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김광호
2016.12.3.
옥류교.
오늘 우리 인민은 이 이름을 부르며 옥류교를 건늘 때마다 다리에 깃든 어버이수령님의 뜨거운 사랑에 대하여 가슴뜨겁게 돌이켜보고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습니다.
《수령님께서 <옥류교>, <미림다리> 같은 짧은 글을 친필하여주신것은 많습니다.》 (《김정일전집》 증보판 제11권 173페지)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47(1958)년을 평양시건설력사에서 일대 전환의 해로 되게 하시려는 원대한 구상을 안으시고 옥류교를 인민의 요구와 리익에 맞게 건설하도록 현명하게 이끌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47(1958)년 3월초 어느날 건설부문의 한 일군을 만나시여 평양시건설계획에 제2대동교(당시)를 언제부터 건설하기로 되여있는가를 알아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일군으로부터 나라의 자금사정으로 인하여 대동강에 새로 놓는 다리는 5개년계획기간에는 시작하지 못하고 1961년부터 건설에 착수하기로 되여있다는것을 료해하시고 대동강의 얼음이 풀리기 시작했는데 나루배가 얼음때문에 움직이지 못하여 대동강웃쪽사람들이 불편하게 대동교를 에돌아 출근하고있다고, 제2대동교건설을 5개년계획이 끝난 다음에 시작할것이 아니라 5개년계획기간안에 완성하여 인민들의 소원을 빨리 풀어주자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때 당시 대동강얼음이 풀리는 절기에 동평양지구의 강웃쪽에 사는 사람들이 배길이나 얼음길을 리용할수 없어 대동교로 에돌아다니는것은 오랜 세월 습관된 일이여서 나라사정이 아직 어렵던 그 시기에 그것을 큰 불편으로 여길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하지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인민들의 자그마한 불편도 마음에 걸리시여 하루빨리 이 문제를 해결할데 대한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그로부터 얼마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른 새벽 평양시의 여러곳을 돌아보시고 대동강가에 나오시여 배를 타시고 양각도부근에서부터 강을 거슬러올라오면서 아래로는 련광정과 대동문이 있고 우로는 모란봉과 릉라도가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는 제일 좋은 곳에 오늘의 옥류교위치를 잡아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다리의 위치를 현지에서 잡아주시고 평양시건설에서 새로운 고조를 일으킬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어떤 문제를 처리하실 때나 늘 그러하신것처럼 건설에서도 무엇보다먼저 인민들의 지향과 요구가 철저히 구현되도록 하는데 특별한 관심을 돌리시였다.
주체49(1960)년 5월 30일, 제2대동교건설장을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건설장을 돌아보시면서 다리의 건설속도가 비상히 빠른데 대하여 치하하시고 이 다리는 우리 시대의 훌륭한 기념물이니 다리를 놓을 때 잘 놓자고 하시며 건설자들의 의견을 허물없이 들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 일군으로부터 다리이름을 《제2대동교》라고 부르지 말고 다르게 짓자는 의견이 전국각지의 인민들로부터 제기되였다는것을 료해하시였다.
당시 이 다리건설에 수도시민들뿐아니라 전국의 이르는 곳마다에서 로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원하여 나섰으며 기초공사가 끝나고 교각이 일떠서기 시작하자 전국각지의 인민들은 편지로 또는 전화로 한결같이 위대한 수령님의 배려에 의하여 천리마시대에 새로 건설하는 현대적인 다리인데 어떻게 일제때 건설한 대동교에 비겨 제2대동교라고 하겠는가고 하면서 다리이름을 천리마시대에 건설했다고 하여 천리마교, 전진하는 시대에 건설했다고 하여 전진교, 또는 약진교, 다리건설에서 일대 혁신을 일으켰다고 하여 혁신교, 다리형성이 무지개같다고 하여 무지개다리로 부르자는 등 다리의 이름에 대한 의견이 많이 제기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러한 의견들을 다 들으시고 매우 만족해하시며 참 좋은 의견들이 많이 제기되였다고 하시면서 우리는 혁명도 건설도 인민을 위해서 한다고, 그러니 인민들은 나라에서 하는 일을 모두 자기 일로 여기는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제기된 다리이름들을 하나하나 다시 외워보시면서 다리에 이름을 하나 붙여도 인민들이 부르기 좋아하는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릉라도와 좌우의 강변을 바라보시다가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저 릉라도 여울물이 구슬같이 반짝이면서 흐른다고 하여 옥류라고 하고 그래서 그 옥류와 부딪치는 저 병풍같은 돌벽을 옥류병이라고 불렀을는지 모른다고 하시면서 옥류병근방에서 일하고있는 한 석공로인에게 본래 이 고장의 지명과 그 유래에 대하여 물으시였다.
석공로인은 방금전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말씀하신것과 꼭같이 릉라도앞의 물결이 구슬같다고 하여 옥류라하고 그 옥류가 부딪치는 이곳을 구슬 옥, 흐를 류, 병풍 병 자를 써서 옥류병이라고 한다고 정중히 말씀올리였다.
로인의 대답을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못내 만족해하시며 참말로 이곳을 흐르는 대동강물은 글자 그대로 옥류이라고 하시면서 예로부터 인민들이 즐겨부르는 옥류라는 이름을 따서 옥류를 건느는 다리를 《옥류교》로 하자고 말씀하시였다.
옥류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 이름없는 석공의 소박한 말에서도 인민의 의사를 헤아리시고 인민들이 부르기 좋고 또 부르고싶어하는 이름을 친히 달아주시였다.
옥류교야말로 아름다운 조국강산과 슬기로운 인민에 대한 어버이수령님의 위대한 사랑의 창조물이며 영원한 기념비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인민의 의사와 념원을 담아 대동강에 새로 놓는 다리의 이름을 친히 지어주시였으며 다리의 이름판도 친필로 써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친히 현지에 나오시여 다리의 이름을 지어주신 이후 옥류교 건설자들과 지원자들속에서는 다리건설이 완공단계에 들어서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몸소 이 다리의 건설을 발기하시고 그 터전을 잡아주셨 으며 다리의 건설과정도 지도해주시고 다리이름도 친히 지어주셨으니 다리 이름판도 응당 수령님의 친필을 새겨 후손만대에 길이 전해야 한다는 한결같은 의견이 제기되였다.이것은 건설자들뿐아니라 전체 우리 인민의 한결같은 념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글씨 잘 쓰는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씌우도록 하라고 하시면서 굳이 사양하시였다.
주체49(1960)년 7월하순의 어느날.
어느 한 지방을 현지지도하고계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옥류교의 개통 준비를 진행하면서 전체 인민이 어버이수령님께서 다리이름을 친필해주실것을 바라고있다는것을 료해하시고 몸소 인민의 념원을 담으시여 《옥류교》라고 쓰신 더없이 귀중한 친필원고 여섯장을 보내주시면서 그 가운데서 마음에 드는것을 골라가지고 글 잘 쓰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꼭 가필을 시키도록 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가르치심대로 한 일군은 붓글씨에 조예가 깊다는 한 로인을 청하여 어버이수령님의 필적이라는것을 밝히지 않고 가필을 부탁 하였으나 그 로인은 《저는 이런 옥필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이 글은 대인이 쓴 글이올시다. 제가 어찌 이런 글에 감히 붓을 댈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러섰고 붓글씨에 능하다는 다른 한사람을 청하여 가필을 부탁해보 았으나 그도 역시 먼저번 로인과 같은 소견을 말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인민은 인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그대로 획이 되고 글발이 된 이 불멸의 친필을 정성담아 다리의 이름판에 새기였다.
이처럼 우리 인민의 장엄하고 벅찬 생활이 들끓는 혁명의 수도 평양의 두 지역을 련결하는 옥류교는 이렇게 그 설계로부터 시공, 다리의 이름과 다리이름판의 글씨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수령님의 대해같은 은덕과 뜨거운 손길에 의하여 완성되였던것이다.
옥류교라는 다리의 이름판은 바로 이렇게 마련된것이다.
옥류교뿐아니라 이 땅우에 창조된 귀중하고 자랑찬 모든것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 인민을 위해 바치시는 숭고한 사랑이 깃들어있다.
동평양의 《청년거리》, 《붉은거리》, 《팔골다리》, 《봉화거리》 등 위대한 수령님께서 친히 지어주신 이름들마다에는 첫째도 둘째도 인민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치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원대한 구상과 인민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 의하여 마련된것이다.
그리하여 평양은 세상사람들이 《남들이 200~300년씩 걸려서 건설한 도시들보다 더 아름답고 웅장하다.》고 경탄을 금치 못하는 웅장화려한 현대적인 도시로 높이 솟아오르게 되였다.
모든것을 근로하는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게 하시는 위대한 수령님들의 은혜로운 해발아래 솟아난 주체의 락원인 오늘의 평양은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영원무궁토록 륭성번영할 락원의 도시로 더욱 아름답게 전변되고있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