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대동강고구려나무다리유적

 2018.2.19.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평양은 고구려의 수도였던것만큼 평양일대에는 고구려시기의 유적과 유물이 많습니다.》 (김정일전집》 제8권 232페지)

력사의 도시 평양에는 대성산성과 안학궁, 정릉사를 비롯하여 우리 인민들의 뛰여난 슬기와 창조적재능을 보여주는 많은 력사유적들이 있는데 그가운데는 고구려인민들이 건설하였던 대동강나무다리유적도 있다.

주체70(1981)년에 발굴한 나무다리유적은 평양시 대성구역 청호동과 대동강구역 휴암동사이에 있던 대동강을 가로지른 고구려시기의 유적이다.

이 나무다리는 본래 총길이가 약 375m이고 너비가 약 9m였다고 본다. 고구려사람들은 이 다리를 건설하면서 다리골조부재로 길이 8~10m, 너비 0.38m, 두께 0.26m의 굵은 나무각재들을 리용하였다.

발굴된 유적에 기초하여 이 다리의 모습을 그려보면 다리의 입구부분을 부채살모양으로 하고 나무깔판을 빼곡이 깔아 드나들기 편리하게 하였고 다리의 본체우에는 세로보와 가로보를 놓고 그우에 두꺼운 나무판자들을 가지런히 깔아 다니기에도 편리하고 보기에도 좋게 하였다. 입구와 본체의 가장자리에는 란간을 만들어서 통행의 안전을 보장하였다. 다리의 기둥(교각)은 물이 일상적으로 닿지 않는 입구부분에서는 듬직한 각재를 가로 댄 우에 든든한 모기둥을 세웠고 물이 늘 흐르는데 있는 본체부분에서는 각재로 귀틀을 짜고 그속에 돌을 넣는 형식의 기둥을 세웠다.

다리골조들은 매우 세밀하고 견고하게 만들어졌으며 못이나 꺽쇠같은 쇠붙이를 하나도 쓰지 않고 모든 이음새들을 사개물림하여 견고성을 보장하였다. 고구려사람들은 물기와 늘 접촉하게 되는 나무구조물에서는 쇠붙이를 써서 련결시키는 방법보다 사개물림하는 방법이 우월하다는것을 이미 알고있었던것이다.

대동강나무다리에는 부대시설들도 있었다. 다리의 입구부분 동쪽에서는 단단히 다진 바닥우에 동서 1.12m, 남북 1.54m의 크기로 귀틀모양으로 짜올린 등불대터가 발견되였다. 이 등불대는 두께 0.17m, 너비 0.1~0.14m의 목재들을 잘 맞물려 쌓은것인데 밤이면 여기에 등불을 켜서 길을 밝혀주군 하였다.

이 다리터에서는 다리의 골조와 함께 고구려시기의 기와쪼각들과 질그릇쪼각들이 알려졌다. 기와쪼각들과 질그릇쪼각들은 안학궁터와 대성산성남문터, 정릉사터를 비롯한 고구려시기의 건축터들과 무덤유적들에서 나온 질그릇, 기와쪼각들과 거의 같다.

《삼국사기》 등 여러 문헌기록들에는 《평양주대교》, 《평양남교》, 《사천교》 등의 다리이름들이 나오며 특히 《삼국유사》(권1 기이 제18대왕 실성왕)에는 413년 평양주에 큰 다리가 건설되였다고 씌여져있다.

고구려나무다리유적은 고구려의 왕궁이였던 안학궁의 남문에서 정남방향으로 8㎞정도 떨어진 대동강기슭에 위치하고있으며 그 남쪽으로 계속 나가면 고구려시조왕의 무덤인 동명왕릉에 이르게 된다.

고구려가 5세기전반기에 시조 동명성왕의 릉과 왕궁성인 안학궁 그리고 수도를 방어하기 위한 성들을 정연하게 건설보수하고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였다고 볼 때 대동강의 고구려나무다리도 수도건설의 일환으로 413년에 건설완성한 건축물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고구려의 나무다리는 5세기초경에 우리 나라에서뿐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보기드문 가장 큰 다리들중의 하나이다.

조선인민의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높여주며 인류문화의 보물고를 풍부하게 하는데 이바지하는 이 나무다리유적은 웅장한 수도성을 일떠세운 고구려사람들의 건축술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이르고있었는가 하는것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며 고구려의 정치와 군사, 경제와 문화의 우수성을 실물그대로 반영하고있는 귀중한 력사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