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조선근대부르죠아계몽사상의 특징

 2018.2.7.

조선근대부르죠아계몽사상의 특징을 밝히는 문제는 조선근대사회발전의 합법칙성을 철학사적으로 해명하고 조선근대력사를 심히 외곡하고있는 일제와 대국주의자들의 력사외곡책동에 학술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나서는 중요한 문제이다.

조선근대부르죠아계몽사상의 특징이 정확히 해명되여야 조선에서도 근대부르죠아계몽사상이 당시 조선사회발전의 요구로부터 합법칙적으로 발생하였다는것과 일제의 조선강점이 조선사회발전에 얼마나 큰 지장을 주었는가를 과학적으로 까밝힐수 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19세기 후반기 우리 나라에서는 개화사상이 발생발전하고 그에 토대하여 부르죠아개혁운동이 벌어졌는데 갑신정변은 이러한 우리 나라 력사발전의 산물이였습니다.》 (김정일전집》 제7권 164페지)

조선근대부르죠아계몽사상의 특징은 무엇보다먼저 조선에 대한 외세의 침략과 간섭, 특히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는 반침략애국사상을 기본내용으로 하고있는것이다.

원래 근대부르죠아계몽사상은 봉건사회말기 자본주의적관계가 발생발전하면서 력사무대에 새로 등장한 신흥부르죠아지들의 요구와 리해관계를 반영하여나온 사상이다. 당시 신흥부르죠아지들은 자본주의적방법으로 많은 재부를 축적하고 그에 의거하여 사회경제생활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지만 신분이 천한것으로 하여 봉건통치배들에게 인신적으로 예속되여있었으며 봉건적인 착취와 억압의 대상으로 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신흥부르죠아지들은 인민대중의 반봉건투쟁에 편승하여 봉건적인 신분적예속에서 벗어나 사회의 정치적지배권을 차지하려고 하였다. 이로부터 이들은 개성의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구호를 들고 봉건제도의 청산과 부르죠아제도의 수립을 주장하였다. 세계대다수나라들에서 발생한 근대부르죠아계몽사상은 신흥부르죠아지들의 이러한 계급적요구와 리해관계를 반영하여 나온 사상으로서 반봉건부르죠아개혁사상을 기본내용으로 하고있다.

그러나 조선근대부르죠아계몽사상은 이러한 반봉건부르죠아개혁사상과 함께 반침략애국사상을 기본내용으로 하고있다. 일부 나라들에서 반봉건투쟁이 민족해방투쟁과 결부되여 진행됨으로써 근대부르죠아계몽사상에 반침략사상이 반영되기도 하였으나 이 경우에도 반침략사상은 매우 부차적으로 언급되였으며 기본내용으로는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근대부르죠아계몽사상은 반봉건부르죠아개혁사상과 함께 반침략애국사상을 기본내용으로 하고있다. 이처럼 반침략애국사상을 기본내용으로 하고있는 여기에 조선근대부르죠아계몽사상의 고유한 특징이 있다.

조선근대부르죠아계몽사상이 반침략애국사상을 기본내용으로 하고있다는것은 우선 조선의 첫 부르죠아계몽사상의 대표자들인 개화사상가들이 부르죠아개혁을 준비하면서 《자수자강》, 《부국강병》의 구호를 제기한데서 찾아볼수 있다. 개화사상의 대표자 김옥균은 《제반사태는 부득불 한차례의 사변을 일으켜 정치개혁을 수행한 연후에야 국가가 민생을 구할수 있고 나라를 보존할수 있게 되였다. …여기에 있어서 첫째가는것은 독립국가로 만드는것이다. 독립하자면 정치외교에서 불가불 자수자강하여야 한다.》(《조선학보》 17집 124-125페지)고 하였으며 개화사상가의 한사람인 김홍집도 《자강이란 비단 부강하게 된다는것뿐아니라 자강하여 우리의 정치를 옳게 다스리며 우리 민족을 보호하고 밖으로부터의 침략에 맞선다는것이다. 이것이 실로 자강의 첫째가는 임무이다.》(《수신사》김홍집일기) 고 하였다. 또 개화사상가들이 주관하던 《독립신문》에는 《우리 나라 사람들은 나라가 약해지고 수치되고 나라의 권리를 타국사람이 가져가는것도 모르고 일신의 편안만을 찾으니 이것은 짐승만도 못하다. 우리가 힘써야 문명개화의 부국강병이 될텐데 가만히 있으니 나라의 부강이 되겠느냐. 오늘부터 백성들이 힘을 합해 독립을 영원토록 해야 후생들이 떳떳한 나라의 백성노릇을 할수 있다.》(《독립신문》) 고 씌여있다.

조선근대부르죠아계몽사상이 반침략애국사상을 기본내용으로 하고있다는것은 또한 부르죠아개혁을 준비하면서 조선에 대한 자본주의렬강들의 침략야망을 폭로하고 그에 대처하여 나라의 방위력을 강화할것을 적극 주장한데서 찾아볼수 있다.

이에 대하여 김옥균은 《지금 천하의 대세를 살펴보건대 멀리로는 서양제국의 동양정책이 호시탐탐한 눈으로 서로 엿보는바 우선 나뽈레옹 1세 이래로 동양침략에 착수한 프랑스는 나뽈레옹 3세때에 벌써 안남교지에 세력을 부식하고 이제 다시 청프전쟁을 야기하였는바 이 전쟁에서 프랑스가 청국을 굴복시킨 다음에는 그 발길이 장차 우리 조선에까지 미치게 될것은 지난 병인년의 전례를 보더라도 다시 의심할 여지가 없을것이오니 그리된다면 목하 피페한 국력으로서 장차 어찌 수응할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로씨야의 극동진출이 날로 절박한 형편에 있으니 이를 장차 어떠한 술책으로 방비하리오. 그리고 가까이로는 일청의 사이가 점점 불화하여 지금 일본에서는 군비확장에 분망하고있는 형편인즉 이것이 청일전쟁을 준비하고있는것임을 다시 의심할 여지가 없을뿐아니라 최근 일본의 정책이 일변하는것을 보면 가히 청일전쟁이 멀지 않은것을 짐작할수 있는바 그때 우리 조선땅이 전쟁터로 되고말것인즉 이를 장차 어찌하리오.》(《갑신일록》 12월 5일) 라고 하였다. 이것은 김옥균이 당시 조선에 대한 외세의 침략책동을 정당하게 폭로하고 이에 대처하여 나라의 방위력을 강화할것을 절절하게 호소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조선근대부르죠아계몽사상이 반침략애국사상을 기본내용으로 하고있다는것은 또한 자본주의렬강들의 경제적략탈로부터 나라의 자연부원을 보호하며 민족부흥을 목적으로 문명개화를 이룩할것을 적극 주장한데서 찾아볼수 있다.

김옥균은 《우리 나라의 인구가 2천만이 넘고 물산과 같은것은 우수하고 정밀한것은 없다하더라도 자연부원에서는 일본이나 중국의 북부에 비하여 저으기 우세한것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중요광물매장량은 수없이 많으니 이와 같은 풍부한 자원을 타국에 넘겨주자고 하는것은 참으로 원통함을 금할수 없다.》(《고종에게 보낸 편지》)고 하면서 나라의 자연부원을 보호할것을 주장하였으며 《문명개화는 서양사람들만이 할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 나라의 왕과 신하들도 시기를 살피고 정세를 헤아려 신중하게 연구하며 계획이 선후에 행동하고 시기가 이른뒤에 실천하며 그릇된 리론에 흔들리지 않고 외국인들의 속임수에 빠지지 않는다면 우리도 역시 화륜선을 배로, 철도를 수레로 삼을수 있으며 지방에는 전선을, 거리에는 가스등을 개설할수 있고 부하고 싶으면 부하고 강하고 싶으면 강할수 있으니 이로부터 나아가서는 다른 나라와 첫 자리를 경쟁할수 있을것이며 자기 나라를 지킬수 있을것이다.》(《한성순보》 1883년 10월 21일)고 하면서 문명개화에 떨쳐나설것을 열렬히 호소하였다.

이와 같은 력사적사실들은 조선근대부르죠아계몽사상이 반침략애국사상을 기본내용으로 하고있다는것을 뚜렷히 보여준다.

조선근대부르죠아계몽사상이 반침략애국사상을 기본내용으로 하게 된것은 우선 외세의 침략으로 하여 조선에서의 부르죠아개혁운동이 심한 난관에 직면한것과 관련된다.

18세기부터 조선에서도 자본주의적관계가 발생발전하기 시작하였으며 19세기후반기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하나의 사회경제형태를 이루었다.

이러한 사회적배경속에서 인민들의 반봉건투쟁이 세차게 일어나고 나라의 근대화를 실현하기 위한 부르죠아개혁운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력사적시기에 미일침략자들을 비롯한 자본주의렬강들이 조선에 침략의 마수를 뻗치기 시작하였다. 외세의 침략은 조선인민에게 커다란 불행을 강요하였을뿐아니라 사회의 근대적발전에도 엄중한 난관을 조성하였다. 외래자본과 상품이 물밀듯이 쓸어들고 풍부한 지하자원과 많은 경제적리권들이 외세의 수중에 넘어갔다.

이것은 1875년 일본과의 상품거래액이 1만 8천800여원에 불과하던것이 1894년에는 569만 7천여원에 달한 사실, 1894~1896년사이에 한성-인천철도부설권, 한성전차 및 전동차부설권, 운산금광채굴권 등의 리권이 미제의 손에 넘어간 사실만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특히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일제의 책동이 로골화됨에 따라 조선에서의 근대화실현과정은 더욱 심한 난관에 부닥치게 되였으며 마지막에는 그 길이 완전히 차단되였다.

일제는 조선의 민족경제를 제놈들에게 종속된 식민지경제로 만들기 위해 수많은 악법들을 조작하고 조선의 민족경제의 명맥을 완전히 틀어쥐였으며 온갖 사기와 협잡, 법적강제를 동원하여 조선인기업들을 파산시켰다. 실례로 일제는 담배제조업에서 조선인경영이 점차 확대되고 상업계에서 그의 신용이 높아져 일본담배와 경쟁하게 되자 경찰을 동원하여 평양조선인담배공장에서 생산된 담배가 위생상 《해롭다》고 하면서 그의 판매를 금지시켜 파산시켰으며 경성성냥공장에서 생산된 성냥을 모두 《사들여》가지고 그것을 물에 적셨다가 말리워 불이 잘 일지 않게 하여 재판매함으로써 그의 신용을 떨구어 결국은 파산에로 몰아갔다. 이외에도 일제는 《계약》의 고의적인 파괴와 불량원료의 공급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양주, 비누 및 철공장을 경영하던 조선인기업들을 파산시켰다.

일제는 조선인기업들을 파산시키는 한편 조선의 화페제도를 거세하고 식민지화페제도를 세움으로써 조선인기업들에 축적되여있던 보잘것없는 자본마저 대대적으로 수탈하여 조선인자본의 증대를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다.

일제의 악랄한 민족산업말살책동으로 하여 조선의 민족경제는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된지 얼마 되지 않아 완전히 파산되였으며 조선의 신흥부르죠아지들은 확대재생산은 고사하고 단순재생산마저 제대로 할수 없는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되였다.

이러한 현실은 조선의 신흥부르죠아지들과 그 사상적대변자들로 하여금 일제의 침략을 물리치지 않고서는 저들의 계급적요구도 실현할수 없다는것을 절실히 느끼게 하였으며 이로부터 조선근대계몽사상에는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는 반침략애국사상이 중요하게 반영되게 되였다.

조선근대부르죠아계몽사상이 반침략애국사상을 기본내용으로 하게 된것은 또한 조선민족이 력사적으로 애국심이 강한 민족으로서 애국주의가 우리 민족의 우수한 민족성으로 형성되여있은 사정과도 관련되다.

예로부터 조선민족은 단일민족으로서 이 땅우에서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우며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창조하여왔다. 특히 조선인민은 외래침략자들이 쳐들어올 때마다 용감하게 일떠서 침략자들을 징벌하였으며 민족의 자주권을 영예롭게 수호하였다.

이 과정에 조선민족은 남달리 애국심이 강한 민족으로 되였으며 이런 애국심은 조선민족의 훌륭한 민족성으로 형성되고 공고화되였다.

19세기후반기에 들어와 봉건통치배들의 부패한 정치로 하여 국력이 심히 쇠약해지고 이를 기회로 미제와 일제를 비롯한 자본주의렬강들의 침략이 강화될 때에도 조선인민은 외세의 침략을 반대하여 굴함없이 투쟁하였다. 1882년의 임오군인폭동, 1884년의 갑오농민전쟁, 그 이후 계속된 의병투쟁, 독립군운동, 애국문화운동 등은 이 시기 조선인민이 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얼마나 견결히 투쟁하였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런 시대적환경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민족시장을 보호하려는 신흥부르죠아지들의 리해관계와도 일치하였다.

이로부터 조선근대부르죠아계몽사상은 반침략애국사상을 기본내용으로 하게 되였다.

조선근대부르죠아계몽사상의 특징은 다음으로 반봉건부르죠아개혁사상을 제기함에 있어서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세계관적문제는 차요시되고 봉건제도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사상이 강한것이다. 초기 부르죠아계몽사상인 개화사상을 보더라도 세계관적문제는 언급되지 않고있으며 대신 봉건제도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사상이 기본내용으로 되고있다.

봉건제도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사상은 개화사상가들이 봉건적인 신분제도, 문벌제도를 신랄히 비판한데서 찾아볼수 있다.

김옥균은 《우리 나라는 원래 중고이전에는 나라가 륭성하여 일체 기계물산이 동양3국에서 으뜸이였는데 오늘은 그것이 다 없어지고 흔적조차 찾아볼수 없게 되였다. 이것은 량반들의 전횡에 의하여 그렇게 된것이다. 인민들이 한가지 물건을 만들면 량반관리가 이것을 빼앗아가기때문에 인민들은 자기 힘으로 먹고 살려고 해도 량반들이 그 리익을 빼앗아갈뿐아니라 심한 경우에는 귀중한 생명까지 잃어버릴 념려가 있으니 차라리 농업, 상업, 공업을 다 버리고 위험을 벗어나는것만 못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되여 일하지 않는 백성이 전국에 충만되고 국력은 쇠약해져 오늘의 지경에 이르렀다. 방금 세계가 상업을 위주로 하여 산업의 많음을 경쟁하고있는 때에 량반들을 제거하여 그 페단의 근원을 없애지 아니하면 나라의 멸망을 가져올뿐이다. 속히 이 무식하고 무능하며 보수적이고 완고한 량반대신들을 축출하고 문벌을 페지하며 인재를 선발하여 중앙집권의 기틀을 확정할것이다.》(《고종에게 보낸 편지》)라고 하였다.

이처럼 개화사상가들은 봉건적인 신분제도를 백성들의 생활령락과 국력쇠퇴의 기본원인으로 락인하고 신랄히 비판하였으며 그의 철페를 주장하였다.

봉건제도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사상은 개화사상가들이 신분제도와 함께 문벌제도를 날카롭게 비판한데서도 찾아볼수 있다.

문벌제도는 봉건사회에서 왕의 친척이나 권세있는 량반들이 서로 결탁하여 하나의 집안을 형성하고 저들의 비위에 맞게 나라의 정치를 좌우지하는 반동적인 정치제도이다. 문벌제도에 의하여 국가권력이 특정한 개인들의 수중에 집중되고 나라의 정치가 오직 그들의 요구실현에 복종되였다. 문벌정치는 특히 19세기 후반기 나라의 권력을 틀어쥔 명성황후일당(수구파)에 의하여 절정에 이르렀다. 명성황후일당은 나라의 정사를 오직 저들의 리익과 요구실현에 복종시켰으며 일신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나라와 민족의 리익도 서슴없이 팔아먹는 매국배족행위를 꺼리낌없이 감행하였다. 김옥균은 문벌제도의 페해에 대해 《우리 나라에서 민가성을 가진자는 똑똑한 사람인가 똑똑하지 못한 사람인가를 불문하고 모두 이를 중히 여겨 국가의 팔, 다리로 삼은지 2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으나 명성황후일족으로서 능히 인민에게 윤택을 미칠만한 정사를 하며 국가를 부강하게 할만한 의견을 건의한 자가 과연 몇명이나 되는가? 그 다수는 국가를 팔아먹는 죄인으로, 혹은 만청정부의 힘을 빌어 우리 국권을 멸시유린코저 하는 자들이다.》(《고종에게 보낸 편지》)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조선근대부르죠아계몽사상이 다른 나라의 부르죠아계몽사상들과는 달리 세기관적문제보다 봉건제도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사상이 강하다는것을 뚜렷이 보여주고있다.

조선근대부르죠아계몽사상이 이러한 특징을 띠게 된것은 우선 당시 조선의 현실이 다른 나라들과 다른것과 관련된다.

대표적으로 유럽의 계몽주의사상을 들수 있다. 중세 유럽의 봉건사회에서는 교회의 권위와 영향력이 매우 강하였다. 사람들의 사상정신생활이 철저히 그리스도교리에 따라 조직되고 진행되였으며 교육, 과학을 비롯한 지적활동분야는 전적으로 승려, 신학자들이 장악하고있었다. 그리하여 다른 모든 과학분야들은 신학의 한 부분으로 전락되여 신학의 원칙, 교회의 교리를 절대적으로 옹호하고 집행하도록 하는데 복무하였다. 교회의 권한이 매우 강하여 국가권력을 압도하였으며 교리에 의하여 사회생활이 진행되였다.

이런 환경에서 유럽의 계몽주의사상가들은 종교를 반대하지 않고서는 중세의 깊은 잠에 빠진 대중을 각성시킬수 없고 저들의 계급적요구도 실현할수 없다는것을 깨닫게 되였으며 이로부터 종교를 반대하는데 투쟁의 예봉을 돌리게 되였다. 이것은 유럽의 계몽주의자들로 하여금 세계의 일반적특징을 해명하는데 주되는 관심을 돌리게 한 원인으로 되였다. 왜냐하면 종교가 초자연적인 《신》을 내세우고 《신》에 의한 세계의 창조설을 주장하면서 이를 세계관적기초로 하여 종교교리를 합리화하였기때문이였다. 따라서 종교를 비판하자면 《신》을 부정하여야 하고 《신》을 부정하자면 부득불 자연에서 《신》을 추방하여야 했으므로 세계의 일반적특징을 해명하는데 주되는 힘을 넣게 되였다.

이로부터 유럽의 계몽주의사상가들은 신학으로부터 과학의 해방을 주장하면서 세계의 일반적특징을 해명하는데 주되는 관심을 돌리였다.

이와는 달리 조선에서는 종교교리에 따라 국가관리와 사람들의 생활이 진행된것이 아니라 종교가 지배계급의 요구에 따라 봉건사회를 합리화하고 사람들을 봉건통치에 순응시키기 위한 사상적도구로 리용되였다.

이와 함께 조선봉건사회는 다른 나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봉건적중앙집권제가 강하였다. 봉건적중앙집권제의 강화는 사회발전과 사람들의 운명개척에서 정치제도를 비롯한 사회제도가 미치는 역할을 비상히 증대시킴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세계에 대한 일반적견해보다 사회제도에 대하여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도록 하였다.

조선근대부르죠아계몽사상이 이러한 특징을 띠게 된것은 또한 외세, 특히 일제의 침략으로 다른 나라에 비하여 사회계급적 및 민족적모순이 극도로 첨예화된것과도 관련된다.

외세의 침략은 조선에서 외세와 조선민족사이의 민족적모순이 극도에 이르게 하였으며 외세에 아부하는 봉건통치배들에 대한 인민들의 분노를 무섭게 폭발시켰다. 이러한 시대적환경은 사회계급적 및 민족적모순을 해결하는것이 초미의 문제로 제기되게 하였으며 이것 역시 세계의 일반적특징에 대한 해명보다 사회적문제에 보다 큰 관심을 가지게 한 중요한 요인으로 되였다. 이로하여 조선의 근대부르죠아계몽사상은 세계의 일반적특징에 대한 해명보다 봉건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사상이 강하게 되였으며 이를 자기의 고유한 특징으로 하게 되였다. 조선근대부르죠아계몽사상의 이러한 특징은 조선에서 근대부르죠아계몽사상이 당시 조선의 사회발전의 합법칙적요구를 반영하여 필연적으로 발생하였다는것을 립증하여주며 조선근대력사를 외곡하는 일제와 대국주의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비렬하고 허황한것인가를 똑똑히 보여주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