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옥은 부서져도 그 빛을 잃지 않고 푸른 소나무는 눈속에 파묻혀도 그 푸름이 변하지 않으며 참대는 불에 타도 그 곧음을 굽히지 않습니다.》 (
우리 인민은 예로부터 나무나 풀, 꽃을 보고 평가할 때 그 식물의 외형적인 아름다움보다 내용적인것을 기본으로 하여 여러 등급으로 나누었는데 소나무를 그 첫자리에 놓았다고 한다. 그것은 소나무가 사시장철 변함없이 자기의 푸른빛을 잃지 않고 모진 추위와 눈바람도 꿋꿋이 이겨내기때문이며 영양분이 적은 바위틈과 절벽에 씨가 뿌려져 뿌리를 내리게 된다고 해도 강의한 의지로 죽지 않고 자라는 기질과 특성을 가지고있기때문이다.
모진 시련을 다 이겨내며 꿋꿋이 살아온 조선민족의 강의한 의지와 절개, 기상을 그대로 닮은것으로 하여 우리 인민은 오래전부터 소나무를 숭상해왔다.
절세의 위인들을 배출한 만경대가문은 소나무와 각별한 인연을 맺고있다.
만경대가문은 소나무와 같은 굳센 의지와 불굴의 신념을 지니고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길에 모든것을 다 바친 가장 애국적이며 혁명적인 가문이다.
예로부터 만경대일대에는 소나무가 많았고 특히 고향집앞에 있는 남산은 소나무숲으로 울창하였다.
만경대일가분들의 소나무에 대한 각별한 애착은 할아버님이신 김보현선생님께서 손수 지으신 《꿍니리》노래에서 여실히 표현되였다.
꿍니리 닐리리 니리나 니리닐리리
이산저산을 다니면서
솔씨 한줌을 주어다가
이산저산 뿌리니 송림이 우거진다
…
우거진 송림속에 사슴, 학 등이 찾아오니 조국강산이 금수강산으로 되였다는 이 노래에는 소나무를 무척 사랑하신 만경대일가분들의 정신과 마음이 그대로 어려있다.
불요불굴의 혁명투사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생전에 만경대의 남산에 있는 푸른 소나무를 남달리 사랑하시였다. 그것은 흰눈속에서도 자기의 푸름을 잃지 않고 봄을 만나 다시 소생할 때까지도 변함없이 푸르러 설레이는 소나무의 기상을 사랑하시고 그 기상과 기질로 한생을 사실것을 념원하시였기때문이였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어리신 아드님을 데리고 자주 만경봉에 올라가시여 소나무를 가리키시며 소나무는 사철 보아도 푸르다, 예로부터 조선사람들은 소나무를 사랑하였다, 우리는 저 소나무와 같이 억세게 싸워 일본놈들에게 빼앗긴 조국을 기어이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선생님께서는 푸른 소나무의 굳센 기상으로 일제교형리들의 악형도 이겨내시였고 가다가 쓰러지면 기여서라도 끝까지 혁명의 길을 걸어갈 결의를 굳히시였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옥중생활을 이겨내고 나오시여 만경대를 떠나 또다시 혁명의 길로 떠나실 때 만경대혁명일가의 숭고한 넋을 담아 신념의 노래 《남산의 푸른 소나무》를 지어 우리 인민에게 남기시였다.
남산의 저 푸른 소나무가
눈서리에 파묻혀서
천신만고 괴롬받다가
양춘을 다시 만나 소생할줄을
동무야 알겠느냐
만경대혁명일가분들은 설한풍속에서도 자기의 푸른 잎새를 간직하고 굳건히 서있는 소나무를 가문의 넋의 상징으로 여기시고 그처럼 모진 세월속에서도 송죽같은 애국의 마음을 간직하고 혁명의 길로 떠나시였다.
김형직선생님께서 뼈가 부서져 가루가 될지언정 나라의 독립을 위한 투쟁의 한길에서 굴함없이 싸우실 맹세를 남기시며 만경대를 떠나시였고
만경대가문의 기상을 그대로 이어받으신
주체47(1958)년 12월 고급중학교시절
주체74(1985)년
대를 이어 싸워서도 혁명의 한길에서 추호도 물러섬이 없이 혁명의 최후승리를 안아올 남산의 푸른 소나무와도 같은 불굴의 신념과 의지를 지니신
소나무와 더불어 만경대가문의 강의한 기상과 넋은
주체조선의 필승불패의 전통을 온 세상에 다시한번 뚜렷이 과시할 웅지를 안으시고 려명거리건설을 선포하신 몇해전 력사의 그날
정녕
참으로 장구한 인류력사의 갈피에는 많은 위인들의 일가에 대한 이야기가 수록되여있지만 만경대혁명일가처럼 푸른 소나무를 대대로 사랑하며 사철 푸른 소나무와도 같은 강의한 의지와 굳센 신념을 지니고 조국과 혁명을 위해 가정의 모든것을 다 바친 가장 애국적이며 혁명적인 일가를 인류는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