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우리 민족의 애국심이 비낀 대흥산성

 2019.11.11.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자기 민족의 슬기로운 력사와 찬란한 문화가 깃든 력사유적들을 원상대로 복구해놓아야 합니다. 이것은 다 조상들이 물려준 귀중한 민족유산이며 후대들의 교양에서 중요한것입니다.》 (김정일전집》 제9권 354페지)

대흥산성은 개성시 박연리에 있는 고려시기의 산성이다.

개성시 북쪽에는 우리 나라의 이름있는 명승지 박연폭포를 옆에 끼고 대흥산성이 그의 오랜 력사를 자랑하듯 높이 솟아있다. 성터에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대흥산성의 성벽과 북문 그리고 관음사를 비롯한 여러 유적들은 우리 선조들의 슬기와 창조적재능을 잘 보여주고있다.

대흥산성은 동북으로부터 서남으로 뻗어내려온 아호비령산줄기의 남쪽연장선상에서 해발 762m에 달하는 천마산과 성거산을 리용하고 그와 련결된 성거봉, 청량봉, 인달봉, 치마바위 등 험준한 큰 산봉우리들을 련결하여 쌓았다. 그래서 대흥산성을 천마산성, 성거산성이라고도 부른다.

높은 산릉선에 의하여 타원형에 가까운 모양으로 련결된 성안에는 대흥골과 동문골, 소서문골 등 세개의 깊은 골짜기가 있다. 산성의 깊은 골짜기에서는 많은 물이 흘러내리는데 이 물줄기는 대흥사와 관음사부근에서 합치여 북문옆에 모였다가 벼랑으로 떨어져 요란한 폭포를 이룬다.

대흥산성의 산봉우리들은 비교적 해발고가 높으며 산릉선들은 밖으로 경사가 급하고 가파로와 성밖에서는 오르내리기가 매우 힘들게 되여있다.

개성의 력사를 전하는 《중경지》에서는 대흥산성의 험준함에 대하여 《성거산의 오지는 대흥산이 되는데 사방 산세가 깎아지른듯 높아 마치도 창과 칼을 벌려 세운것 같다.

가운데로 한 시내가 통하는데 폭포를 이루었다. 밖에는 높은 봉우리들이 중중첩첩하여 날아가는 새도 넘어갈수 없으니 천연의 요새이다.》라고 쓰고있다.

대흥산성과 같이 사면이 험한 산릉선으로 둘러막히고 그 안에 비교적 넓고 우묵한 골짜기들을 가진 지세는 산성을 쌓는데서 제일 적당한 곳이였기때문에 고구려시기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주로 그러한 곳을 리용하여 산성을 쌓았으며 이러한 지형을 《고로봉》식 또는 《포곡》(골짜기를 안음)식지형이라고 불렀다.

성은 동서의 길이가 약 2 500m이고 남북의 길이는 약 3 000m이며 성안의 전체 넓이는 대략 580만m2이다.

성벽의 길이는 약 10km이며 그중 돌로 쌓은 성벽의 길이는 7 800m, 산절벽을 그대로 리용한것이 2 300m로서 우리 나라 산성들가운데서 가장 큰 규모에 속한다.

성벽의 높이는 평균 3~5m이고 평평한데와 골짜기를 넘어서는데는 6~8m이다. 그리고 성벽은 밑부분의 너비가 5~6m, 웃부분너비가 3~4m이다.

성벽은 이곳에 풍부한 화강암석재를 리용하여 쌓았다.

대흥산성에는 북문, 남문, 동문, 서문, 소동문, 소서문 등 6개의 큰문이 있었다. 현재 이 6개의 문가운데서 북문에만 문루가 남아있고 기타 성문들에는 돌로 쌓은 무지개형의 통로만 남아있다.

대흥산성에서 대표적인 성문은 북문이다.

북문은 박연폭포에서 길을 따라 약 200m 동남으로 올라간 곳에 자리잡고있다.

화강석을 잘 다듬어 규모있게 축조한 문축대우에 정면 3간, 옆면 1간의 루각이 세워졌다.

루각의 지붕은 합각이며 홑처마에 단익공 중단청인데 장마루란간의 마루는 다락으로 되여있다.

북문의 아담한 문루는 이름난 명승인 박연폭포가 쏟아져내리여 이루어진 고모담옆의 범사정과 함께 박연의 자연풍치를 한층 돋구어준다.

문의 높이와 너비는 각각 3.7m, 문통로의 길이는 5.5m이다.

대흥산성에는 수문이 모두 4개 있다.

그가운데 하나는 자연적인 폭포를 수문으로 리용하였다. 즉 성안의 여러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이 북문옆에서 폭포로 되여 떨어지는데 이것을 바로 수문으로 쓴것이다.

대흥산성에는 지휘처인 장대가 3개 있다.

그가운데서 대표적인 장대는 영청대이다.

대흥산성에서는 성안에 장대를 설치하였을뿐아니라 성밖에 또 망루를 설치해놓고 외부에서 나타나는 정적을 신속히 성안에 전달하였다.

산성안에는 이밖에 북창, 동창, 내창, 승창 등 4개의 식량창고와 무기고, 화약고자리도 있다.

대흥산성안에는 고려시기에 지은 절간으로 알려진 관음사와 대흥사가 있고 백련암, 선암, 적조암, 해인암, 취운암, 범암, 태안암, 운흥암 등 절과 암자리들이 여기저기 남아있어 옛 모습을 더듬게 한다.

지금 있는 성은 1676년에 고쳐 쌓은것으로서 이 산성은 고구려산성의 고유한 특징들을 그대로 가지고있다.

고려시기 대흥산성은 수도 개경을 보위하는 북쪽의 수도방위성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놀았다.

대흥산성에는 고려시기는 물론 그 이후시기에도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용감하게 싸운 인민들의 투쟁이야기들이 많이 깃들어있다.

임진조국전쟁시기에는 박내성이 대흥산성을 중심으로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침략자들과 용감하게 싸웠다.

19세기말, 20세기초 우리 나라를 강점하려는 일본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온 나라 방방곡곡에서 반일의병투쟁이 거세차게 일어났을 때에도 바로 대흥산성을 근거지로 하여 김수만의병부대가 반일의병투쟁을 벌리였다.

실로 장구한 력사를 통하여 그 위력을 떨친 대흥산성은 선조들의 슬기와 재능, 애국심이 간직되여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주체46(1957)년 8월 가파로운 오솔길을 걸으시여 몸소 대흥산성의 북문에 오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북문의 축대를 비롯하여 험한 산마루와 릉선을 따라 규모있게 쌓은 커다란 성돌들을 세심히 살펴보시고 우리 선조들의 축조기술이 참 훌륭하다고 하시며 우리 선조들은 기계도 없이 이런 큰 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우리 인민들의 조국에 대한 사랑과 애국심의 표현이라고 교시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귀중한 문화유산들을 잘 보존관리하고 그것을 통한 애국주의교양을 잘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대흥산성과 북문을 비롯한 이 일대의 력사유적들은 오늘 우리 당의 문화유적보존정책에 의하여 훌륭히 보존관리되여 근로자들의 즐거운 문화휴식터로, 인민들의 민족적긍지를 북돋아주는 좋은 교양장소로 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