 개성에 도착하였다.
사실
인민들이 따뜻한 방에서 아침상을 마주하고있을 때
인민을 위한 천만고생을 락으로 여기신 우리
정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