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고구려의 화가 - 담징

 2023.4.7.

우리 민족의 력사에서 동방의 천년강국으로 자랑떨친 고구려의 사람인 담징은 이름난 화가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4세기에 만들어진 안악3호무덤과 그후 강서세무덤에 그려진 벽화나 고구려화가 담징이 창작한 동양미술의 3대걸작의 하나로 불리우는 일본의 법륭사 금당의 유명한 불화 같은것을 보면 벌써 4~7세기에 조선화가 대단히 높은 경지에 올라섰으며 주변나라들의 미술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는것을 보여주고있습니다. 이 그림들은 비록 벽화이지만 거기에는 조선화의 다양한 기법이 그대로 구현되여있습니다.》 (김정일전집》 제15권 223페지)

고구려의 승려출신 화가인 담징은 610년에 왜나라에 초빙되여 가서 그 나라의 문화와 기술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중세 우리 나라 서예가, 화가, 서화가들의 자료를 수록한 민족고전 《근역서화징》에는 《<일본서기>에는 고구려 영양왕 21년 경오년(610)에 고구려의 중 담징이 건너와 5경을 깨우치고 또 회화와 공예를 정통하고있어서 먹과 그림그리는 색감, 메돌을 만들어 사용하게 하였고 법륭사벽에 그림을 그리여 이름을 드러냈다.》라고 기록되여있다.

이 기록에서 보는바와 같이 610년에 왜나라에 초빙되여간 담징은 그곳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5경을 깨우쳐주고 채색과 종이, 먹 그리고 물방아의 제작기술과 사용방법을 배워주었다.

담징과 관련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도 전해지고있다.

…담징은 그로부터 2년후 왜땅에서 조선의 건축양식으로 세워진 법륭사의 금당벽화를 맡아 그리게 되였다.

그러나 담징은 한달이 지나고 두달이 지나도록 선뜻 그림을 그리려고 나서지 않았다.

한것은 그가 그림그릴 준비를 한창 하고있을 때 수나라의 300만대군이 고구려에 침입하였다는 소식을 들었기때문이였다.

담징이 혼자서 속을 태우면서 여러달을 보내고있었으나 그의 속내를 알지 못하는 법륭사의 중들속에서는 그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였고 그에 대한 말들이 많았다.

《저 사람이 정말 고구려의 이름난 화공이 맞는가?》, 《화공으로 가장하고 돌아다니는 건달이 아닌가?》, 《아직도 그림을 못그리고있으니 분명 가짜 화공이다.》

담징은 이러한 말들을 들으면서도 못들은척하였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법륭사의 주지가 담징을 찾아와서 말하였다.

《여보시오. 기뻐하시오. 고구려에 침입하여왔던 300만의 수나라군사가 을지문덕장군이 지휘하는 고구려군사들의 칼에 모두 목이 잘리웠다고 하오.》

그 말을 들은 담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지의 손을 잡고 되물었다.

《아니, 그게 정말이요?》

주지는 그것이 사실이라는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 소식을 알게 된 담징은 기쁨에 넘쳐 어쩔줄 몰라하더니 곧바로 산속에 흐르는 맑은 물에 달려가 몸을 깨끗이 씻고나서 색감과 붓을 들고 법륭사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수나라의 300만 침략군을 물리쳤다는 승리의 환희가 그의 가슴속에 소용돌이치면서 온몸에 기운이 솟구쳐올라 그의 팔은 벽우에서 춤을 추듯하였다. 이리하여 법륭사의 금당벽에는 신비로운 화폭이 펼쳐지게 되였다.…

담징이 그린 법륭사의 금당벽화는 안팎으로 모두 12면인데 그가운데서도 6호벽면의 《아미타여래상》이 제일 우수하다.

벽화는 흰색바탕에 연한 선으로 형태를 잡은 다음 색칠을 하였으며 마지막에 형태의 륜곽선을 다시 칠하여 완성하였다. 벽화의 세련된 선묘, 선명한 색채, 깊이있고 률동적이며 균형이 잡힌 짜임새 등은 담징의 예술적재능과 함께 당시 고구려회화의 높은 수준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담징의 활동은 일본의 력사책인 《법륭사전》에도 기록되여있다.

담징은 승려로서 불교사상의 영향을 받아 불화를 많이 그린것과 같은 제한성이 있으나 그의 뛰여난 학문과 기술, 회화는 일본의 문화와 기술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특히 그가 법륭사의 벽에 그린 그림은 비록 벽화이지만 거기에는 조선화의 다양한 기법들이 반영되여있어 7세기초 고구려의 회화발전수준을 뚜렷이 보여주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