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넋이 깃들어있고 선군조선의 정신과 기상이 응축되여있는 조종의 산, 혁명의 성산입니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백두산을 조선민족의 넋이 깃들어있는 조종의 산으로 높이 숭상하여왔다.
백두산과 결부된 수많은 전설들과 력사자료들은 우리 민족이 백두산을 얼마나 높이 숭상하여왔는가를 잘 보여준다.
향도봉소분지는 백두산의 향도봉에서 천지쪽으로 내려가면서 완만한 경사를 이룬 공지인데 현재 산우에서 천지로 내려가는 삭도와 돌계단이 설치되여있다.
향도봉소분지의 천지기슭가까이에는 몇개의 애추(자연적으로 굴러떨어져 쌓아진 벼랑돌무지)들이 형성되여있다.(사진-1)
그중에서 천지기슭으로부터 동남쪽으로 약 150m정도 떨어진 곳(향도봉소분지의 공중삭도역에서 동북쪽으로 약 200m 떨어진 지점)의 애추가 바로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우리 선조들이 백두산에서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리용되였다.(사진-2)
애추의 생김새를 보면 밑면은 길이와 너비가 각각 36m정도 되는 4각형에 가깝고 웃면은 길이 15m, 너비 12m정도 되는 타원형이며 그 높이는 약 9m정도이다.(사진-3)
애추의 웃면중심에는 큼직큼직한 막돌로 면을 맞추어 쌓아올려 직경이 3.2~3.5m, 높이 1.9m정도 되는 반구형의 돌무지가 있었다. 이 돌무지는 현재 웃부분이 많이 파괴되였는데 발굴해본데 의하면 봇나무껍질로 싼 유해가 나와 무덤무지라는것을 알수 있다.(사진-4)
이 무덤무지주변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 2개의 금석문(비석, 성돌, 기와, 벽돌, 종 같은 돌이나 금속 등에 새겼거나 쓴 글)을 발견하였다.
첫번째금석문은 무덤무지의 동남쪽변두리에서 발견되였는데 길이 140㎝, 너비 80㎝, 두께 70~80㎝정도 되는 넙적한 돌우에 《李太祖發願力塔 丁卯年七月十五日古蹟現 崔基男書 龜岩》이라는 24자의 글을 쪼아새긴것이다.(사진-5)
두번째금석문도 이 돌무지주변의 땅속에서 발견되였는데 길이 26㎝, 너비 20㎝, 두께 4~7㎝정도 되는 넙적한 돌의 한쪽면에 먹으로 《天主許輸文題詩 此地察公主 丁酉八月十六日 還鄕 尹德順之搨》이라는 26자의 글을 쓴것이다.(사진-6)
우리는 발굴된 유적유물들과 문헌기록자료들을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이 애추가 조선봉건왕조시기 우리 민족이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라는 사실을 해명하였다.
우선 새로 발견된 2개의 금석문들은 조선봉건왕조시기 향도봉소분지의 애추에서 제사를 지낸 내용을 담고있다.
첫번째금석문에 새겨진 글을 번역하면 《리태조가 힘을 빈 탑이다. 정묘년 7월 15일에 유적을 발견하였다. 최기남이 거부기바위에 글을 썼다.》로 된다.
이것은 조선봉건왕조초기에 이곳에서 힘을 비는 제를 지냈다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물론 이것이 력사적사실과 맞는가는 확인하기 어려운데 아마도 당시 글을 쓴 최기남이 천지호반의 종덕사에서 기도를 올리던 천불교신자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였을것이다.
백두산천지호반에는 20세기초에 지은 종덕사라는 절간이 있었다.
윤화수가 지은 기행문인 《백두산행기》에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씌여져있다.
《북편 천상수가 흘러나가는 어구에 펄썩 들어앉은 큰 암석우에 새로 건축한 사원이 보인다. 이것은 근래에 <최덩덕궁>이라는 … 무리들이 2층사원을 짓고 소위 100일기도를 하노라고 밤낮 북을 울리고 징쇠를 치고 목탁을 두들기며 념불하는 곳이다.》
천불교신자들은 매해 백두산천지에 올라와 100일동안 기도를 올렸는데 그 시기는 아마도 기온이 제일 높은 7, 8월경이였을것이다.
최기남이 올라와있던 시기는 7월이였으므로 천불교신자들의 기도기간과 일치되였을 가능성이 높다.
금석문에서 애추우에 힘을 빈 탑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돌로 쌓은 무덤무지를 돌탑으로 착각한것이다.
백두산에서는 오래전부터 돌탑에 대한 전설이 전해져오고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옛날 함흥의 한 병마절도사가 여러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향도봉소분지 애추우의 무덤무지는 원래 밑면의 직경이 3.2~3.5m이고 우로 올라가면서 점차 좁아져 반구형에 가까우므로
최기남은 고고학적인 지식이 없었으므로 천불교신자들의 말을 그대로 믿고
초보적인 연구결과에 의하면 이 무덤은 조선봉건왕조시기 어떤 사람들이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 유해를 묻은것인데 백두산에 대한 제사활동과는 아무런 련관도 없다는것이 판명되였다.
만약 이것이 종덕사가 건설된 1906년이후의 무덤이라면 매해 100일기도를 올리던 천불교신자들이 모를리가 없을것이다.
이 유적을 발견한 년대인 《丁卯(정묘)년》은 주체15(1926)년에 진행한 백두산탐험과정을 서술한 기행문 《백두산근참기》의 자료를 가지고 밝혀낼수 있다.
《백두산근참기》에는 탐험대의 일행중에 몸차림이 단정하고 눈에 열정이 있는 류다른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찬송거사 최기남옹(로인)》이라고 하였다. 최기남은 금강산을 비롯하여 우리 나라의 명산들에 오르면서 민족의 정기를 느끼려고 노력한 사람인데 다음해부터 백두산천지기슭에 막을 짓고 황조(단군)의 위엄과 신령스러움을 느껴보려는 자기의 계획을 말하였다고 한다.
최기남은 그후 자기의 계획대로 백두산에 올라가 우리 선조들이 백두산에 남긴 흔적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던것 같다. 그것은 최기남이 백두산탐험에 참가한것이 1926(병인)년이고 그 다음해가 1927(정묘)년이기때문이다.
그러므로 첫번째금석문은 1927년에 백두산에 올라와있던 사람들이 향도봉소분지의 애추가 조선봉건왕조초기에 제사가 진행된 곳이라고 인식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두번째금석문의 내용은 《하늘이 글을 싣는것을 허락하여 시를 지었는데 이 땅이 공주를 살핀다. 정유년 8월 16일 시골로 돌아갔다. 윤덕순이 베꼈다.》로 번역된다.
여기서 하늘이 글을 싣는것을 허락하여 시를 지었는다것은 윤덕순일행이 그곳에서 하늘에 시를 지을수 있게 승인해줄것을 빌었으며 이 땅이 공주를 살핀다는 표현은 백두산이 공주를 굽어살핀다는 의미를 담고있다.
이것은 윤덕순일행이 백두산 향도봉소분지의 애추우에 와서 진행한 활동이 하늘과 땅(백두산)에 공주의 복을 비는 제사의식이였다는것을 의미한다.
중세에는 왕실의 안녕을 위하여 천지신명, 명산대천에 대한 제사를 진행한 사실들이 전해진다. 실례로 중종왕비 윤씨와 명성황후가 왕실의 안녕을 빌어서 명산대천에 수많은 사람들을 파견하여 제를 지낸 사실들이 력사에 전해진다.
윤덕순일행이 제사를 지낸 년대는 금석문에 있는 공주(公主), 정유(丁酉), 천주(天主)라는 표현을 가지고 해명할수 있다.
금석문에 표기된 공주는 봉건사회에서 왕의 정실부인이 난 딸을 의미한다.
조선봉건왕조가 존재하던 시기에 존재한 정유년은 1897, 1837, 1777, 1717, 1657, 1597, 1537, 1477, 1417년이다.
그러므로 이 9개의 정유년가운데서 공주가 있은 년대에 바로 백두산에 와서 제사를 진행하였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조선봉건왕조시기의 력사기록을 보면 9개의 정유년들가운데서 1717, 1657, 1597, 1537, 1417년에 재위한 왕들은 당시에 공주가 있었다.
숙종(1674~1720)에게는 9명의 자녀가 있었으므로 그가운데 공주가 있을수 있고 효종(1649~1659)은 6명, 선조(1568~1608)는 1명, 중종(1506~1544)은 4명, 태종(1401~1418)은 4명의 공주가 있었다. 그러므로 제사를 지낸 년대는 5명의 왕들이 재위하던 기간에서 찾아야 한다.
제일 합당한 시기는 《천주》라는 표현을 가지고 추정할수 있다.
천주는 카톨릭교에서 하느
우리 나라에서 카톨릭교가 들어와 성행한것은 18세기말~19세기초인데 이 시기에는 국가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여 가혹한 탄압을 받았으므로 왕실에 접근할수 없었다. 그리고 천도교는 1860년대에 나왔으므로 년대상으로 맞지 않는다. 더우기 이때에 재위한 왕들에게는 공주가 없었다.
그러므로 현재의 조건에서는 금석문의 천주를 불교와 결부시킬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된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는 기본적으로 유교가 장려되였지만 부분적으로는 불교를 숭상한 때도 있었다.
실례로 세조와 명종시기에는 일정하게 숭불정책을 실시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중종이 재위하던 시기에 정유(1537)년이 있었다.
중종왕비 윤씨가 문정왕후칭호를 받고 수렴청정을 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명종왕재위시기에는 불교와 귀신을 매우 숭상하였다. 그는 이름난 절간과 명산대천에 궁녀들과 내시들을 보내여 선왕들과 명종왕을 위한 불공을 드리는 행사를 여러차례에 걸쳐 진행하였다.
윤씨가 적극적인 숭불시책을 펴면서 명산대천에 비는 행사를 벌려놓던 시기는 수렴청정을 하던 기간이였지만 그러한 신앙은 중종의 비로 있을 때에도 큰 차이가 없었을것이다. 중종의 재위기간인 1538과 1539년에 봉건정부내에서는 불교세력이 왕실의 비호밑에 성행한 실태를 두고 론난이 분분하였다.
당시 정부내에서 대윤인 윤임과 소윤인 윤원형, 윤원로형제간의 암투가 벌어지고 왕비인 윤씨자체도 일정한 위험을 느끼고있었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윤씨는 친오빠들인 윤원형, 윤원로형제들을 통하여 불교계의 인물을 명산인 백두산에 보내여 자기 딸인 공주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진행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윤씨는 아들 1명과 딸 4명을 낳았는데 정유년인 1537년이 아들 명종을 낳은지 3년째되는 해이므로 4명의 공주들중 1명을 이해에 낳았을수 있다.
이러한 력사적사실들에 근거하여 윤덕순일행이 백두산에서 제사를 지낸 년대를 1537년으로 고증할수 있다.
글을 쓴 윤덕순은 시골로 돌아갔다고 한것으로보아 봉건정부의 관리는 아니고 당시 백두산가까이에 있는 삼수나 갑산고을에서 안내로 나왔던 선비였던것으로 인정된다.
그러므로 두번째금석문의 내용은 1537년에 향도봉소분지의 애추우에서 조선봉건왕조시기 중종왕의 공주를 위한 제사가 진행되였다는 의미를 담고있다.
또한 이번에 조사한 향도봉소분지의 애추는 위치와 형태상에서 중세시기에 제사를 지내는데 적합한 조건을 가지고있다.
향도봉소분지는 옛날에는 물론 지금도 우리 나라 령토에서 백두산으로 올라가 천지로 내려가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에 있다. 그러므로 옛날에도 백두산에 올라 천지로 내려가자면 대체로 향도봉소분지를 통과하였을것이다.
향도봉소분지에서 이번에 조사된 애추는 분지의 중심부근에 있고 천지기슭과도 가깝다. 여기에 오르면 천지수면과 그를 둘러싸고있는 주변의 봉우리들이 한눈에 안겨와 천지호반에 내려간 사람들이 제사의식을 진행하는데 알맞다.
형태상으로 보아도 방대형으로 쌓아올린 대와 비슷하므로 얼핏 보기에도 옛날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인공적으로 만들어놓은 단처럼 보인다.
게다가 웃면에는 전설에 나오는 돌탑과 류사한 돌로 쌓은 무덤무지까지 있어 처음 보는 사람들도 이곳에서 이미전부터 그어떤 신성한 활동이 진행되였다고 생각할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
해방직후인 주체37(1948)년 7월 청진교원대학에서 진행한 백두산탐험에 참가한 사람들도 이곳을 보고 신앙을 위하여 인공적으로 축조한 조산이라고 하였던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번에 조사된 향도봉소분지의 애추가 조선봉건왕조시기 백두산에 오른 사람들이 제사를 지낸 장소, 제단이라고 볼수 있는 뚜렷한 근거로 된다.
또한 문헌기록을 보아도 우리 선조들이 1537년이전에 백두산에 올라갔댔다는 증거가 있다.
조선봉건왕조초기의 력사기록을 보면 우리 선조들이 적어도 15세기경에는 백두산에 올라갔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1432년에 윤회, 신색이 편찬한 《세종실록》 지리지 갑산부조에는 《영가사오리에서 서쪽으로 60리가면 백두산이 있다. 산은 모두 3개의 층으로 되여있고 꼭대기에는 큰 못이 있는데 동쪽으로 흘러 두단강(두만강)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 소하강(송화강)이 되며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고 서쪽으로 흘러 흑룡강이 된다. 그 산에 있는 새와 짐승들은 전부 흰색이며 산중턱이상에는 전부 부석이 있다.》라고 되여있다.
1481년에 량성지, 류성룡이 편찬한《동국여지승람》 갑산부조에는 백두산이 고을로부터 330리되는 곳에 있다는것과 백두산방향으로 가면서 설치된 보루와 봉수들, 백두산에서 압록강이 시작되는 곳인 마죽동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1530년에 리행 등이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회령부조에는 우의 내용과 함께 고을로부터 서쪽으로 7~8일되는 거리에 백두산이 있으며 천지의 둘레가 80리라는 내용이 보충적으로 올라있다.
백두산에 대하여 이 정도의 인식을 가지자면 한두명이 아니라 일정한 수의 사람들이 여러차례에 걸쳐 올라가야 가능하다.
이러한 력사기록들은 조선봉건왕조초시기에 벌써 국가적인 관심속에 여러 사람들이 수차례에 걸쳐 백두산에 올라가 조사를 진행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백두산천지호반의 소분지에서 발견된 유적유물들과 문헌기록들은 우리 선조들이 이미 15세기경에는 백두산에 올라 여러가지 활동을 진행하였는데 그중에는 천지호반에 제단을 설정하고 왕실의 안녕을 비는 제사활동도 있었다는것을 뚜렷이 실증해준다.
백두산은 동방에 솟은 명산이므로 주변나라에서도 관심을 돌려왔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중국 명나라에서 15세기초에 백두산에 있는 절간에 단청을 칠하기 위하여 1 000명의 군사를 파견하였다고 한다. 이 절간이 백두산의 어느 위치에 있었는가에 대하여서는 기록되지 않았는데 정월 19일(음력)에 료동을 떠나 소하강(송화강)가에 와있으면서 먼저 500명의 군사를 산속에 들여보내고 나머지 500명은 눈이 녹은 다음 4월 보름(음력)에 들어온다고 하였다.
이 자료를 보면 명나라 군사들은 북쪽으로부터 백두산에 접근하려고 하였는데 목적하는 절간은 적어도 4월경에 눈이 녹지 않아도 많은 인원이 가서 류숙할수 있고 5월 중순이전에 눈이 녹는 위치에 있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백두산의 북쪽에서 5월 중순경에 눈이 완전히 녹는 위치는 산마루나 천지호반은 아니고 송화강변과 가까운 산기슭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실례로 길림대학이 2014년에 길림성 안도현 이도백하진(송화강의 상류인 두도백하기슭)언덕 비탈면에서 발굴한 보마성유적은 발해이후 금나라까지 계속 사용된 건축물인데 백두산과의 직선거리는 50km정도이고 료, 금나라에서 백두산에 제사를 지낸 사당건물이였다고 한다.
그리고 1447-1455년사이에 편찬한 《대명일통지》에 《백두산은 높이가 200리이고 그 꼭대기에 못이 있어 주위가 80리나 되는데 남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고 북으로 흘러 혼동강이 되며 동으로 흘러 아야고하가 된다.》고 기록되여있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 1432년에 편찬한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보다는 늦은 시기의 자료이다.
그리고 《성경통지》에는 1679(강희17)년과 1685(강희23)년에 임금의 명령으로 조사단이 백두산꼭대기에 올라와본 자료가 상세히 기록되여있다.
백두산등산에 대한 문헌기록과 발견된 유적유물은 우리 선조들이 오래전부터 백두산을 민족의 넋이 깃들어있는 조종의 산으로 여기고 누구보다 먼저 개척하면서 높이 숭상하여왔다는 력사적사실을 더 잘 알수 있게 한다.
이번에 새로 조사되고 연구된 조선봉건왕조시기의 제단유적은 백두산의 력사적지위를 보다 명백히 밝히는데서 커다란 전진으로 된다.
참으로 백두산을 가지고있는것은 전체 조선민족의 자랑이고 긍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