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당의 품속에서 참된 삶을 빛내인 작가 박태원

 2023.4.26.

작가 박태원의 력사소설창작은 현대조선력사소설문학발전에서 한자리를 차지한다.

소설가 박태원(1909. 12. 7-1986. 6. 10. 필명 구보)은 일제식민지통치시기부터 1980년대 전반기까지 창작활동을 벌린 작가이다. 박태원의 창작활동은 그의 세계관발전의 특성으로 하여 두 시기로 갈라진다.

해방전부터 시작하여 조국해방전쟁초기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기기 전까지 박태원은 옳은 세계관과 미학관을 확립하지 못한것으로 하여 낡은 문예사조에 물젖어 창작생활에서 곡절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는 이 시기 《순수문학》의 길에서 헤매였는데 이것은 그가 태여나서 성장한 가정적환경과 일제식민지통치하의 가혹한 현실의 영향과 관련되여있다.

경성에서 출생하여 경성제1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20살때 도꾜법정대학을 다니던중 작가가 될 결심으로 대학을 그만둔 박태원은 부모들에 대한 효도와 인정륜리도덕에로 지향된 가정교양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는데 그가 어려서 쓴 글들에는 순수 세태적인 생활을 그리려는 싹이 나타나있었다고 한다. 그가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한 시와 평론들을 보고 사람들은 《생활세태속에 잠긴 글》이라고 평가하였다.

이와 함께 박태원은 1930년대에 들어와 반일적이며 진보적인것을 모조리 말살하려는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가혹해진 속에서 문단에 나타난 《순수문학》의 영향을 받으며 창작활동을 벌려나갔다.

순수문학운동은 《9인회》(九人會)가 중심이 되여 벌어졌는데 여기에 망라된 작가들은 각이한 주의주장을 가진 인물들로서 대체로 순수문학적립장에 서서 문장과 문체를 중시하는데로 기울어졌다.

박태원이 9인회에 들어간것은 《순연한 연구의 립장에서 상호의 작품을 비판하며 다독다작》한다는 이 조직의 목적이 자기의 뜻에 맞았기때문이였다. 이때부터 박태원은 일제식민지통치의 불합리한 사회현실과는 동떨어진 인정세태생활에 대한 탐구와 형상에로 창작을 지향시켜나갔다.

이러한 그의 립장과 자세는 위대한 수령님에 의하여 조국의 해방이 이룩된 새로운 력사적현실속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우리 민족에게 온갖 고통을 들씌우는 미제에 대한 증오심을 안고 장편소설 《략탈자》(1945년), 《금은탑》(1949년), 장편력사소설들인 《홍길동전》(1947년), 《리순신장군》(1948년)을 창작하였다.

박태원의 참다운 삶과 창작생활은 그가 조국해방전쟁시기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긴 때로부터 시작되였다.

조국해방전쟁에서 발휘되는 우리 인민의 영웅적투쟁을 목격하면서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된 그는 군복을 입고 종군작가로 활동하면서 중편소설 《조국의 기발》, 《조국의 품》과 같은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그는 작품들에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강도 일제를 때려부시고 찾아주신 조국을 미제와 리승만괴뢰도당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하여 무비의 헌신성과 희생성을 발휘하는 주인공들의 형상을 통하여 인민들과 인민군군인들의 조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진실하게 그려내였다.

이것은 그의 세계관의 변화와 발전을 뚜렷이 보여주는것으로서 드디여 박태원은 오랜 기간 물젖어있던 낡은 문예사조에서 벗어나 인생행로에서나 창작생활에서 근본적인 변화발전을 가져왔다.

전쟁이 우리 인민의 승리로 끝난 후 그는 조선중앙방송위원회에서 방송극을 주로 창작하였으며 평양문학대학에서(당시) 작가후비를 키워내는 교육사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박태원은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긴 이후 해방전부터 품고있던 력사소설창작에 대한 꿈을 실현하는데 있는 재능을 깡그리 쏟아부었다.

박태원이 력사소설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한것은 일제식민지통치시기부터였다. 그는 홍명희선생이 쓴 장편력사소설 《림꺽정》을 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으며 자기도 력사소설을 쓸 결심을 가지게 되였다고 한다.

력대 농민폭동지도자들가운데서 전봉준, 력대 명장들중에서 리순신장군, 력대 왕들가운데서 세종을 형상할 구상을 한 그는 력사소설창작을 본격적으로 벌릴 결심밑에 력사연구에 달라붙었다.

력사소설가의 실력에서 무엇보다 중요한것이 력사지식이라는것을 자각한 그는 10년간을 사회과학원 력사학연구소, 중앙도서관(당시),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당시)을 비롯한 력사박물관과 학술연구기관들, 모란봉과 대성산, 개성과 해주, 구월산의 력사유적들을 발이 닳도록 찾아다녔으며 당시 이름난 력사학자들이였던 홍기문, 김석형, 박시형선생들과 교우관계를 맺고 력사학계에서 론의되는 문제들에 대한 깊이있는 견해를 나누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고종실록》, 《전주부사》, 《량호초토호등록》, 《동학사》, 《지리지》 등 방대한 문헌과 자료들을 연구하였다.

박태원은 생활에 대한 연구도 깊이있게 진행하였다. 도시에서 주로 생활해온탓에 농촌생활에 어두웠던 그는 자기가 써야 할 소설이 농촌을 무대로 한다는데로부터 안해와 함께 주변농촌으로 다니며 농촌생활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는 소설의 무대로 되는 전라도의 지리와 지형, 지명에 대한 연구도 깊이있게 진행하였다.

이와 같은 준비에 기초하여 먼저 전봉준과 갑오농민전쟁을 형상한 작품을 창작할 결심을 한 박태원은 갑오농민전쟁전야의 력사적현실과 그 전쟁에 참가한 인물들의 대군상을 형상하는 전 16권으로 된 방대한 창작계획을 세웠다. 불타는 열정을 안고 창작전투에 들어간 박태원은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 제1권(1965년)과 제2권(1966년)을 단숨에 써냈다.

그러던 박태원이 방대한 창작계획을 바꾸게 된것은 지난날의 계급투쟁을 반영한 력사소설창작에 대하여 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받아안게 된것과 관련된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주체58(1969)년 12월 5일에 발표하신 불후의 고전적로작 《청소년들에 대한 공산주의적교육교양의 몇가지 문제》에서 력사소설창작과 관련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옛날의 계급투쟁을 취급한 소설도 쓸수 있습니다. 옛날이라고 하여 계급투쟁이 없은것은 결코 아닙니다. 노예사회나 봉건사회에서도 계급투쟁의 형식이 오늘과 다를뿐이지 노예주와 노예, 봉건령주와 농노사이의 투쟁이 있었습니다. 이런 계급투쟁들도 소설로 잘 그릴 필요가 있습니다.》 (김일성전집》 제44권 187페지)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로작에서 어느 농민전쟁을 주제로 한 작품을 쓴다면 력사를 쓰듯 사실을 그저 라렬할것이 아니라 어떤 전형적인 개별적사람들의 투쟁을 통하여 그때 사회의 농민전쟁전반과 계급투쟁의 전모를 보여줄수 있게 그릴수 있을것이라고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이 가르치심은 력사주제문학창작의 목적과 방향을 밝혀주는 강령적지침이였다. 력사소설은 과거의 력사에 대한 예술적형상을 통하여 대중의 계급의식을 높여 그들이 계급투쟁을 잘하고 우리 혁명을 잘해나가는데 이바지하여야 한다.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깊이 되새기는 과정에 작가는 이미 쓰고있던 소설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의 창작을 그만두고 《갑오농민전쟁》이라는 제목으로 된 3부작 장편력사소설을 창작하기로 결심하였다. 그가 같은 소재를 가지고 주제사상, 인물형상, 구성조직, 생활묘사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소설을 창작할 용단을 내리게 된것은 농민전쟁의 인민사적의의를 새롭게 밝혀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작품에 그대로 구현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박태원이 장편력사소설 《갑오농민전쟁》과 같은 걸작으로 창작생활의 마무리를 빛나게 할수 있은것은 위대한 수령님위대한 장군님의 지도와 크나큰 사랑과 보살피심이 있었기때문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소설의 제1부를 보아주시고 잘 썼다고 높이 평가해주시면서 소설을 쓴 작가가 력사에 대하여 많이 알고있는것 같은데 력사소설을 쓰는 작가가 귀하다고, 력사소설을 주체적립장에 튼튼히 서서 많이 쓰도록 하여야 한다고 가르치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그의 창작조건과 생활조건을 깊이 료해하시고 직장생활을 하던 안해가 전적으로 남편의 창작을 도와주도록 하는 은정깊은 조치도 취해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66(1977)년 4월 작가가 실명한 상태에서도 《갑오농민전쟁》 제1부를 완성하였을 때 그에게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하도록 하여주시고 음악을 사랑하는 그의 취미를 헤아려 전축을 선물로 보내주시였으며 그가 생일 70돐을 맞을 때에도 국기훈장 제1급의 높은 국가수훈을 받도록 해주시고 중앙인민위원회(당시)정령을 당보에도 내고 중앙방송으로도 소개하도록 해주시였다. 그리고 그가 고혈압으로 쓰러졌을 때에는 희귀한 약재를 보내주시여 작가의 생명을 구원해주시였으며 작가의 창작활동을 소개한 기사를 로동신문에 내도록 해주시는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이렇게 되여 《로동신문》 1986년 8월 26일부에는 기사 《이런 사람이 바로 당원작가이다》가 실리게 되였다.

작가 박태원이 돌아간 후 위대한 수령님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시여 그를 신미리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하시였다.

정녕 크나큰 믿음과 뜨거운 사랑으로 실명한 작가에게 심장의 눈을 주시고 운신못하는 작가에게 철의 의지를 안겨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위대한 장군님의 사랑과 믿음은 작가가 병상에서도 장편력사소설 《갑오농민전쟁》을 완성하여 세상에 내놓을수 있게 한 힘의 근본원천이였다.

작가 박태원의 창작활동은 강의한 의지와 불굴의 정신력의 발현과정이였다. 조선문학사나 세계문학사의 어느 갈피에도 작가 박태원처럼 완전실명과 전신불수의 상태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비상한 의지와 불굴의 정신력으로 소설을 창작한 작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1970년 여름에는 완전실명을 당하고 1976년말에는 두번째 뇌출혈로 전신불수에 언어장애까지 오게 된 상태에서 남들은 시인도 아니고 여느 소설도 아닌 력사소설을 쓰는 작가로서의 박태원의 존재가 끝났다고 생각하던 그때 그는 자신의 나약성과 동요를 불굴의 정신력으로 이겨내면서 소설의 한줄한줄을 잉크로가 아니라 심장의 붉은 피로 써나갔다.

위대한 수령님위대한 장군님의 크나큰 사랑과 믿음에 기어이 보답해야 한다는 자각과 수령님께서 종자까지 잡아주신 소설을 기어이 써야 한다는 숭고한 작가적사명감은 그로 하여금 그 어떤 역경에서도 흔들림없는 견인불발의 의지와 불굴의 정신력을 낳게 하였고 《갑오농민전쟁》이라는 걸작을 세상에 내놓을수 있었던것이다.

작가 박태원의 한생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당의 따뜻한 품속에서만 참된 삶을 누릴수 있으며 자기의 재능도 활짝 꽃피울수 있다는 진리를 다시금 되새겨주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