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폭탄세례로 적들을 전률시킨 강우규렬사

 2021.2.18.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의 강압날조로 반만년의 유구한 민족사를 자랑하던 우리 강토가 하루아침에 일제의 발굽밑에 짓이겨지고 우리 인민은 식민지노예로 전락되였다.

일제는 《조선사람은 일본법률에 복종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죽어야 한다.》는 폭언을 뇌까리면서 조선에서 행정관리는 물론이고 신성한 교정의 교원들에게까지 제복을 입히고 칼을 채우는 등 가장 야만적인 식민지무단통치를 실시하였다.

싸우다가 죽을지언정 원쑤앞에 굴할줄 모르는것이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속에서 발휘된 강의한 투쟁정신이고 애국적의지였다.

우리 인민들은 전국도처에서 일제와 친일주구,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하고 나라의 독립을 되찾기 위한 여러가지 형태의 반일투쟁을 과감히 전개해나갔다. 그러한 사람들가운데는 폭탄세례로 적들을 공포에 떨게 한 60고령의 반일애국렬사 강우규로인도 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환갑이 넘은 강우규로인까지도 사이또총독의 면전에 폭탄을 던지였다.》 (김일성전집》 제95권 16페지)

1855년에 평안도 덕천군 무릉면(오늘의 평안남도 덕천시 남덕동)에서 출생한 강우규는 30살때 아버지를 따라 함경도 홍원으로 이사를 갔다.

당시 강우규는 교육을 통한 실력배양이 독립구국의 기초로 된다는 생각밑에 홍원에서 농사를 짓고 고려의술로 환자들을 치료하는 속에서도 사립학교를 세우고 교육사업에 전심하였다.

1910년 일제의 날강도적인 《한일합병》에 분격한 그는 1911년 봄 가족들과 함께 북간도로 옮겨갔다.

강우규는 여기에서 1917년에 광동학교(중국의 길림성 연길시 신흥촌)를 설립하고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 반일애국사상을 심어주는데 각별한 힘을 넣었다. 사립학교의 교재로 널리 리용된 《신한독립사》, 《오수불망》, 《최신창가집》 등은 일제에 대한 불타는 증오심과 민족자주의식 그리고 민족적독립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내용들로 일관되여있었다. 사립학교에서의 반일애국교육은 청소년학생들속에 강도 일제에 대한 불타는 증오심과 애국적투지를 키워주고 그들을 반일독립성전에로 불러일으키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강우규는 그후 1919년에 로씨야 연해변강의 울라지보스또크에 조직되여있던 독립운동단체인 로인단에 들어가 국권회복을 위한 여러가지 형태의 반일애국활동을 힘있게 벌렸다.

1919년 8월에 사이또 마꼬도가 제3대 조선총독으로 임명되여 기여든다는것을 알게 된 강우규는 비록 64살의 년로한 몸이였으나 침략자를 단호히 처단할 굳은 결심을 다지였다.

그는 1919년 6월 폭탄을 가지고 울라지보스또크를 떠나 원산에 도착하였다. 그후 8월초 경성에 도착한 강우규는 최자남, 허형을 비롯한 동료들과 함께 총독의 경성도착과 관련한 정보를 입수하는 등 면밀한 준비를 갖추었다.

드디여 9월 2일 일제헌병 및 경찰들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남대문역전에 나간 강우규는 역귀빈실에서 나와 마차에 기여오르는 사이또에게 복수의 폭탄을 던졌다. 요란한 폭음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사이또를 마중나왔던 조선총독부의 무관인 륙군소장 무라다를 비롯하여 29명이 폭탄파편에 얻어맞고 중경상을 입었다. 그중 2명은 병원에 실려갔다가 죽고 사이또는 폭탄파편이 그가 찼던 칼에 맞는 바람에 아쉽게도 살아남았다.

역전이 혼란된 틈을 타서 적들의 포위망을 빠져나와 은신해있던 강우규는 그후 9월 17일 체포되여 다음해 11월에 서대문감옥에서 사형당하였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도 《단두대에도 오히려 봄바람이 불건만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리》라는 시를 지어 자기의 애국적의지를 남김없이 시위하였다.

안중근, 전명운, 장인환 등의 애국적장거에 이어 사이또에 대한 강우규로인의 폭탄세례사건은 조선민족의 애국심, 반일투지를 뚜렷이 시위하고 인민들을 반일투쟁에로 고무추동한 의의있는 사건이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테로의 방법으로 발톱까지 무장한 강도 일제를 조국강토에서 물리치고 빼앗긴 국권을 회복한다는것은 전혀 실현불가능한 일이였다.

탁월한 령도자의 지도밑에 자기의 주체적력량을 튼튼히 마련하고 옳은 전략전술에 의거하여 투쟁할 때 민족해방의 성스러운 위업을 이룩할수 있다는것-이것은 파란많은 우리 인민의 반일민족투쟁사가 남긴 력사의 교훈이고 진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