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고려시기 체육의 특징

 2018.2.5.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어떤 나라든지 그 나라가 강한가 약한가 하는것은 그 나라 인민들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얼마나 강한가 약한가 하는것과 많이 관련되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 인민이 강한가 그렇지 못한가 하는것은 결국 모든 사람들이 체육을 어떻게 하는가에 크게 달려 있습니다.》 (김일성전집》 제44권 1페지)

나라의 강대성은 인구수나 령토의 면적에 있는것이 아니라 그 나라 인민들의 육체적, 정신적준비와 관련되여있다. 사람들의 체력을 향상시키는 중요한 방도의 하나는 체육을 널리 하는것이다.

우리 나라에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좋은 체육종목들이 많다. 고려시기에도 우리 인민은 앞선 시기부터 전하여오는 체육을 계승하면서 새로운 체육종목들을 창조하고 발전시켜왔다.

고려시기 체육의 특징은 첫째로, 선행시기의 체육을 계승한것으로서 여러 체육종목들이 더욱 세련되고 발전한것이다.

삼국시기에는 자료의 제한으로 체육의 종목이나 알수 있는 정도였고 구체적인 내용과 방법을 알수 있는것은 얼마되지 않았다.

고려시기에는 문화가 발전하고 체육도 점차 발전하면서 상당한 수준에 올랐으며 내용도 어느 정도 알수 있게 되였다.

운동기구의 종류, 운동장의 규모, 해당한 운동계절과 시기, 운동종목의 내용 등을 잘 알수 있으며 그 발전면모를 찾아볼수 있다.

전반적으로 볼 때 고려시기의 운동내용은 삼국시기의 체육을 계승하고있었으나 더욱 발전하고 세련되였다.

고려시기에는 무술과 구기운동외에도 민속적인 운동, 륙상, 수영, 체육오락 등 다양한 체육들이 활발히 진행되였다.

고려시기 민속적인 운동으로서는 씨름, 그네뛰기, 연띄우기 등이다.

씨름은 14세기 중엽의 왕인 헌효왕때의 기록에서 찾아볼수 있다. 그는 씨름을 좋아하여 자주 왕궁안에서 내수(내시)들과 씨름을 하였으며 어느때는 호위하는 용사들을 데리고나가 씨름을 시키고 그를 구경하였다.

씨름은 우리 나라에서 오랜 력사적연원을 가진 독특한 민속경기종목의 하나였던것이다.

오랜 옛날부터 우리 나라 녀성들이 즐기던 민속적인 체육인 그네뛰기도 고려시기에 더욱 널리 진행되였다. 그네뛰기에 대한 기록이 이 시기부터 집중적으로 나오는것은 그것을 잘 말하여준다.

《고려사》에는 무신집권자 최충헌이 백정동궁별궁에서 추천(그네)놀이를 벌린 사실, 우왕이 거리를 순행하다가 수창궁에서 그네뛰기를 하였다는 기록 등이 전한다. 이것은 비록 통치배들의 놀음놀이에 대한것이지만 그네뛰기가 궁정에서까지 광범히 류행되였음을 알수 있게 한다.

12세기말~13세기 전반기의 문인이였던 리규보는 자기 시에서 녀성들이 그네뛰기를 하는 광경을 노래하였다.

물론 여러차례에 걸치는 그네뛰기에 대한 금지령이 있었지만 우리 녀성들은 그네뛰기를 전통적으로 즐겨놀았으며 그러한 민속적인 풍습은 봉건적인 박해와 구속밑에서도 없어지지 않고 계승되여왔다. 그네뛰기는 녀성들의 체력단련에 매우 적합한 운동으로서 민족적정서와 향취를 풍기는 귀중한 민족문화유산의 하나이다.

고려시기에는 민속적인 체육의 하나로서 연띄우기도 계속되였다.

오랜 연원을 가진 연띄우기는 고려시기에도 널리 진행해온 운동이였다.

《고려사》에는 13세기말에 궁노가 동리아이들의 연을 빼앗아다가 왕자에게 주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리규보의 《7월 초사흗날 바람을 두고》라는 시에서 연띄우기의 재미있는 형상을 찾아볼수 있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는 연을 띄우는 계절이 겨울부터 시작되여 정월대보름까지로 규정되다싶이 하였는데 고려시기에는 아직 민간에 그러한것이 제도화되여있지 않았던것 같았다. 그러므로 7월 3일에 연띄우는것을 보고 시까지 읊은것은 그날에 연띄우기를 한것이 개별적인 현상이 아니였다고 보인다. 당시에는 연띄우는 계절이 고정되지 않고 가을철부터 겨울동안 띄웠다고 짐작된다.

고려시기에는 민속적인 운동외에 수영도 발전되였다.

바다를 끼고있고 강하천이 많은 우리 나라에서 수영은 오랜 옛날부터 발전하여왔다.

고려시기에도 수영에 대한 자료가 적지 않은데 1165년에 례성강의 배사공과 어부들에게 수희를 시키고 왕과 그의 측근자들이 구경하며 상품을 차이있게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많은 수영선수들을 선발하여 경기를 시키고 등수에 따라 상품을 준것은 수영경기가 상당히 째이고 발전하였다는것을 보여주는것이다.

고려시기 대표적인 체육오락으로서는 바둑, 장기, 윷놀이, 쌍륙 등을 들수 있다.

그가운데서 장기만은 앞선 시기 기록에서 볼수 없었던것이다.

이처럼 고려시기에는 여러가지 민속적인 운동과 함께 륙상, 수영, 체육오락 등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체력향상과 지능발전에 이바지하는 체육들이 발전하였다.

고려시기 체육의 특징은 둘째로, 이 시기에도 앞선 시기와 같이 무술이 당시의 체육에서 기본으로 되였던것이다.

고려는 일찌기 동방의 대강국으로 위력을 떨친 고구려와 같은 나라를 건설하려는 리상을 내세우고 고구려의 옛땅을 되찾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투쟁하였다.

건국초기부터 고려는 서북지역개척사업을 힘있게 벌려 압록강계선까지 령역을 넓히였으며 서경(평양)을 서북지방의 정치, 경제, 군사적거점으로 꾸리는데 힘을 넣었다.

고려인민들은 건국이후 끊임없이 감행된 외래침략을 물리치는 싸움을 벌렸다. 근 30년에 걸치는 거란침략자들과의 싸움, 6차례에 걸치는 몽골침략자들과의 싸움, 일본해적인 왜구의 계속적인 침입과 북쪽으로부터 달려든 홍두적을 반대한 싸움들에서 고려인민은 나라의 독립을 튼튼히 지켜냈다.

이러한 나라의 정세는 인민들로 하여금 무술을 기본으로 한 체육에 힘쓰게 하였다.

무술이 당시의 기본체육의 하나로 된것은 력사적으로 내려오는 우리 인민의 애국주의정신과 상무적인 기풍의 구체적인 발현이기도 하였다.

고려시기에도 무술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것은 역시 활쏘기와 말타기였다.

인민들속에서 활과 화살을 잘 만들고 활쏘기기술을 련마한것은 물론 군대편제에서도 활을 기본으로 하는 경궁, 사궁, 정노, 강궁 등의 특수병제도가 있었고 활과 화살에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었다.

무술로서는 활쏘기와 말타기뿐만아니라 창쓰기와 칼쓰기도 역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고려인민들속에서 이러한 무술을 중요한 체육종목으로 여기고 부단히 훈련하고 숙련시켰기때문에 수십만의 침략군도 능히 쳐물리칠수 있었던것이다. 더우기 무능한 봉건통치배들은 외래침략에 겁을 먹고 섬으로 도망치거나 먼 남쪽지역으로 피난갈 때에도 인민들은 평소에 련마한 무술로서 침략자들을 맞받아나가 싸워이길수 있었던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시기에도 여러 체육운동가운데서 무술이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것으로 되였다. 그러므로 무술이 크게 장려되고 발전하게 되였다.

고려시기 체육의 특징은 셋째로, 구기운동이 상당히 발전한것이다.

그 대표적인것은 격구, 포구, 타구, 풀던지기 등이다.

발해에는 격구라는것이 있었고 격구를 타구라고 불렀다는것만 알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시기에는 격구장의 설치, 격구를 하는 시기, 계층, 제한조치 등 여러가지를 알수 있다.

고려에서는 건국초기부터 좋은 구정을 만들어 격구훈련에 힘썼다.

《고려사》에는 고려가 창건된 초기 이웃의 아자개가 사신을 시켜 투항하여왔으므로 구정에서 그를 성대하게 맞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고려가 성립되면서 인차 격구장을 만들고 거기에 무사들을 훈련시키며 격구를 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13세기에 출판된 《동국리상국집》에 의하면 격구장의 크기는 450보가량 되며 평탄하기가 숫돌과 같고 울타리를 둘렀는데 몇리에 달하였다고 하였다.

1209년에 당시의 무신집권자 최이가 격구장을 굉장하게 꾸렸다.

고려 초중기의 기록들에는 격구를 3월, 5월, 9월, 10월 등 계절이나 특별한 시기를 가리지 않고 많이 한것으로 되여있다. 그러나 고려말에는 5월초에 주로 진행하였다.

격구는 인민들과 문무관들, 지어는 녀자들도 하였으나 그가운데서도 군사들이 제일 많이 하였다.

고려시기에는 포구(일정한 구멍에 공을 던져넣는 운동)도 있었는데 당시 새롭게 류행하고있던 공던져넣기운동이였다. 실지로 공던져넣기는 오늘의 롱구와 비슷한 운동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고려시기에는 구기운동의 하나로서 타구가 새로 나왔다.

타구는 채로 공을 쳐서 일정한 구뎅이에 들어가게 하는 운동이다. 발해때에도 타구라는것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격구를 타구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려시기에 나온 타구는 격구와 다르다는것을 알수 있다.

《고려사》에 의하면 왕이 몰래 측근자들을 데리고 선홍사앞에 가서 타구를 하였으며 왕이 민천사에 가서 밀직사 원충에게 타구를 시키고 이를 구경하였다는것이다.

자료에는 왕이 몇몇 측근자를 데리고가서 타구를 한것과 한 사람에게 타구를 시키고 구경한 내용이 씌여있다. 조선봉건왕조시기 타구에 대하여 자세히 적은것을 보면 타구는 한두사람으로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놀수 있는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격구라면 인원구성에서 성립되기 어렵다. 한두사람의 측근자에게 격구를 시킬수도 없고 경기가 이루어질수도 없는것이다.

《고려사》에서 보는바와 같이 격구는 10여명이 참가하여야 경기가 성립되였다. 기록에 의하면 1149년에 왕이 날랜 기병 18명을 뽑아서 뒤마당에서 격구를 시키고 구경하였다고 하였다. 참가인원이 이 정도 되여야 격구를 잘할수 있고 경기가 성립될수 있었던것이다.

타구와 류사한 골프의 시원에 대하여 세계적으로 알려진것은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되였다는것이다.

처음에 스코틀랜드의 목동들이 방목지에서 장난으로 시작한것이 류행되여 널리 전파되면서 영국으로 건너가서 세계적으로 일반화되였다는것이다. 그런데 스코틀랜드에서 놀았다는것은 15세기로 알려져있다.

당시의 골프는 보잘것없는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14세기에 류행된 타구는 규칙이 엄밀하고 노는 방법도 현대골프와 류사한것이였다. 결국 우리 나라의 타구는 골프의 시원보다 썩 앞선 시기부터 있었던것이다.

구기운동으로서 풀던지기도 들수 있다. 《고려사》에는 《왕이 불복장에서 활을 쏘고 뭇아이들의 척초희를 구경하였다.》라고 기록되여있다. 척초희를 우리 말로 풀면 풀던지기이다. 자료를 통하여 알수 있는것은 풀던지기를 하였다는것과 그것을 왕이 구경하였다는것이다. 왕이 구경을 할 정도의 풀던지기이면 일정한 공형태로 만든 풀을 던지면서 간단한 규정이 있는 놀이를 하였을것이다.

이러한 구기운동이 우리 나라에서 오랜 연원을 가지게 된것은 격구와 같이 직접적으로 군사적의의가 있는 운동을 창안하고 보급하는 과정에 많은 구기운동족목들이 나오게 된 결과라고 볼수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말타기를 잘하고 또 말타기가 일찍부터 발전한 우리 나라에서 말타고 공을 치는 격구가 다른 구기종목보다 먼저 발전하였을것이라고 짐작할수 있다.

또한 구기운동이 우리 나라에서 일찍부터 발전한것은 우리 인민이 예로부터 차거나 치기, 받거나 던지는 구기운동을 그 어느 운동보다도 매우 좋아하였으며 사랑하였기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인민은 이 땅우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창조적인 활동을 시작한 때로부터 체육활동을 끊임없이 벌려왔으며 그 과정에 풍부하고 자랑스러운 체육유산을 창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