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행주산성싸움과 행주치마의 유래

 2018.6.28.

오늘에 이르는 인류의 발전과정에는 수많은 유래들이 전해져오고있다.

그 많은 유래들중에는 행주산성싸움에서 일본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싸운 우리 인민들, 조선녀성들의 애국심을 전하여주는 행주치마와 관련한 유래도 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행주산성녀성들의 그 짧은 애국치마들은 후날 조선의 모든 가정부인들이 동자질할 때도 띠고 치레거리로도 띠는 맵시있는 앞치마가 되였다.》 (김일성전집》 제99권 63페지)

행주치마는 녀성들이 부엌일을 할 때 치마우에 띠는 치마로서 앞치마라고도 한다. 행주치마는 녀성들이 부엌일을 할 때 음식물의 정결성을 보장하며 옷이 어지러워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의례히 띠는것으로 되여있다. 근래에 와서는 행주치마에 꽃과 새 등 여러가지 수를 놓아 장식하여 치레용으로 띠기도 한다.

우리 나라에서 녀성들이 앞치마를 두르는 풍습은 고구려시기부터 전해오고있다. 그러나 그 앞치마가 행주치마로 불리우기 시작한것은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임진조국전쟁시기부터였다. 행주치마는 임진조국전쟁시기 행주산성싸움에서 녀성들이 앞치마에 돌을 날라다 싸움을 도와나섰던 애국정신과 결부되여 그 유래가 전해지고있다.

행주산성전투는 임진조국전쟁시기 애국적인민들과 군인들이 행주산성에서 일본침략자들에게 큰 타격을 준 싸움으로서 력사에 《행주대첩》으로 기록되여있다. 1593년 2월 12일 우끼다를 총대장으로 하여 3만의 일본침략자들이 행주산성을 공격하여왔다. 이때 산성에는 2 300명의 군사들과 인민들이 있었다.

행주산성의 군사들과 인민들은 권률장군의 지휘밑에 배수진을 치고 산성을 포위한 3만여명의 왜병과 힘에 부치는 결사전을 하였다. 성안의 군사들과 인민들은 통나무로 목책을 둘러치고 돌과 흙으로 성을 쌓아 전투준비를 갖추었다. 적들이 공격해오자 산성안의 군민들은 활을 쏘고 돌을 굴리면서 용감히 싸웠고 성밖에 나가 화차를 쏘며 반돌격으로 적을 무찌르기도 하였다.

행주산성녀인들은 적들과 힘겨운 전투를 벌리고있는 군사들을 위하여 식사도 보장하고 싸움에 필요한 돌도 날라왔다. 처음에 녀인들은 바구니와 함지에 돌을 담아이고 달렸다. 그러나 바구니와 함지는 돌에 찢겨 오래가지 못하고 인차 해지군 하였다. 마을녀인들이 속상해하고있던 이때 치마폭에 돌을 담아 달리는 한 녀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 녀인의 모습을 본 다른 녀인들도 치마폭에 돌을 담아 날랐다. 치마도 인차 해지자 이번에는 질긴 무명천으로 앞치마를 든든하게 만들어 띠고 거기에 돌을 담아 날라주어 성을 든든히 쌓게 하였으며 그 돌로 적들에게 돌벼락을 안기게 하였다. 이 가렬한 싸움에서 성안의 군민들은 끝내 적의 공격을 물리치고 크게 승리하였으며 적들은 무수한 시체를 남긴채 패주하고말았다.

우리 군민은 이 전투를 통하여 자기의 용감성과 애국적기개를 다시한번 시위하였으며 일본침략자들의 발악적기도를 꺾어버림으로써 적들의 총퇴각을 더욱 촉진시켰다. 이 승리에는 행주산성녀인들의 그 애국치마도 큰 기여를 하였다.

행주산성싸움에서 돌을 담아서 나른 녀성들의 그 애국치마들은 후날 조선의 모든 가정부인들이 부엌에서 동자질을 할 때도 띠고 치레거리로도 띠는 맵시있는 앞치마가 되였다. 그로부터 행주산성싸움에서 유래된것이라고 하여 그 앞치마를 《행주치마》라고 하였다.

우리 녀성들이 띠는 행주치마는 비록 소박하여도 외래침략자들을 몰아내고 나라의 존엄을 지켜 자주적으로 살려는 조선녀성들의 애국심을 전하여주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