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위대한 수령님의 첫 외교담판

 2024.4.12.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사상과 정견이 다른 사람들도 누구든지 우리 수령님을 한번 만나뵈오면 그 고결한 인품에 매혹되여 수령님을 끝없이 흠모하고 존경하였다.》

20세기는 진보와 반동, 사회주의와 제국주의사이의 격렬한 투쟁의 세기였다. 이 혁명적변혁의 시기에 인민대중의 운명개척과 세계정치사에 자취를 남긴 이름있는 정치가와 위인들은 많았지만 위대한 수령님처럼 10대의 어리신 나이로부터 80고령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탁월한 사상과 령도, 고매한 덕망으로 20세기를 반제자주위업, 사회주의위업의 승리의 세기로 이끄신 걸출한 수령, 절세의 애국자, 위대한 혁명가는 없었다.

자주의 기치밑에 조선혁명을 백승의 한길로 이끄시여 현대력사를 새롭게 개척하시고 빛내이신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령도사에는 자주외교의 거룩한 자욱도 뚜렷히 새겨져있다.

국가의 출현과 함께 시작된 인류외교사에는 한 나라, 한 민족의 운명과 발전에 지울수 없는 흔적을 남긴 사변들과 일화들이 수없이 기록되여있다.

그러나 언제나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조선혁명과 조선인민의 요구와 리익에 맞게 모든 문제를 분석하고 처리하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대외활동력사는 그 시작부터 자주로 일관된것으로 하여 현대외교사에서 특출한 자리를 차지하고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처음으로 진행하신 대외활동은 항일무장투쟁시기 중국인반일부대와의 련합전선을 이룩하기 위하여 당시 구국군 전방사령이였던 오의성과 벌리신 담판이였다.

흔히 외교라고 하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람들과 공식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교제하는것을 말하며 국가들간에는 나라의 대외정책을 실현하기 위하여 다른 나라들과 관계를 맺거나 그를 위한 활동을 가리킨다.

주체22(1933)년 6월 25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신상의 위험도 무릅쓰시고 오의성과의 담판장에 나서시였다.

오의성과의 담판은 좌경기회주의자들의 망동과 일제의 교활한 민족리간책동으로 하여 조선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적대시하려는 중국인반일부대사령을 설복시켜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반일인민유격대와 중국인반일부대와의 련합전선을 이룩하기 위한것이였다.

손님이 와도 일어나지도 않고 호랑이가죽의자에 비스듬이 누워서 담화도 하고 차도 마시는 거만한 사령으로 소문났던 오의성은 위대한 수령님만은 격식을 차려 깍듯이 맞이하였으며 공산당과는 합작을 안한다며 고집을 쓰던 원래의 립장에서 벗어나 조선공산주의자들과의 합작에 동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오사령과의 합작이 그처럼 순조롭게 이루어질수 있은것은 우리의 힘이 강했고 정치도덕적풍모가 구국군보다 우월했기때문이며 우리의 열렬한 애국심과 국제주의적우애심, 자기 위업의 정당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그를 공감시켰기때문이라고 쓰시였다.

오의성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끄시는 반일인민유격대가 창건된 첫 시기인 주체21(1932)년에 남북만원정을 성과적으로 마치고 주체22(1933)년에 들어와 왕청을 중심으로 하여 현대적무장을 갖춘 일본침략군과 벌린 여러 전투들에서 높은 정신도덕적풍모와 군사적실력을 발휘한데 대하여 잘 알고있었다. 그래서 그는 위대한 수령님과 첫 인사를 나눈 후 자기는 김대장이 일본놈들과 잘 싸운다는 소문을 들어서 다 알고있다고 하면서 항일유격대는 수가 적으면서도 일본놈들과 잘 싸우는데 자기네는 머리수는 많지만 항일유격대처럼 잘 싸우지 못한다고 자기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회담을 통하여 자기의 힘이 강해야 사상과 정견이 다른 대방과 손을 잡기 위한 외교에서도 성공할수 있으며 주체적힘을 키우지 않고서는 어떤 우군이나 우방과도 련합하여 투쟁할수 없다는것을 진리로 굳히시였으며 그리하여 혁명투쟁의 전기간 주체적력량을 강화하는데 선차적힘을 넣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의성과의 담판에서 림기응변하면서도 신축성있는 외교술을 그대로 보여주시였다.

인생의 쓴맛단맛을 다 본 외교의 능수이고 능구렝이였던 오의성은 회담결과가 거의 무르익어갈 무렵 문득 위대한 수령님께 쟈쟐리에 들지 않겠는가고 느닷없이 질문을 던지였다.

쟈쟐리란 한집안이라는 뜻인데 중국사람들의 《청홍방》이라는 조직이였다. 운하를 파고 배를 끌던 로동자들이 생활상고통을 참을수 없어 황제를 반대하여 내온 조직이였다. 이 조직에서는 네것내것이 따로 없었다. 그 당시로서는 대단한 조직이였다.

결의형제를 무으면 형님, 동생사이가 되지만 쟈쟐리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아버지와 아들사이가 되게 된다.

다시말하여 쟈잘리에는 아버지될 사람이 아들을 얻기 위해 들어가는것이 아니라 아들될 사람이 아버지를 얻기 위해 들어가는 조직이였다.

그때의 상황에 대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싫다고 거절하면 모처럼 잘되여가던 담판이 파탄될것 같고 들겠다고 동의해나서면 당장 부처님앞에 끌고가서 절을 시킬 판인데 그것은 오의성한테 코를 꿰여다닐 길을 스스로 닦는것이나 다름없었다고, 우리는 담판준비를 할 때 이런 정황까지는 미처 예견하지 못하였고 하시면서 오사령하고 같이 쟈쟐리에 드는것은 뜻이 깊은 일이긴 하다고, 그런데 우리가 다른 조직에 드는것은 당조직의 허락을 받아야지 그렇지 않고서는 마음대로 하지 못하기때문에 조직에서 승인할 때까지는 그만두자고 하였다고 회고하시였다.

신축성있는 위대한 수령님의 이 말씀에 오사령은 아쉬워하였다.

이렇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사령과의 담판을 하시는 전기간 원칙적문제들에 대하여서는 한치도 양보하지 않으시면서도 림기응변으로 그의 걱정거리들을 다 풀어주시였고 담판의 최종목적인 조선공산주의자들과 중국인반일부대와의 련합전선을 이룩하시였다.

참으로 오의성과의 담판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선혁명의 대표자로서 진행하신 첫 외교담판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