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은 오랜 세월을 두고 민족체육을 발전시켜왔습니다. 해마다 민속명절을 계기로 황소를 걸고 씨름경기도 하고 바줄당기기, 널뛰기, 그네뛰기와 같은 민족경기를 벌려놓고 마을과 마을 호상간에 서로 힘을 겨루며 슬기를 떨치는것을 전통화하여왔습니다.》
조선인민이 창조하고 발전시켜온 민족체육에는 오랜 력사적전통을 자랑하며 계승되여오는 바줄당기기도 있다.
바줄당기기는 여러 사람이 두편으로 나뉘여 긴 바줄의 량쪽을 갈라잡고 힘껏 당겨 자기편쪽으로 상대편을 끌어오는것을 겨루는 집단놀이이다.
바줄당기기는 오랜 로동생활과정에 발생하여 중세에는 그것이 하나의 민족체육으로 발전하였다.
아득한 원시시기에 사람들은 생산활동과정에 무엇을 잡아당기거나 끌 필요가 제기될 때마다 힘내기로 잡아당겼으며 이러한 행동이 자주 반복되면서 경기적인 성격을 띤 바줄당기기가 발생하게 되였다.
바줄당기기는 삼국시기의 기록에서는 찾아볼수 없지만 이 시기에도 흔히 하던 민족체육이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편찬된 《림하필기》에서는 바줄당기기의 유래에 대하여 전하면서 《바줄당기기는 삼국, 고려시대의 옛풍습이다.》라고 하였다.(《림하필기》권34 화동옥삼편)
이러한 자료를 통하여 바줄당기기가 삼국시기에도 이미 있었다는것을 잘 알수 있다.
바줄당기기는 중세 전 기간 계승발전되면서 대중적인 체육으로 활발히 진행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편찬된 《동국세시기》, 《동국여지승람》 등의 고전문헌들에는 바줄당기기와 관련한 많은 자료들이 기록되여있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바줄당기기는 전국의 이르는 곳마다에서 진행되였는데 정월대보름을 비롯한 여러 계기들에 집단적인 행사처럼 벌어지였다.
바줄은 지방에 따라 벼짚이나 칡넝쿨로 꼬아 만들거나 두 재료를 섞어쓰기도 하였는데 경기의 규모에 따라 길이와 굵기를 달리하였다. 바줄당기기는 흔히 마을단위로 또는 고을대항으로까지 확대되여 수많은 선수와 응원군이 참가하였다. 당시 바줄의 기본줄인 원줄의 직경은 50~60㎝, 길이는 300~400m정도로서 매우 굵고 길었다. 그러므로 바줄당기기를 할 때에는 원줄을 직접 잡지 못하고 동줄을 잡고 당겼다.
동줄은 원줄에다 1m정도씩 간격을 두고 직경 9~10㎝, 길이 2~3m의 짧고 가는 줄을 련결하여 늘인것이였다.
바줄당기기는 흔히 어린이들의 애기줄당기기로부터 시작되였다. 12~13살쯤 되는 소년들이 두편으로 갈라져 경기를 하는데 이때 사용한 줄은 작은것이였다. 어른들은 이 경기에 직접 참가하지 않았지만 놀이승부에 큰 관심을 가지였다.
월초부터 시작된 애기바줄당기기는 12~13일경까지 여러 차례 계속되였는데 이 기간에 마을의 어른들은 큰 바줄당기기를 위한 준비를 하였다.
어른들의 바줄당기기는 애기바줄당기기가 절정에 이른 때인 13일 또는 14일경에 시작되였는데 두 마을 또는 두 고을의 경계점으로 되는 큰 풀밭이나 공지에서 하였다.
경기가 진행되는 날에는 이른 아침부터 량편에 속한 마을의 수많은 사람들이 각기 농악대를 앞세우고 경기장으로 모여든다.
이러한 고조된 분위기속에 줄을 멘 수백명의 장정들이 경기장에 들어선다. 두편 줄이 점점 접근하여 2~3m정도의 간격을 두게 되면 멈춰서서 상대편이 전진해올것을 요구하는 버티기를 한다. 이렇게 버티기를 하며 자기편의 기세를 돋구다가 호상 양보하여 두편이 서로 다가서서 줄을 련결한다.
경기는 총심판관의 신호에 따라 시작된다.
경기과정에 어느 한편이 불리해지면 온 마을사람들이 남녀로소를 막론하고 한꺼번에 줄에 달라붙었으며 경기와 직접 관련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뛰여들어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불리하던 형세가 급변하기도 하였는데 다른 편에서도 역시 많은 구경군들이 당겨주었다.
경기는 규정상 량편의 줄을 련결한 중심점이 어느 한편의 경계선까지 끌려갔을 때 끌려간 편이 줄을 무조건 놓아주어야 하였다.
승부가 결정되면 이긴편에서는 자기줄과 련결된 진편의 줄까지 함께 메고 농악을 울리며 마을을 한바퀴 돌았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바줄당기기는 이렇듯 대단히 큰 규모로 진행되였다.
오늘날 바줄당기기는
바줄당기기는 우리 당의 옳바른 민족유산보호정책에 의하여 국가비물질문화유산으로 등록되였으며 우리 인민들속에서 여러 계기들에 즐겨하는 대중적인 민족체육으로 훌륭히 계승발전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