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종합대학 법학부 김광문
2024.4.30.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혁명의 길에 나서신 첫시기부터 동지를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주저하지 않으시였고 언제나 동지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시며 혁명투쟁에서 고귀한 생을 마친 수천수만의 혁명전사들을 영생의 언덕에 세워주시였다.
바로 그 위대한 사랑의 품에 안겨 충신의 삶이 어떻게 빛나는가를 보여주는 감동깊은 이야기가 있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우리 수령님은 혁명적동지애의 최고화신이시였다.》
김책동지와의 영결식이 진행된 주체40(1951)년 2월 어느날 밤 어버이수령님의 심중은 대단히 무거우시였다. 준엄한 혁명의 갈피마다에 혁명가들의 시신을 파헤쳐 란도질한 흉악한 원쑤들의 책동이 한두번만이 아니였기때문이였다.
생각을 거듭하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에 맞는 안전한 대책을 세우도록 하시였다.
하여 그이께서 취해주신 사랑의 조치에 의하여 여러대의 자동차들이 야밤삼경에 덕천으로 향하게 되였다.
그때부터 덕천의 어느한 깊은 굴에는 완전무장을 갖춘 한개 소대의 군인들이 경비를 서기 시작하였고 그 구역은 일체 출입금지된 특수구역으로 되였다.
그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40(1951)년 2월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를 여시고 참다운 혁명가, 열렬한 애국자, 유능한 군사정치활동가였던 김책동지의 서거에 비통함을 금치 못하시며 그가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쌓은 공적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투사의 출생지인 당시의 함경북도 학성군을 김책군으로 개칭하는 동시에 성진시를 김책시로 명명하며 평양공업대학을 김책공업대학(오늘의 김책공업종합대학)으로 개칭하도록 하시였다. 또한 청진제철소(당시)가 김책제철소(오늘의 김책제철련합기업소)로 명명되였다.
혁명전사들을 위하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숭고한 의리의 세계는 이렇듯 뜨겁고 열렬한것이였다.
당에 끝없이 충실하였던 항일혁명투사 김책동지의 생애는 오늘도 그의 이름과 더불어 영원히 빛나고있다.
참으로 위대한 수령님은 이 세상 그 어느 령도자도 견줄수 없는 혁명적의리와 동지애의 최고화신이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