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종합대학 외국어문학부 부교수 송무강
2021.9.8.
혁명렬사릉의 주작봉마루에 오르면 휘날리는 붉은기를 배경으로 서있는 수백명의 항일혁명렬사들의 반신상이 숭엄한 모습으로 후대들을 맞이해준다.
《김봉석동지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
1923년 1월 3일생
1936년 3월 조선인민혁명군 입대
1945년 8월 14일 전사》
혁명렬사릉을 찾는 사람들은 누구라없이 그앞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혁명렬사릉에는 내가 제일 사랑하는 전령병이였던 김봉석동무의 반신상도 세웠습니다. 김봉석동무는 우리 나라가 해방되기 하루전인 1945년 8월 14일에 전사하였습니다.》 (《김일성전집》 제93권 190페지)
김봉석동지의 원래의 이름은 손봉석이였다. 그는 처창즈유격근거지가 해산된 후 14명의 아동단원들을 인솔하고 위대한 수령님을 찾아 내도산으로 왔던 아동단단장 손명직의 5촌숙부였다.
주체25(1936)년 3월 김봉석동지는 13살의 어린 나이에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손에 총을 잡고 원쑤격멸의 길에 나섰다. 그 나날 그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시여 조선혁명의 승리가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간직하게 되였으며 사령관동지께 충성다할 맹세로 자나깨나 심장을 불태웠다.
김봉석동지는 그후 영광스럽게도 사령부전령병의 중임을 맡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극진한 사랑과 은정속에서 그는 혁명가로 성장하였다.
김봉석동지는 위대한 수령님의 안녕을 목숨바쳐 지키였다. 그는 고난의 행군시기의 전투들과 그후에 있은 무산지구전투, 화룡현 올기강전투, 안도현 홍기하전투 등 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위대한 수령님을 목숨으로 옹호보위하여 용감히 싸웠다.
주체28(1939)년 6월초 위대한 수령님의 지휘밑에 올기강전투가 진행될 때였다. 김봉석동지는 언제나와 같이 사령부지휘처를 철저히 위장하고 사령관동지의 명령을 기다렸다.
이윽고 전투가 시작되여 총탄이 비발치고 수류탄이 작렬하였다. 사령관동지께서 주신 명령을 전달하고 돌아오던 김봉석동지는 패잔병놈들이 갈팡질팡하며 갈대숲이 무성한 곳으로 도망치다가 방향을 잃고 사령관동지께서 계시는 지휘부쪽으로 달아나는것을 발견하게 되였다.
위기일발의 순간 그는 한몸을 내대며 《네놈들은 포위되였다. 투항하면 살려준다!》라고 추상같이 웨치고나서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다. 적들은 혼비백산하여 와들와들 떨며 두손을 번쩍 들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혁명의 사령부를 보위해야 한다는 굳센 신념이 김봉석동지로 하여금 서슴없이 그렇게 행동하게 하였던것이다.
김봉석동지는 위대한 수령님의 건강을 지켜드리기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어려운 행군이나 가렬한 전투가 끝난 후에도 새로운 작전을 준비하시며 밤을 새우실 때마다 그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면서 몇번이고 주무실것을 말씀드리군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어쩌다 잠에 드셨을 때에는 휴식을 보장해드리기 위해 대원들을 찾아다니며 사령관동지께서 주무시니 조용하라고 이르기까지 하였다.
김봉석동지는 어려운 식량난속에서도 위대한 수령님께만은 식사를 보장해드리기 위해 모든것을 다하였다. 그의 배낭만은 빈적이 없었으며 거기에는 언제나 비상미가 들어있었다. 그는 자기의 한몸조차 지탱하기 어려운 행군길에서도 등에 진 배낭의 무게가 무거우면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고 반대로 배낭이 홀가분해지면 무거운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였다.
사령관동지께서 앓으실 때면 병치료를 해드리였고 명절이 되면 과자도 구해오군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김봉석동지가 조선혁명의 운명이신 위대한 수령님의 건강을 보장해드리기 위해 얼마나 마음을 썼는가 하는것을 잘 보여주고있다.
김봉석동지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신 임무를 결사관철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봉석동지의 충실성을 믿으시고 그에게 많은 임무를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박인진도정이 1936년 12월 천도교중앙대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갈 때 그가 하려는 담판도 도와주고 신변도 보호하기 위하여 리창선동지와 함께 자신의 전령병 김봉석동지까지 붙여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26(1937)년 9월 전체 조선동포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하시여 생산유격대와 로동자돌격대를 중심으로 전민항쟁준비를 확대해나갈데 대한 전략적방침을 제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많은 정치공작원들을 국내에 파견하시는 한편 몸소 국내에 들어갈것을 결심하시고 로동계급의 대부대가 집중되여있는 함경남도 신흥지구와 풍산(당시)지구로 로정을 잡으시였다. 수행성원은 불과 10여명이였는데 그중에는 김봉석동지도 있었다. 이때에도 그는 사령관동지께서 주신 등사한 9월호소문을 배낭에 지고 직선거리로만도 근 800여리에 달하는 행군을 하였다.
소부대활동시기 김봉석동지는 어려운 정찰임무를 원만히 수행함으로써 조국해방작전에 기여하였다.
주체34(1945)년 8월 14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백룡동지에게 명령을 전달할데 대한 임무를 전령병 김봉석동지에게 주시였다.
언제나 그러했던것처럼 김봉석동지는 사령관동지의 명령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기쁜 마음으로 돌아오던 그는 그날 저녁 뜻하지 않게 일제놈들의 추격을 받게 되였다. 놈들과 용감히 싸우며 두만강을 건느던 그는 그만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강복판에서 총에 맞다보니 그의 시신도 찾지 못하였다.
항일혁명투사 김봉석동지는 이렇게 우리곁을 떠나갔다.
위대한 수령님을 보위하고 그이의 명령을 결사관철하는 길에 혁명전사의 영광이 있다는 투철한 신념을 지니고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그 길에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친 김봉석동지.
그토록 념원하던 조국의 해방을 몇시간 앞두고 김봉석동지가 전사하였을 때 위대한 수령님의 가슴은 참으로 아프고 쓰리시였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사이에도 우정이 계속될수 있는가? 계속된다면 어떤 형태로 계속되는가?》
위대한 수령님께서 회고하신 이 질문은 김봉석동지가 딱친구였던 전령병 김정덕동지가 계관라자전투에서 전사한 직후 그이께 문의했던것이였다.
그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사이에서도 우정이 계속될수 있다는것과 그런 경우의 우정은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잊지 않고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의 추억속에 비껴드는 형태로 지속된다고 대답해주시였다.
그러자 김봉석동지는 《사령관동지,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해 할수 있는 일은 무엇일가요?》하고 또 물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해 할수 있는 일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것은 고인이 생전에 남기고간 유지를 잘 지키는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해주시였다.
김봉석동지는 위대한 수령님의 대답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였다. 한것은 김정덕동지가 그에게 남긴 유지가 나라의 해방을 이룩할 때까지 사령관동지를 잘 모셔달라는것이기때문이다. 김봉석동지는 그 유지를 지켜 조국이 해방되는 날까지 사령관동지를 결사옹위하였던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봉석동지가 전사한 때로부터 수십년세월 그를 잊지 못해하시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 대원들중에는 조국해방을 하루 앞두고 희생된 사람도 있는데 그가 바로 김봉석이라고, 그는 자신께서 제일 사랑하던 전령병이였다고 혁명전사의 생을 값높이 내세워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선로동당창건 30돐을 맞으며 대성산에 혁명렬사릉을 건설할 때에는 조국해방을 위한 성전에 한목숨바친 투사의 공적을 잊지 않으시고 김봉석동지의 반신상도 세우도록 크나큰 사랑과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항일혁명투사 김봉석동지는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의 기억속에 영생하며 오늘도 사령부전령병으로, 혁명의 1세로 값높은 삶을 빛내이고있다. 주작봉마루에서 스물두살의 청춘으로 영생하고있는 김봉석동지는 혁명가의 생명은 수령을 결사옹위하기 위하여 필요한것이며 그길에서는 살아도 영광, 죽어도 영광이라는 진리를 우리모두의 가슴에 새겨주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