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나 지난날의 력사적인물들을 계급적립장에 서서 그들이 민족사발전에 어떤 기여를 하였는가 하는것을 기준으로 하여 정확히 평가하여야 합니다.》(
1909년 10월 26일 할빈역두에서 조선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이또 히로부미)을 격살하고 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웨쳐 조선사람의 기개를 과시한 안중근의 애국적장거는 오늘도 우리 인민들의 기억속에 남아있다.
안중근(安重根)은 1879년 9월 오늘의 황해남도 해주시 석천동에서 안태훈의 맏아들로 출생하였다. 그가 태여날 당시 잔등에 7개의 김이 있었다고 하여 안응칠(安應七)이라고 불리웠는데 후에 성급한 성격을 고치고 자중하라는 의미에서 안중근으로 고쳐졌다.
안중근일가는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봉건정부의 탄압을 피하여 해주를 떠나 황해남도 신천군 석교리로 옮겨갔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이 1884년 한성에 잠시 머물러있는 기간에 개화파와 관계를 맺고있은것이 그 주요한 원인으로 되였다.
안중근은 여기에서 6~7살때부터 20여년간 유년시절과 청소년시절을 보내였다. 안중근은 엄격한 가정교육속에서 학문을 익히고 백발백중의 사격술도 소유할수 있었으며 특히 20살때부터는 《태서신사》,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공립신문》 등 우리 나라의 력사와 근대적문물을 소개하는 많은 도서들과 신문들을 탐독하는 과정에 나라의 근대화의 절박성도 깨닫게 되였다.
1904년 2월 8일 로일전쟁의 발발과 1905년 11월 17일 일제에 의한 《을사5조약》의 강압날조행위는 안중근의 평온하던 생활에 큰 파문을 일으킨 계기로 되였다. 방대한 침략무력을 우리 나라에 끌고 들어와 왕궁을 2중, 3중으로 겹겹이 포위하고 정부대신들을 위협공갈하여 날강도적방법으로 《을사5조약》을 강압날조한 이또 히로부미의 행위는 《황성신문》에 실린 론설을 통해 전 조선민족에게 알려져 반일의지를 더욱 고조시켰다.
안중근은 해외에로 나가 독립운동을 벌릴것을 계획하고 1905년에 상해로 가서 형편을 료해하였다. 또한 평양에서 안창호를 만나 독립방책을 토의하는 과정에 교육과 산업진흥, 군사활동으로 일제에게 빼앗긴 나라를 찾을 결심을 굳혔다.
그후 같은 해 12월에 다시 진남포(오늘의 남포시)로 돌아갔다. 그 다음해인 1906년 3월 온 가족을 거느리고 남포로 이사간 안중근은 가산을 털어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웠다.
당시 우리 나라에서는 국권상실의 수치스러운 본원이 나라의 후진성에 있다는것을 눈물겹게 통감한 선각자들이 교육을 자강의 기초, 근본으로 여기고 전국도처에서 사립학교설립운동을 힘있게 벌리고있었다. 온 나라를 휩쓴 교육운동은 우국으로 온몸을 불태우던 안중근의 독립의지를 더욱 고조시켰고 그로 하여금 독립운동에서 핵심으로 될 인재들을 양성하는 교육사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하지만 교육운동 역시 일제의 탄압책동으로 말미암아 좌절되고말았으며 이를 계기로 안중근은 자기의 투쟁무대를 연해주로 옮기지 않으면 안되였다.
안중근은 로씨야의 연해주로 가서 이름을 《안응칠》로 고치고 우덕순, 조도선, 강성벽 등과 함께 《단지동맹》이라는 비밀결사를 무었다.
그후 리범윤이 지휘하는 의병대의 참모중장이 된 안중근은 우리 나라의 북부국경일대인 함경북도 경흥, 회령 등지를 공격하여 수많은 일본침략자들을 족쳤다. 1909년 6월에는 800여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함경북도의 국경연선에 진출하여 13일간 무려 30여차의 대소전투를 벌려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안기고 홍범도의병대를 지원해주었다.
안중근은 군사활동뿐만아니라 애국문화운동도 활발히 벌렸으며 특히 연해주에 살고있는 조선인들속에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활동도 벌렸다.
하지만 안중근이 벌린 교육사업도, 애국문화운동도 그리고 군사활동 역시 일제의 가혹한 탄압책동으로 말미암아 아무런 결실도 보지 못하였다.
국권회복을 위한 최선의 방책을 조선침략의 원흉 이또 히로부미에 대한 처단에서 찾은 안중근은 우덕순 등과 함께 결사대를 뭇고 이또처단계획을 무르익혔다.
1909년 이또 히로부미는 조선통감의 자리를 내놓고 일본추밀원 의장으로 전임된 이후 10월하순에 로씨야의 재정대신 꼬꼬흐체브를 만나기 위해 할빈으로 갈것을 계획하고있었는데 이 소식이 할빈에서 간행되는 신문인 10월 23일부 《원동보》 1면 상단에 《도꾜특집》이라는 제목으로 두사람의 사진과 경력까지 받쳐 실렸다.
안중근은 이 절호의 기회를 타서 할빈역두에서 이또 히로부미를 쏴죽일 대담한 계획을 세우고 출발에 앞서 동료들앞에서 시 《만세가》를 읊어 자기의 비장한 결심을 보여주었다. 1909년 10월 19일 출발한 안중근일행은 10월 21일 울라지보스또크를 거쳐 그 다음날에 이또가 꼬꼬흐체브와 회담하기로 되여있는 할빈에 도착하였다.
드디여 10월 26일 아침 9시 30분 할빈역두를 꽉 메운 환영군중속에 끼여있던 안중근이 렬차에서 내려 로씨야의장병대렬을 사열하고 역구내로 나서려고 몸을 돌리던 이또 히로부미에게 복수의 명중탄을 날렸다. 련이어 이또곁에 있던 비서관 모리, 할빈주재 총령사 가와가미, 만철리사 다나까 등 세놈의 원쑤에게 증오의 총탄을 날린 안중근은 이또의 시체를 디디고 올라서서 《조선만세!》를 세번이나 소리높이 웨쳤다.(《한국통사》 56장)
안중근의 애국적장거소식을 전해듣은 우리 나라의 애국적시인인 김택영은 너무도 감격하여 안중근을 찬양하는 즉흥시를 지었다.
평안도장사 두 눈을 부릅뜨고
염소새끼 죽이듯이 나라원쑤 죽였다네
안죽고 살아있다가 이 좋은 소식 들을줄이야
어허 춤노래 한바탕 국화조차 우쭐대네
해삼위라 큰 매 하나 하늘 쓸고 돌더니만
할빈역 머리에 벼락이 떨어졌네
6대주 영웅호걸 몇분이나 되시는지
모두들 가을바람에 수저가락 떨구었으리
한편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도 《로령신문》을 비롯한 신문들에서 《이 사건은 일본과 기타 여러 나라들이 다른 나라를 압박할 때 주의해야 할 교훈이다. 압박은 결국 스스로를 망치는것이다.》라는 기사내용을 실어 안중근의 의거에 대하여 극구 찬양하였다.일제는 안중근을 려순감옥에 끌고가 악착한 고문을 들이대면서 어떻게 하나 그의 애국의지를 꺽어보려고 갖은 발악을 다하였다. 일제가 려순의 지방법원에서 벌려놓은 6차례의 공판놀음에서 안중근은 《우리 나라의 자주권과 독립을 빼앗은것은 이또의 작간이고 나는 의병대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특파되여 독립전쟁의 전투에서 이또를 죽였》다고 하면서 자기의 무죄를 선언하였다.
안중근은 일제가 1910년 2월 14일 끝끝내 자기에게 사형을 언도하자 오히려 이보다 더 극심한 형은 없는가고 하면서 놈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사형장에 나가기에 앞서 안중근은 자기를 찾아와 눈물짓는 두 동생에게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모든것을 바쳤는데 슬퍼한단말인가.》라고 타이르면서 조선이 독립하기 전에는 절대로 자기의 시체를 반장(返葬-객지에서 죽은 사람의 시체를 고향이나 자기가 살던 곳으로 옮겨다가 장사를 지내는것)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다.
1910년 3월 26일 아침 10시 안중근은 31살의 젊은 나이에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높이 웨치면서 형장으로 나갔다.
대장부는 죽음앞에서도
그 마음 무쇠처럼 굳세여라
의사는 역경속에서도
그 한뜻 구름처럼 깨끗하여라
자기의 독립의지를 담은 마지막시를 남기고 웃으면서 형장으로 나간 반일애국렬사 안중근,
자기 한몸바쳐 조선침략의 원흉 이또 히로부미를 처단하면 빼앗긴 나라를 되찾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졌건만 그의 애국적장거는 옳바른 령도를 받지 못한것으로 하여 아무런 결실도 보지 못하였다.
우리 인민들의 기억속에 오늘도 생생히 남아있는 안중근에 의한 이등박문격살사건은 옳바른 령도를 받을 때에만이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과 존엄도 고수될수 있다는것을 똑똑히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