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 봉건통치배들과 사대주의자들에 의하여 우리 나라 력사가 외곡된것이 적지 않습니다.》
뜨거운 조국애와 민족애를 지니신
그가운데는
당시 평양의 모란봉에는 사대주의자들에 의하여 조작된 《기자묘》가 있었다. 그런데 모란봉일대를 우리 인민의 문화휴식터로 꾸리면서 그에 대한 처리문제를 놓고 심각한 론의를 하면서도 매듭을 짓지 못하고있었다.
이러한 실태를 보고받으신
건설정형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료해하시던
사실 그때까지 일부 사대주의사상에 물젖어있던 사람들중에는 《기자묘》를 조상의 무덤으로 여기면서 그것을 우리의 력사유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시면서 그것은 기자의 실지 무덤도 아니기때문에 파보면 아무것도 없을것이라고 하시였다.
기자가 조선에 와서 나라를 세웠다는 설은 기자가 살던 때로부터 천년이나 지난 B.C. 2세기초에 날조한것이였다. 원래 《기자》란 은나라의 제후국인 《기》나라 통치자의 직위를 말하는것이며 이름은 아니다. 그는 종주국인 은나라가 멸망한 후에는 주나라 《서주》왕실에 등용되여 그곳에서 살다가 죽었다. 그가 주나라에서 살기 싫어 조선으로 넘어왔다는 설은 꾸며낸 거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로부터 다시 천여년이 지난 12세기초에 와서 사대주의사가들은 마치 조선은 기자에 의하여 생겨나고 발전되여온듯이 력사를 외곡하였으며 모란봉에 《기자묘》라는것까지 만들어놓고 그를 숭상하였던것이다.
《기자묘》를 파려고 하던 날 아침 전화를 걸어오시여 청년들을 동원하여 와닥닥 하려고 한다는 보고를 들으신
다음날 《기자묘》앞에서 로인잔치를 크게 차렸는데 여기에는 평양시의 여러 구역에서 오래 산 로인들이 200여명 모여왔다.
그들은 《기자묘》가 진짜인가 가짜인가에 대한 론쟁을 벌리였는데 기자의 무덤이라고 인정할만한것이 나온다면 다시 묘를 수복하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파헤쳐버리자는 합의가 나왔다.
그리하여 긴장한 분위기속에서 《기자묘》를 파기 시작하였는데 깊이 파들어가도 《기자묘》라는것을 증명할만한것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사흘만에 나온것은 몇개의 벽돌쪼각과 사기쪼각뿐이였는데 그것은 조선봉건왕조말기에 평양감사가 《기자묘》를 수복한다고 하면서 넣은 조선봉건왕조시기의것이였다.
마침내 《기자묘》가 허위라는것이 많은 사람들앞에서 명백히 증명되였다.
《기자묘》가 진짜라고 믿고있던 로인들은 여직껏 속은것이 분한 일이라고 하면서 큰 나라를 숭배하던 사대주의사상을 죽기 전에 버리게 되였으니 로인잔치에 왔던 보람이 크다고 하였다.
그날저녁 그에 대한 보고를 받으신
진정 민족의 넋을 살려주시고 유구한 민족사와 찬란한 문화를 길이 빛내여주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