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번 쓰러지면 백번 다시 일어나 싸우는 백두의 영웅서사시를 창조하게 한 붓대의 자랑스러운 전통인 조선혁명의 고귀한 재부-항일혁명출판물.
《조국광복회를 창립할 때 〈대통령감〉으로 불리운 리동백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공산주의운동을 한다고 하면서 여기저기에 돌아다니고 여러 파벌에 관계하였던 사람이였습니다. 그는 종파분자들의 파쟁에 환멸을 느끼고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
리동백동지는 1920년대에 조선의 인테리들이 걸을수 있었던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길을 걸어 항일무장투쟁대오에까지 들어선 혁명적인테리의 대표자로서 량심적이고 혁명적이며 박식한 인테리였다.
1893년 1월 16일 함경남도 단천에서 출생한 리동백동지는 보통학교를 거쳐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서간도와 장백현 17도구 등지에서 교원을 하면서 독립군들과 깊은 관계를 가지였다. 독립군이 일제의 탄압으로 풍지박산되자 조선공산주의운동에 관계하면서 동분서주하다가 종파분자들의 파쟁에 환멸을 느끼고 그마저 외면해버린 리동백동지는 룡정에 들어가 신문기자로 일하였다.
리동백동지는 룡정에서 가정을 이루었으나 가정생활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간도대지에 불타오르기 시작한 30년대의 항일운동에 또다시 뛰여들었다.
화요파계렬의 그 무슨 어정쩡한 무리에 끌려든 리동백동지는 화룡현 3구의 서기로 있다가 간도대《토벌》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후 영영 세상을 등지고 살리라는 결심을 품고 솔가하여 화룡의 깊은 벽지에 들어갔다. 여기서 서당훈장을 하며 은둔생활을 해오던 리동백동지는 주체25(1936)년 봄 지방공작에 나왔다가 사령부로 돌아가는 소부대를 만나 그들의 뒤를 따라 조선인민혁명군 숙영지에 들어가게 되였으며 평생소원대로
이것은 리동백동지의 운명에서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온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리동백동지가 입대하는 날
리동백동지는 사자봉밀영 출판소에서 사업하면서 그 주변의 나무들에 《우리 민족은 약소민족이 아니다 이천만이 단결하면 왜놈과 이길수 있다》, 《우리는 이천만인민을 불러일으켜 우리 힘으로 나라를 독립해야 한다》와 같은 많은 혁명적구호문헌들을 직접 남기였다.
《3.1월간》창간을 준비하던 나날은 리동백동지의 혁명임무수행에 대한 높은 책임성과 무한한 헌신성,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이 남김없이 발휘된 나날이기도 하였다.
특히 리동백동지는 《3.1월간》이 조국광복회기관지로서 광범한 독자대중이 선호하는 대중정치리론잡지로서의 체모를 갖추고 대중연단으로 되도록 하는데 깊은 관심을 돌리였다.
어떻게 하면 《3.1월간》편집사업을 독자대중의 사업으로 전환시키겠는가, 어떻게 하면 각계각층의 독자들이 잡지를 위해 정상적으로 원고를 제공하게 하겠는가, 어떻게 하면 모든 독자들이 편집내용을 풍부히 하고 편집형식을 부단히 개선하는데 도움이 될수 있는 조언들을 보내게 하겠는가 하는것을 진지하게 론의하고 모색하던 끝에 리동백동지는 투고규정이라는것을 만들어냈다. 그 규정을 읽으면 글재간이 둔한 사람도 붓을 들고 그 무엇인가를 일사천리로 쓰고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여있었다. 규정의 앞머리에는 각계 애국지사의 리론과 의견을 수집하기 위하여 투고를 환영한다는 청탁문을 싣고 그 뒤로는 원고내용에 따르는 글자의 수와 투고방법, 열성투고자에 대한 우대적용 등의 조항들을 구체적으로 밝혀놓았다.
《3.1월간》창간호 발간준비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로 제기된것은 출판기자재의 구입이였다. 당시 부대에는 낡은 등사기 한대밖에 없었고 등사잉크도 로라도 등사원지도 종이도 다 부족한 상태였다. 리동백동지는 출판소의 일군들과 함께 부족한 그 모든것을 자체로 해결하였다. 등사잉크가 떨어지면 양철로 고깔을 해씌우고 봇나무껍질을 태우면서 고깔에 붙은 그을음을 긁어모았다. 그 그을음을 기름에 재웠다가 공장에서 만들어낸 등사잉크와 섞어 사용하였다. 로라가 못쓰게 될 때에는 아교에 송진을 섞어서 끓여가지고 형틀에 부어 만들어냈고 강필이 못쓰게 되면 돗바늘을 가지고 만들어 썼다.
하기에
《3.1월간》창간호가 세상에 태여난 주체25(1936)년 12월 1일 제책된 창간호 한부를 들고
종이를 무척 아껴쓴 리동백동지는 담배말지까지도 아껴쓰느라고 늘 대통에 담배를 담아 피운것으로 하여 《대통령감》이라는 별호까지 받았다. 나무잎사귀만 한 종이도 다 건사해두었다가 필요한 때에 글씨를 깨알같이 박아가며 아주 요긴하게 쓰군 하였다. 그는 글을 쓸수 있는 백지에 담배를 말아피우는 사람들을 보면 종이를 아낄줄 모른다고 호되게 비판하군 하였다.
리동백동지는 《3.1월간》발간에 자신의 온 정력을 다 쏟으면서도 영광스러운 항일무장투쟁의 적극적인 참가자이자 산 목격자로서 이 력사적행적을 후세에 전하는데서 자신의 삶의 가치를 찾고 매일 일기를 빠짐없이 썼으며 수많은 자료들도 수집하였다.
등사기를 비롯한 출판기자재외에도 수집한 많은 문건들과 사진들로 하여 그에게는 늘 짐이 많았다. 하여 비서처가 자리를 한번씩 옮길 때에는 운반대로 여러명의 전투원들을 그에게 배속시켜주지 않으면 안되였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짐을 운반해주려고 대원들을 데리고왔던 김주현동지가 그 숱한 짐짝들을 정리해서 절반쯤이라도 줄이라고 리동백동지에게 불평조로 권고했다.
《아니, 이 문서장들이 <민생단>문서보따리따위 같은줄로 아는가. 자네가 지휘관이기는 하지만 안목은 넓지 못한 사람이야. 저 짐짝들은 나같은 목숨 열백과도 바꿀수 없는 보물이야. 군사직급으로는 련대장이지만 이 짐짝앞에서는 졸병이나 같애. 국보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기나 해?》
격해서 다불리는 리동백동지앞에 김주현동지는 한마디의 변명도 할수 없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지휘관들은 그의 짐이 아무리 많아도 군소리 한마디 못하고 운반대를 고스란히 붙여주군 하였다.
조국이 해방되면 조선인민혁명군의 항일혁명투쟁사를 써야겠다고 하면서 단 하루도 번지지 않고 일기를 썼고 손에 넣을수 있는 자료는 부지런히 모아 배낭속에 정히 간수하던 《3.1월간》의 주필 리동백동지는 양목정자밀영에서 적 《토벌대》의 습격을 받고 희생되였다. 이때 그가 생명처럼 아끼고 귀중히 보관했던 수많은 문건들과 사진자료들, 일기책들, 해방된 조국에 드릴수 있는 가장 귀중한 선물이라고 여겨오던 그 귀중한 력사자료들이 불타서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말았다.
참으로 리동백동지와 같은 항일혁명투쟁시기 출판선전일군들의 고귀한 투쟁경험은 오늘 조선의 출판보도일군들에게 있어서 귀중한 전통으로, 조선혁명의 만년재부로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