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반일애국렬사 안중근과 서예작품

 2019.12.6.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안중근렬사가 일제의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을 처단하였지만 조선독립은 이룩되지 못하였습니다.》 (김일성전집》 증보판 제3권 163페지)

안중근은 조선민족의 기개를 과시한 애국렬사로 이름을 남겼을뿐아니라 옥중에서 일제를 단죄하는 글과 애국적기상이 넘치는 서예작품들을 남긴것으로도 력사에 한페지를 기록하고있다.

안중근은 우선 조선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격살시켜 조선민족의 기개를 과시한 애국렬사였다.

안중근은 1879년 9월 21일에 황해도 해주에서 아버지 안태훈의 맏아들로 출생하였는데 자를 응칠이라 불렀다.

안중근은 일찍부터 군사학을 연구하고 자기 집 재산을 팔아서 각종 무기를 구입하였으며 지방소년들로 향군회를 조직하고 군사훈련도 은밀히 하여왔다.

그후 1905년 그는 중국 상해에 가서 동료들을 규합하여 애국적인 활동을 벌리다가 아버지 안태훈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시 귀국하였다. 그는 1906년에 평안도 남포로 이주하여 애국적인 지식인들과 련계를 맺고 애국문화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그리고 그는 서우학회를 조직하는데 참가하였으며 남포지방에 사립학교를 세우고 애국적인 인재양성에 힘썼다.

1907년 8월이후 안중근은 손에 무장을 들고 반일의병투쟁에 나섰는데 1907년말에는 로씨야의 연해주지방에 가서 단지동맹을 뭇고 그 일대에서 반일의병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안중근은 1909년 6월에 의병대를 이끌고 북부국경일대에 진출하여 함경북도 경흥, 회령 등지에서 일본수비대들을 습격함으로써 놈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애국문화운동과 의병투쟁을 통하여 뜻을 이루지 못한 그는 조선침략의 원흉들을 처단하는것이 반일애국의 주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개인테로의 길에 나섰다.

바로 이러한 때인 1909년 가을에 일본추밀원 의장이였던 이등박문(이또 히로부미)이 《북만시찰》의 명목으로 만주로 간다는 정보를 들은 그는 이 기회에 그놈을 처단할것을 결심하였다.

안중근은 우덕순, 조도선, 류동하 등과 함께 1909년 10월 19일 울라지보스또크를 출발하여 할빈으로 향하였다.

10월 26일 아침 할빈역두에는 로씨야군대, 청나라군대의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고 이등박문과 회견하기로 되여있었던 로씨야재정대신과 각국 령사들을 비롯한 고위관리들 그리고 일반군중들이 나와있었다. 이등박문이 렬차에서 내려 로씨야의 군대를 사열하기 시작하자 안중근은 이놈에게 복수의 총탄을 퍼부어 즉사시켰다. 그는 계속하여 이등박문의 비서관과 일본총령사, 만철리사를 쏴죽인 다음 《조선독립 만세!》를 몇번이나 소리높이 부름으로써 조선인민의 불굴의 애국적기상을 보여주었으며 침략자들을 전률케 하였다. 원쑤놈들에게 체포되여 려순감옥에 압송된 안중근은 놈들의 그 어떤 고문과 회유기만책동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1910년 3월 일제교형리들에게 사형당할 때까지 견결히 싸웠다.

안중근의 이등박문처단은 우리 인민의 반일의지를 시위한 정의의 애국투쟁이였고 타민족에 대한 일제의 침략정책을 만천하에 폭로한 계기로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안중근렬사가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을 처단하였지만 일제는 더욱더 횡포하고 악랄해졌으며 조선강점을 합법화한 《한일합병조약》을 날조하고 조선에 대한 야만적인 식민지통치를 더욱 강화하였다고 교시하시였다.

조선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에 대한 안중근의 격살사건은 반일투쟁운동사에 심각한 교훈도 주고있다. 그것은 테로의 방법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이룩할수 없으며 오직 인민대중의 단합된 투쟁에 의해서만 더 큰 승리를 이룩할수 있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안중근은 또한 려순감옥에서 반일애국사상이 담긴 글과 글씨를 남긴 이름난 문장가, 서예가였다.

그는 감옥에서 《동양대세 생각하니 아득하고 어두워라. 뜻있는 사나이 편한 어이 잠을 자리 … 평화시국 못이름이 이리도 슬프구나, 침략정책 안고치니 참으로 가엽도다.》고 동양평화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집약하였다.

안중근은 려순감옥에서 일제침략자들을 동양평화의 교란자로 저주규탄하는《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다. 그는 서문에서 《동양평화의 의로운 전쟁을 할빈에서 전개하고 담판하는 자리를 려순구로 정하였으며 이어 동양평화문제에 대한 의견을 제출한다.》고 언명하였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에서 시종일관 일제의 침략정책을 단죄하였다.

그는 일제가 로일전쟁을 도발할 때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조선독립을 공고히 한다.》고 떠벌였지만 그것을 란폭하게 유린하고 동양평화를 파괴한데 대하여 강력히 규탄하였다.

당시 이에 대하여 어느 한 출판물은 《하루가 못미쳐 동서양에 전보가 날아가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는 조선에 뛰여난 인물이 있다고 경탄하였다.》고 전하였다.

그러나 그의 저술사업은 겨우 서문에 그치고 내용으로 전개하려던 《전감》, 《현상》, 《복선》, 《문답》의 4개구성안만을 남겨놓은채 일제에 의하여 학살당하였다.

그의 애국적인 유고는 일제에 의하여 흑막속에 묻혀있다가 반세기이상이나 지나서야 그 실체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였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조국산천이 귀중하다는 뜻을 표명하여 《제일강산》을 비롯한 여러건의 서예작품들도 남겼다.

서예작품

서예작품들은 비록 한문으로 되여있지만 작품의 내용은 오직 우리 나라가 제일이라는 불타는 애국의 일념을 직관적으로 잘 보여주고있다.

특히 서예작품 《제일강산》은 그가 지녔던 높은 애국적감정이 뜻과 글씨로 융합된것으로 하여 이름이 높았으며 이것은 근대시기 우리 나라 서예작품가운데서도 그 내용과 글자의 획 등이 다른 서예작품들보다 독특한것으로 하여 서예기법을 연구하는데서도 가치있는 작품으로 평가되고있다.

서예작품

나물을 먹고 물을 마시여도

즐거움은 그 가운데에 있다

경술년 3월 려순감옥에서 안중근 씀

이와 함께 그는 일제에게 굴하지 않고 꿋꿋이 싸워나가려는 자기의 굳은 절개를 보여주는 서예작품도 남기였다.

이처럼 안중근은 조선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처단하고 조선민족의 기개를 높이 떨치였을뿐아니라 반일애국적감정을 글과 서예작품으로 남긴 애국렬사였고 이름난 문장가, 서예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