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개 나라의 문화는 자기의 우수한 민족적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다같이 세계문화의 보물고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
고구려의 천문학은 자기의 독자적인 로정을 따라 발생발전하여 높은 수준을 이룩하였다.
고구려천문학발전의 독자성은 첫째로 고구려천문학이 고조선시기에 이룩된 우리 민족 특유의 전통적인 천문관계유산을 토대로 하여 발생한데서 잘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모든 과학과 기술은 어느것이나 빈터에서 저절로 생겨날수 없으며 사람들이 오랜 기간 계통적으로 축적한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하여 발생발전한다.
고구려의 천문학은 이미 고대시기에 마련된 우리 민족의 천문관계유산을 전제로 하고있었다.
고대시기 우리 선조들은 자기의 독자적인 관측체계와 방법에 기초하여 민족고유의 천문학을 발전시켰다.
그것은 고조선시기에 축조된 고인돌무덤의 뚜껑돌에 새겨진 별자리그림을 통하여 잘 알수 있다.
고인돌무덤은 고조선시기의 독특한 무덤형식으로서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반도와 료동반도, 연해주일대까지 널리 퍼져있다. 지금까지 조사발굴된 고인돌무덤의 개수는 무려 2만여기나 된다. 그가운데서 200여기의 고인돌무덤에는 뚜껑돌을 비롯하여 여러 부분에 홈구멍이 새겨져있는데 이것은 하늘의 별들과 별자리들의 배치상태를 그린 별그림이라는것이 밝혀졌다.
고인돌무덤별자리의 천문학적년대는 지금으로부터 4 800~3 200년전으로 추정된다. 이른 형식의 고인돌무덤별자리에서 볼수 있는 단순한 형태로 이루어진 별그림이 이후시기로 가면서 점차 복잡한 형태의 별자리모양으로 변하였다. 다시말하여 이른 시기의 고인돌무덤별자리에서 북극주변의 북두칠성이나 룡별자리,목동별자리와 같은 한두개의 단순한 별자리로 그려졌던것이 마지막시기의 고인돌무덤별자리에서는 북극주변의 별과 함께 지평선에서 뜨고지는 별자리들까지 그려져있어서 마치 천문도다운 양상으로 발전되였다.
B.C.3000년기 전반기의 천문지식이 반영된 고인돌무덤별자리는 세가지 부류로 나누어진다. 첫번째 부류는 북극주변에서 지지 않는 한두개의 별자리들만 그린것이고 두번째 부류는 북극주변의 보다 많은 별자리들과 함께 북극에서 멀리 떨어진 적도원(지구적도면과 천구와의 사귐선)구역에 있는 일부 별들도 그린것이며 세번째 부류는 북극주변의 여러개 별자리들과 함께 적도띠구역에 있는 여러개 별자리들을 함께 그려놓은것이다. 이러한 고인돌무덤별자리의 발전모습은 초기단계에서 북극중심구역에 놓이는 별들을 중시하던 때로부터 점차 발전하여 적도띠구역에 놓이는 별들인 28수의 별들도 함께 중시하였다는것을 의미한다.
천문도양상의 이러한 별자리들은 고대시기에 우리 나라에 벌써 별관측체계와 담당자가 있었다는것을 말하여준다. 다시말하여 단순히 원시적이며 개별적인 관측에서 축적된 지식이 아니라 천체의 운행에 대한 전문적이며 조직적인 관측이 진행되였다는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것은 단군이 운목에게 감시관직을 주었으며 단군조선에서는 별을 전문적으로 맡아보는 감성관이 있었다는 《단기고사》의 기록에서도 잘 나타난다.
고조선시기의 천문학적지식과 그것을 반영한 유적인 고인돌무덤별자리는 이후에 보다 발전되여 고구려의 석각천문도작성에로 이어졌다.
조선봉건왕조초기(1395년)에 제작된 천문도인 《천상렬차분야지도》의 발문(설명문)에는 이 천문도의 원본이 고구려시기에 만들어진 석각천문도라는것이 기록되여있다. 그리고 최근연구자료에 의하면 고구려석각천문도에 새긴 성좌도의 원본은 고조선말기(B.C. 500년경)에 고조선사람들에 의하여 관측된것이며 고대성좌도에 기초하여 A.D. 350년경에 고구려사람들이 그것을 더욱 발전시켜 석각천문도를 제작하였다는것이 밝혀졌다.
이것은 당시 고구려의 천문학이 그 어떤 외부적인 영향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고대국가인 고조선의 천문지식을 토대로 하여 발생발전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고구려천문학발전의 독자성은 둘째로 고구려가 천문관측을 위한 자기의 독자적인 기구와 체계, 시설을 갖추고있은데서 잘 나타난다.
무엇보다먼저 고구려에는 자기의 독자적인 천문관측기구가 있었다.
우선 고구려에는 천문관측을 전문으로 하는 관리가 있었다.
문헌기록(《삼국사기》 권 제15 고구려본기 제3 차대왕 4년)에 의하면 고구려에는 천문관측을 전문으로 하는 《일자》라는 직제가 있었고 그들이 일정한 체계와 규범에 따라 천문관측사업을 맡아 수행하였다고 한다.
고구려에 천문관측을 전문으로 하는 관리가 있었다는것은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민중왕 3년(46년) 11월에 살별(혜성)이 남쪽에 나타나서 20일만에 없어졌다는 기록과 고국원왕 6년(336년) 3월에 큰 별이 서북쪽을 흘러갔다는 별찌에 대한 기록 등을 통하여서도 잘 알수 있다. 일반적으로 살별이나 별찌는 다른 별들과는 달리 언제 어디에서 나타나겠는지 예측할수도 없으며 더우기 별찌는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광체이다. 그런데 살별이 어디에서 어느쪽으로 흘러갔다는 식의 정확한 기록을 남기였다는것은 천문관측을 낮과 밤, 어느 계절이나 어느 시간을 막론하고 계속하였음을 말해준다.
또한 고구려에는 천문관측결과를 정상적으로 왕에게 보고하는 체계가 서있었다.
《삼국사기》에는 《149년에 5행성이 한데 모였는데 천문을 보는 관리(일자)가 그것이 불길한 징조라고 보고하면 왕이 노할가 두려워서 왕을 속여 그것은 나라에 좋은 일이 있을 징조라고 보고하였다.》라고 씌여져있다. 이것은 고구려에서 천문관측을 매우 중시하였으며 천문관측을 맡은 관리가 그 결과를 왕에게 보고하는 체계가 서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또한 고구려에는 천문관측결과를 기록하여 사서에 올리는 체계가 서있었다.
그것은 중세초기 조선민족의 력사를 서술한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일식관계기사 11건, 혜성관계기사 10건, 류성관계기사 3건, 행성관계기사 4건, 태양관계기사 1건 등이 기록되여있는것을 보고도 잘 알수 있다.
다음으로 고구려는 자기의 독자적인 천문관측시설을 가지고있었다.
《동국여지승람》평양부 고적조에는 《첨성대는 평양부의 남쪽 3리 되는 곳에 있다.》고 씌여져있으며 《세종실록》지리지 평양부에도 《성안에는 9개의 사당과 9개의 못이 있는데 9개의 사당은 바로 9가지 별들이 날아들어간 곳이며 9개의 못옆에는 첨성대가 있다.》고 기록되여있다.
최근 평양시 대성구역 안학동에서 발견된 고구려첨성대터유적은 고구려가 왕궁가까이에 천문관측시설인 첨성대를 설치하고 국가적관심속에 천문관측사업을 끊임없이 진행하였다는것을 잘 보여준다.
고구려에서는 바로 이러한 천문관측시설과 기구들을 리용하여 일정한 체계와 규률밑에서 독자적인 천문관측을 활발하게 진행하였던것이다.
고구려천문학발전의 독자성은 셋째로 고구려시기의 천문관계유적유물에 반영된 별그림의 내용이 독자적인데서도 잘 나타난다.
고구려사람들은 다른 나라의 천문학을 본따거나 모방하지 않고 자기의 고유한 방법론에 의거하여 천문학을 독자적으로 발전시켜나갔다.
그것은 무엇보다먼저 고구려석각천문도에 이웃나라의 천문도들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고유한 별자리들이 있으며 일부 별자리들은 결합방식에서 이웃나라의것과 큰 차이를 가지고있는것을 보아도 알수 있다.
우선 고구려석각천문도에는 이웃나라의 천문도에서는 전혀 찾아볼수 없는 별자리들이 그려져있다.
고구려석각천문도와 비슷한것은 중국의 삼국시기에 만든 《삼가성도》이다. 두 천문도의 별의 개수는 하나가 차이나므로 비슷하다고 할수 있지만 내용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실례로 고구려석각천문도에는 북두칠성의 오른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5각형모양으로 무어진 별자리인 《팔곡》이 있는데 삼가성도에는 이런 별자리가 없다. 그리고 고구려석각천문도에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북두칠성과 대칭되는 위치에 활짝 편 부채모양의 《화개칠》이라는 별자리가 있는데 중국의 삼가성도에는 없다.
또한 석각천문도의 일부 별자리들도 결합방식에서 이웃나라의 천문도와 큰 차이가 있다. 북극원내에서 두 천문도는 중심에 북극성을 그린 점에서는 공통성이 있지만 다른 여러개의 별자리에서는 별들의 결합방식이 서로 다르다.
실례로 별자리의 이름은 비슷해도 그 결합방식이 다른 별자리가 매우 많다. 이런 별자리들로서는 자미원, 남두륙, 구진, 천일, 태일, 내계, 내주, 천상 등을 들수 있다. (그림 1, 그림 2)
그림 1. 자미원
그림 2. 남두륙
하늘에 있는 같은 별들인 경우에도 나라와 지역에 따라 그것들을 서로 련결하는 별자리결합방식이 차이나며 이것은 천문관측 및 기록방식의 차이 나아가서 문화권의 차이로 된다. 그러므로 고구려석각천문도와 삼가성도의 별자리결합방식의 차이는 고구려석각천문도내용의 독자성을 잘 말해준다.
다음으로 고구려석각천문도가 당시 다른 나라의 천문도들에서는 전혀 찾아볼수 없는 천문도구성체계를 이루고있는것을 보고 알수 있다.
《천상렬차분야지도》의 원본인 고구려석각천문도에 그려진 고구려천문도에는 모두 적도원(지구적도면과 천구와의 사귐선)과 황도원(지구의 공전자리길과 천구와의 사귐선-해길) 등이 그려져있다.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도는 돈황지역에서 발견된 일명 돈황성도 갑본과 을본들인데 이것들은 자미단과 태미단, 천시단의 3단별자리와 28수의 별자리를 전개도처럼 펼쳐놓는 두루마리형식의 천문도이며 그 제작시기는 8세기부터 10세기로 추정되고있다. 그런데 이러한 천문도들에는 천문도의 주요 구성부분의 하나인 적도원과 황도원이 그려져있지 않다.
다음으로 고구려무덤벽화의 별그림에 당시 다른 나라의 천문관계유적유물들에서는 전혀 찾아볼수 없는 별자리체계가 묘사되여있다.
무덤벽화 별그림의 별자리체계는 여러개의 별자리가 하늘의 중심인 북극 혹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배치되여 일종의 방위체계를 이루고있는것을 말한다. 다시말하여 이것은 사신도가 동서남북을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을 하는것처럼 밤하늘의 별자리에도 동서남북을 수호하는 방위별자리가 있다는 천문방위의식의 표현이다.
고구려무덤벽화에서 이러한 사방위체계는 4세기말 ~ 5세기부터 많이 보인다. 당시 다른 나라들의 천문도나 별그림에서는 전혀 찾아볼수 없는 고구려고유의 사방위별자리체계는 남북방위와 동서방위가 서로 대칭을 이루는 구도로서 북쪽의 방위별자리는 북두칠성이며 남쪽의 방위별자리는 남두륙성 동쪽은 심방(心房)륙성(전갈별자리), 서쪽은 삼벌(参伐)륙성(오리온별자리)이다. 이러한 사방위별자리체계(사숙도)는 안악1호무덤과 덕화리1호, 2호무덤, 덕흥리무덤벽화, 약수리무덤벽화, 씨름무덤, 춤무덤 등에서 잘 나타난다. 고구려무덤벽화들에서 보이던 사방위별자리체계는 6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동쪽과 서쪽의 방위별자리는 약화되여 사라지고 남북의 방위별자리와 중심에 있는 북극3성이 결합되면서 황룡중심의 고구려식천문관을 표현하고있다. 이러한 고구려무덤벽화 별그림들에 보이는 사방위체계와 북극3성중심체계는 당시 중국의 무덤벽화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고구려 고유의 별자리체계였다.
고구려천문학발전의 독자성은 넷째로 고구려무덤벽화 별그림의 변천과정이 이웃나라의 무덤벽화 별그림의 변천과 뚜렷이 구별되는데서도 잘 나타난다.
무덤벽화 별그림의 변천과정은 당시 사람들의 천문지식과 사상감정, 신앙심의 변화가 집약화되여 표현되는 과정이라고 할수 있다.
고구려무덤벽화의 별그림은 자기의 독자적인 경로를 따라 련면히 변천되였다.
고구려무덤벽화 별그림은 크게 세 단계를 거쳐 변천되였다.
첫시기인 2세기부터 3세기까지는 무덤벽화의 천정에 밤하늘의 별들가운데서 가장 밝은 별들과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있는 방위별자리들이 방향별에 따라 그려지며 둘째시기인 4세기경부터는 무덤칸의 여러 방향들에 28수에 해당되는 별자리들과 해와 달, 5행성을 비롯하여 수많은 천체들이 다양한 형식으로 다채롭게 형상되며 특히 6세기에 들어서서는 《천문도》다운 양식으로 그 과학성과 형상성이 최절정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셋째시기인 6세기 후반기부터 7세기에는 고구려사람들의 고유한 《5신》신앙을 반영하여 별그림들이 간소화되면서도 고구려중심의 세계관과 천자(하늘의 후손)의 나라로서의 지위를 강하게 표현하고있다.
당시 고구려와 린접하였던 중국지역에서도 전한시기부터 무덤들에 별그림들이 등장하지만 그 변천과정은 고구려와 크게 차이난다.
전한시기에 축조된 하남성 락양시 소구61호무덤의 공심전무덤 천정에는 해와 달을 량쪽끝에 두고 그 사이에 북두칠성, 오차, 귀수 등 10여종의 별자리가 그려져있다. 역시 전한 말기에 속하는 섬서성 서안교통대학 부근의 서한무덤에는 묘실 동벽천정에 28수별자리가 사신도와 여러 인물, 설화장면과 함께 그려져있다. 달그림의 왼쪽에 사람이 소를 끌고가는 장면은 견우설화를 반영한것이고 해의 오른쪽에 있는 주작도의 우에 두 사람이 상체만 있는듯한 사람을 들고가는 장면은 여귀의 모습으로, 사람이 토끼를 잡는듯한 장면은 뢰수의 모습으로, 바로 그 오른쪽에 몸체는 고양이이고 머리는 부엉이머리를 한듯한 동물은 자수의 모습으로 보인다.
후한(신나라)시기의 무덤벽화들가운데서 산서성 평륙 조원촌 후한(신나라)무덤벽화의 주실 천정에는 해와 달그림, 사신도와 함께 100여개의 별그림이 그려져있다. 이것들은 련결선도 없이 균일하게 분포된것으로 보아 별자리형식보다는 하늘을 형상한 장식적인 별그림성격이 강하다. 역시 신나라시기의것으로 추정되는 강소성 정태시 동양의 목곽무덤 천정에는 하고3성, 기수4성 등으로 추정되는 별자리가 해와 달그림사이에 새겨져있다. 후한시기에는 산동성 효당산 곽씨사 화상석무덤에 북두칠성과 직녀3성 등이 해와 달그림과 함께 묘사되여있고 산동성 남양의 후한화상석무덤에는 해와 달그림과 함께 청룡별자리, 백호별자리 등 다양한 별자리그림들이 묘사되여있다.
이처럼 한나라시기의 무덤에 그려진 별그림들은 천문이 신화, 전설과 밀접히 련관되면서 하늘을 형상하고있다. 다만 그 내용이 대체로 부분적이여서 전체 별자리의 모습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음 시기인 위진남북조시기와 수, 당나라시기로 넘어가면서 벽화속의 별자리묘사내용은 더욱 간소화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지금까지 위진남북조시기의 벽화무덤이 50기가량 발굴되였는데 그가운데서 별그림이 그려진것으로 9기정도이다. 그가운데서 료녕성 북표의 북연 풍소불무덤(415년)과 산동성 락양시의 북위 원예무덤(526년), 태원의 북제 루숙무덤(570년), 산동성 도귀무덤(571년) 등이 비교적 많은 별들을 형상한 천문벽화로 주목되며 나머지 무덤에는 매우 간단히 그려져있다.
북연 풍소불무덤의 아홉개의 돌판에 해와 달, 별그림이 그려져있지만 특정한 별자리가 확인되지 않고 별그림이 골고루 퍼져있기때문에 장식적인 성격이 강하며 북위 원예무덤의 천정에는 길다란 은하수를 가운데로 두고 300여개의 별이 일부 련결선과 더불어 표현되여 있는데 하늘의 별들을 장식적으로 뿌려놓은 바탕우에 별자리형태를 갖춘것이 30여개 포함되여있지만 그 별자리관계는 매우 무질서하며 고구려의 별자리들과 크게 차이난다.
또한 수, 당나라시기의 무덤벽화 36기가운데서 7기 가량에 별그림이 그려져있으나 투르판지역의 아사탑나38호무덤의 해와 달, 28수그림과 아사탑나76호무덤의 일부 별자리들을 내놓고는 거의 전부 무덤천정에 별을 뿌려놓아 그것이 하늘세계임을 표현하는 정도의 별장식들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중국의 화상석, 화상전, 무덤벽화들에 형상된 별그림은 한나라시기에 신화, 전설과 관련되여 일부 형상되던것이 위진남북조시기에 들어와서는 점차 간소화, 장식화되는 경향을 보이며 수, 당나라시기에는 더욱 간소화되면서 하늘을 표시하는 정도로 축소된다.
이것은 고구려무덤벽화 별그림변천이 중국지역의 무덤들에 있는 별그림들의 변천과정과 엄연히 차이난다는것을 잘 보여주고있다.
이와 같이 고구려의 천문학은 그 어떤 외부적인 영향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선민족의 고대국가인 고조선의 천문지식을 토대로 하여 발생하였으며 독자적인 관측체계와 규범밑에 자기의 고유한 로정을 따라 당시로서는 매우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여 후세 조선민족의 천문학발전의 귀감으로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