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민족의 오랜 력사와 찬란한 문화전통을 살려주시여

 2024.2.12.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모란봉에 있던 〈기자묘〉는 가짜묘입니다. 광복후에 〈기자묘〉를 파헤쳐보게 하였는데 거기서 벽돌쪼각과 사기쪼각밖에 나온것이 없었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전후 페허우에서 평양시건설을 지도하시던 그 어려운 나날에도 동명왕릉문제를 주체적립장과 력사주의적원칙에서 정확히 확증하도록 현명하게 이끌어주시면서 슬기로운 조선인민의 민족자주의식을 높여주시고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전통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안겨주시였다.

지난날 일제와 어용사가들은 평양에 있는 동명왕릉은 고구려건국시조의 묘가 아니라고 력사적사실을 외곡하였다. 그것은 조선인민의 오랜 력사와 문화를 짓밟고 말살함으로써 조선민족은 예로부터 약소민족이였기때문에 남에게 억눌려사는것을 《숙명》처럼 여겨야 한다는것을 선전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여기에 일부 사대주의자들도 《기자묘》는 진짜일수 있으나 동명왕릉은 고구려시조왕묘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들은 동명왕이 고구려국가를 창건한 첫 수도는 료녕성의 환인인데 그가 죽은 다음 오랜 세월이 지나서 고구려가 수도를 압록강 북쪽기슭의 집안으로 옮겼다가 다시 평양으로 옮겨왔다는 력사적사실을 고려해야 한다고 하면서 동명왕릉이 절대로 진짜일수 없으며 후세사람들이 사실과 맞지 않는 이름을 붙여놓은것이라고 해석하고있었다.

이렇게 되여 동명왕릉문제는 1960년대에 들어와서도 미해명문제로 남아있었고 오래동안 사람들의 관심밖에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친히 력사학자들을 부르시여 동명왕릉문제를 빨리 확증해야겠다고 하시면서 《기자묘》는 봉건통치배들이 사대주의를 하면서 만든것이지만 동명왕릉은 사대주의와 관련된것이 아니라 자기 조상의 묘를 가져가는가 가져오지 않는가 하는 조선사람의 신조와 관련된 문제이다, 옛날 고구려는 제일 강한 나라였으며 그때 고구려사람들은 건국시조인 동명왕을 신격화하였다, 그런것만큼 당시 고구려사람들이 도읍을 평양으로 옮길 때 건국시조의 묘를 줴버리고 나올수 없을것이라고 가르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침을 받아안은 김일성종합대학의 교원, 학생들은 동명왕릉조사발굴사업에 달라붙어 불과 1년사이에 금, 은으로 장식한 여러개의 관못과 왕관을 장식했던 100여개의 금장식품들, 구슬과 머리빗 등 귀중한 유물들과 아직까지 누구도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벽화까지 찾아내여 이것이 왕릉이 틀림없으며 앞의 절간은 왕릉을 위해 지었다는것을 명백히 증명할수 있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비범한 예지와 정력적인 지도에 의하여 동명왕릉이 고구려시조왕묘라는것이 확증됨으로써 고구려의 건국과정과 그 발전의 진면모, 그 시기 창조된 우수한 문화가 자기의 모습을 자랑하며 소생되여 슬기롭고 유구한 조선민족의 력사를 더욱 빛내이게 되였다.

동명왕릉
사진. 로동당시대에 훌륭히 개건된 동명왕릉

외래제국주의자들과 그 어용사가들, 사대주의자들에 의하여 짓밟히고 외곡되여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조선인민의 기억속에서 희미해져가던 고구려시기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는 이렇듯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현명한 령도의 손길아래 천수백년이 지난 주체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그 참다운 모습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