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박사 리영식
2016.5.22.
한없이 숭고한 조국애와 민족애를 지니시고 우리 인민을 반만년의 오랜 력사와 찬란한 문화전통을 자랑하는 긍지높고 존엄높은 인민으로 내세워주신 어버이수령님의 불멸의 업적은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의 마음속에 더욱더 뜨겁게 어려온다.
우리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자들에게 주체의 력사관을 심어주시고 천리혜안의 예지로 동방의 천년강국 고구려의 력사와 문화를 정립하도록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주신 위대한 스승의 손길에 의해 고구려시조 동명성왕의 릉도 자기의 모습을 찾게 되였고 민족의 대국보로 훌륭히 꾸려질수 있었다.
웅장하게 개건된 동명왕릉과 정릉사, 왕릉앞의 돌조각상들, 제당에 그려진 동명성왕의 화상을 비롯하여 고구려의 강대성과 당시의 생활풍습을 보여주는 수십점의 미술작품들 그 어느것에나 다 우리 민족사의 공백을 찾아 재정립해주시고 동명왕릉을 민족의 재보로 웅건하게 일떠세워주신 어버이수령님의 불면불휴의 로고와 위대한 헌신의 자욱이 어리여있다.
화창한 4월의 봄날 뜻깊은 태양절을 맞이하는 이 아침 민족의 대성인이시고 력사학자들의 위대한 스승이신 우리 수령님께서 동명왕릉에 남기신 불멸의 자욱을 다시한번 가슴뜨겁게 안아본다.
몸소 고구려시조왕릉을 찾아주시여
동명왕릉은 락랑준평원지대의 동쪽변두리, 재령산과 마장산에 에워쌓인 산수수려한 력포구역 룡산리에 위치하고있다.
옛날부터 우리 선조들은 아름다운 금잔디로 단장한 소나무숲속의 이 무덤을 고구려의 시조왕인 동명왕의 무덤이라고 하면서 《왕묘》로 불렀고 이 부근을 《왕릉동》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15세기 편찬된 《고려사》와 《동국여지승람》에도 중화땅(당시의 지명) 룡산에 동명왕묘가 있다고 기록되여있다.
여러 문헌기록들에 동명왕의 무덤위치가 서술되여있었으나 일제식민지통치시기와 그 이후 1970년대초까지만 하여도 동명왕릉의 위치와 성격문제는 옳은 과학적해명을 보지 못하고있었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하고 우리 민족의 자랑인 고구려의 천년강국사와 애국전통을 말살할 목적으로 동명왕릉을 도굴파괴하였으며 동명왕은 《삼국사기》의 동명왕전설에서나 나오는 신화적인 인물이고 왕릉도 실지 무덤이 아니라고 력사를 외곡하면서 룡산땅의 동명왕릉을 《동명왕릉으로 전해지는 무덤》이라는 의미에서 《전동명왕릉》이라고 하였다.
사대주의와 민족허무주의에 물젖은 일부 사람들도 고구려시조 동명왕은 첫수도 졸본(오늘의 료녕성 환인지방)에서 활동하다가 죽은 왕이므로 평양부근에 동명왕릉이 있을수 없다고 하면서 동명왕릉 그 자체를 부인하였다.
그리하여 룡산땅의 동명왕릉은 오래동안 고구려시조왕의 무덤으로 인정되지 못하고 력사학계의 관심속에서조차 점점 밀려나 세월의 망각속에 사라져가고 있었다.
과연 일찌기 아시아대륙에서 광활한 령토와 찬란한 문화로 국력을 떨쳐온 고구려력사의 첫 페지가 《믿을수 없는》 동명왕의 전설로만 남아있어야 하는가?
외래침략자들과 대국주의어용사가들, 민족허무주의자들에 의하여 무시당하고 외곡되여 온 우리 나라 력사를 바로잡는가, 아니면 한시기의 력사를 잃는가 하는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미궁의 심연속에 깊숙히 잠겼던 력사적사실을 천리혜안의 예지로 밝혀내신 분이 다름아닌 애국애족의 화신이시고 우리 력사학자들의 위대한 스승이신 어버이수령님이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동명왕릉은 고구려시조왕의 무덤으로서 우리 나라 력사와 문화전통을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력사유적입니다.》 (《김일성전집》 제88권 79페지)
주체59(1970)년 12월 어느날 황해북도에 대한 현지지도를 마치시고 평양으로 돌아오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 룡산리의 소나무숲속에 고적하게 있는 동명왕릉을 찾으시였다.
력사를 전문으로 하는 학자들도 론난을 거듭하다 지쳐서 이제는 관심밖에 두고있던 유적이여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고 그곳으로 가는 길도 험했다. 해묵은 잡초가 왕릉과 그 주변을 뒤덮었고 왕릉의 계단석과 비석들도 여기저기에 널려져있는 모습을 보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안색은 근엄하시였다. 고구려건국초기의 력사를 더듬으시는듯 왕릉을 돌아보시며 오래동안 생각에 잠기시였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이 왕릉을 잘 관리해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후 몸소 수많은 력사책들을 밤이 지새도록 보시고 학자들과 담화도 하시며 지어는 현지를 다시 돌아보시기도 하시면서 동명왕릉문제해명에 깊은 사색과 탐구의 나날을 바치시였다.
천재적인 예지와 비범한 통찰력으로 복잡하게 뒤엉킨 력사적사실의 실머리를 하나하나 풀어헤치시며 사색에 사색을 거듭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63(1974)년 1월 하순 어느 한 일군에게 동명왕릉과 관련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최근 고구려시기의 력사를 연구해본데 의하면 고구려에서 수도를 옮기면서 왕의 사당은 두고 올수 있지만 시조왕의 무덤은 두고 올수 없다고 하시면서 고구려가 도읍을 평양으로 옮길 때 동명왕의 무덤도 평양으로 옮겨 현재위치에 만들어놓은것으로 보는것이 정확할것 같다고 말씀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동명왕릉과 관련한 문제를 단순히 과학적문제로서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미풍량속과도 결부시켜 보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언제인가 기록영화에서 귀국하는 재일동포들이 부모의 유골함을 안고 배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시고 조선사람들은 저렇게 이역만리에서도 자기 조상의 유골을 가지고 오지 않는가, 하물며 강대했던 고구려사람들이 자기 건국시조의 묘를 버리고 올수 있겠는가고 확신에 넘쳐 말씀하시였다.
참으로 이것은 그 누구도 따를수 없는 비범한 통찰력이였으며 력사연구에서 튼튼히 틀어쥐고 나가야 할 새로운 방법론이였다.
력사학자들에게 동명왕릉문제해결의 열쇠를 안겨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김일성종합대학에 동명왕릉을 과학적으로 고증할수 있는 자료들을 발굴하며 잘 연구할데 대한 크나큰 믿음과 과업을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은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의 교직원, 학생들은 커다란 감격과 흥분을 안고 고구려시조왕릉-동명왕릉에 대한 발굴사업을 시작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여러차례 동명왕릉발굴정형을 알아보시고 발굴사업을 과학적으로,효과적으로 진행할수 있는 방도들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그러시고도 력사학자들과 발굴자들의 수고를 헤아리시여 동명왕릉의 공중촬영을 위한 직승기까지 띄워주시였고 왕릉주변의 발굴과 정리사업을 할수 있게 현대적인 기계수단을 보내주시는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왕릉에 대한 조사발굴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무덤칸안에서는 오래동안 숨겨져있던 고구려의 련꽃무늬벽화가 발견되였고 왕릉과 그 주변의 흙을 채로 세밀하게 치고 조사하는 과정에 고구려시기에 금, 은, 동으로 만든 100여개의 왕관잔편들과 구슬 등 진귀한 유물들, 글자가 새겨진 기와쪼각들, 3만m2에 달하는 방대한 규모의 절간터가 새로 조사발굴되였다.
주체65(1976)년 11월말 창립30돐을 맞는 김일성종합대학을 몸소 찾아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교육과학전시관에 전시된 동명왕릉 유물들앞에서 걸음을 멈추시고 력포구역 무진리(지금의 룡산리)에 있는 왕릉이 고구려시조 동명성왕의 릉이라는것을 고증할수 있는 벽화와 증거물이 나온데 대하여 커다란 만족을 표시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옛날 고구려는 우리 나라 력사에서 제일 강대한 나라였다고, 그때 고구려사람들은 건국시조인 동명왕을 신격화하였다고 하시면서 그런것만큼 당시 고구려사람들이 도읍을 평양으로 옮길 때 건국시조의 묘를 줴버리고 나올수 없었을것이라는 선견지명의 가르치심을 주시여 이 무덤의 주인공문제를 다시금 명철하게 밝혀주시였다.
정녕 가장 숭고한 애국애족의 리념을 지니신 위대한 수령님의 불면불휴의 로고가 있어 력사의 짙은 안개속에 파묻혀 풀수 없는 과제로 남아있던 동명왕릉의 주인공문제가 과학적으로 명백히 밝혀지게 되였고 고구려의 건국과정과 그 발전면모가 정확히 해명될수 있었다.
민족의 대국보로 꾸려주시여
나라와 민족마다 자기의 력사와 고유한 문화전통이 있으며 그것을 고수하고 계승발전시키는데서 해당 나라와 민족의 건국시조가 중요하게 제기된다.
동명왕릉을 잘 꾸리는 문제를 력사에서 주체를 확고히 세우고 우리나라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며 우리 인민들에게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안겨주기 위한 중요한 사업으로 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고구려시조왕의 릉을 민족의 대국보로 훌륭히 개건하도록 현명하게 이끌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명왕릉을 력사주의원칙을 철저히 지켜 모든것이 고구려식으로 되여야 하며 천년강국 고구려의 시조왕릉답게 웅장하면서도 숭엄한 맛이 나게 꾸려야 한다고 그 개건에서 나서는 원칙적인 문제들을 밝혀주시였다.
주체78(1989)년 4월 일요일의 휴식마저 뒤로 미루시고 동명왕릉에 나오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정문과 비각, 제당과 표식비, 돌등 그리고 돌말과 돌범을 비롯한 여러 구조물들은 어떻게 꾸리며 정릉사와 왕릉주변의 무덤들은 어떻게 복구하겠는가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그리고 왕릉주변에 원림조성을 잘하여 동명왕릉으로 들어서면서 멀리에서부터 숭엄한 맛이 나도록 할데 대한 가르치심도 주시였다.
고구려시조왕릉-동명왕릉을 민족의 국보유적으로 훌륭히 꾸려 후손들에게 물려주시려는 어버이수령님의 로고는 끝이 없었다.
주체80(1991)년 5월 1일 명절날에도 그리고 주체81(1992)년의 한해가 다 저물어가는 어느날 진눈까비가 내리는 건설장에까지 몸소 찾아오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동명왕릉개건공사에서 제기되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세심히 가르쳐주시였다.
몸소 붓을 드시여 활달한 필치로 《동명왕릉개건기념비》라는 친필을 써주신 어버이수령님의 은혜로운 사랑의 손길아래 동명왕릉은 조선민족제일주의교양의 거점으로 훌륭히 꾸려지게 되였고 주체82(1993)년 5월 14일 우리 민족의 또 하나의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국보유적으로 훌륭히 개건되게 되였다.
동서고금 그 어느 력사를 돌이켜보아도 우리 수령님처럼 하나의 력사유적을 두고 100여차의 강령적인 가르치심을 주시고 그 개건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세심히 이끌어주시며 로고와 심혈을 다 바쳐오신 민족의 대성인, 거룩한 스승, 위대한 령도자는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동명왕릉을 동방의 천년강국 고구려의 시조왕릉답게 잘 꾸려주시려는 어버이수령님의 높으신 뜻을 받드시여 왕릉개건공사를 정력적으로 령도하시며 공사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원만히 풀어주시였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위대한 수령님들의 숭고한 뜻을 그대로 이어 우리 나라를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진 세계적인 선진문명국, 륭성번영하는 강국으로 빛내여주시기 위하여 크나큰 심혈을 기울이고계신다.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들과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숭고한 애국, 애족,애민의 뜻을 심장깊이 새기고 민족의 력사와 문화를 빛내이기 위한 사업에 모든 지혜와 정열을 다 바쳐나갈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