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조선의 젊은이들이 〈징용〉, 〈보국대〉, 〈정신대〉로 끌려갔으며 〈지원병〉, 〈학도병〉, 〈징병〉으로 싸움터에 끌려갔습니다.》(
중일전쟁에 이어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까지 도발하여 침략전쟁의 무대를 동남아시아일대에까지 확대한 일본군국주의자들은 《대동아공영권》야망실현에 미쳐날뛰였다. 나라의 총면적이 37만여km2밖에 안되고 인구는 약 1억명정도이며 주요전략자원을 수입에 의거해야 하는 일본으로서는 이 전쟁을 수행하는것이 참으로 힘에 부치는 일이였다.
특히 전선의 확대와 그에 따르는 비행장, 항만시설, 군용도로 등의 건설은 막대한 로동력을 요구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로동력의 부족을 조선에서 더 많은 청장년들을 끌어가는것으로 대책하려 하였다.
1942년 2월이후 일제는 《개정국민징용령》, 《징병령》, 《해군특별지원병령》과 같은 악법들을 조작하고 헌병, 경찰 등 강권을 발동하여 조선사람들을 사냥의 방법으로 강제련행하였다.
이런 야수적인 사냥의 방법으로 수많은 조선의 청장년들을 끌어간 일제는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의 넓은 지역에로 확대된 모든 전쟁마당에 내몰았다.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지역에 침입한 일제해군은 《해군작업단》이라는 명목으로 강제련행한 조선사람들로써 수많은 《설영대》를 조직하였으며 륙군도 조선사람들로써 《특설수상근무대》, 《시설부파견대》, 《도로대》, 《수송대》 등을 조직하여 비행장과 항만건설, 진지굴설작업과 도로개척, 군수품수송에 내몰았다.
일제침략자들은 참기 어려운 열대성기후와 말라리아, 콜레라 등 각종 병마가 우글거리고 포탄과 폭탄이 무섭게 터지는 솔로몬제도, 피지, 사모아제도와 같은 죽음의 섬들에 조선사람들을 끌어다가 살인적인 노예로동을 강요하였다.
면적이 4만 400km2에 달하는 솔로몬제도는 태평양남서부 멜라네시아의 중부에 있는 제도로서 화산으로 이루어진 부건빌섬, 슈와절섬, 쌘터이저벨섬, 말라이타섬, 과덜커낼섬, 쌘크리쓰토벌섬, 뉴죠지어섬, 부카섬들과 산호무지들로 이루어져있다. 여기서는 미영련합군과 일본군과의 가장 치렬한 싸움이 벌어지는 가장 위험한 곳이였다.
330여개의 크고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피지도 대부분이 굳은 산호무지로 둘러싸인 화산섬이며 태평양남부 폴리네시아에 있는 제도인 사모아도 10여개의 화산섬들과 산호섬으로 이루어져있고 해안선은 굴곡이 심하며 벼랑으로 되여있는 위험한 곳이 많은 섬이였다.
1942년 여름에 솔로몬제도를 점령한 일제는 어느 한 섬을 해군항공기지로 만들기 위하여 조선사람들로 구성된 111, 113설영대를 끌어다가 건설에 내몰았다.
놈들은 아무런 기계적수단도 없이 수천수만년동안 지질적으로 굳어진 산호무지를 파고 목고로 실어나르게 하였으며 아름드리 야자나무들을 도끼로 찍어내게 하여 두달동안에 2개의 활주로를 만들어놓았다.
살인적인 노예로동의 나날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무더위속에서 허기진 배를 그러안고 무리로 쓰러졌으며 각종 전염병과 로동사고로 숨졌다.
그해 8월에 미해병대가 과덜커낼섬에 대한 군사적공격을 개시하자 일제는 조선사람들을 모조리 밀림속으로 끌고들어가 병마와 기아로 숨지게 하였다.
동남아시아태평양상에서의 일제의 조선인강제련행과 학살은 1943년 이후에 극도에 달하였다.
1944년 2월에 《조선인로무자활용에 관한 방책》, 《이입조선인로무자의 계약기한연장의 건》 등을 조작하여 몇년기한으로 끌어간 조선사람들을 기한에 관계없이 영영 붙잡아두고 1944년 8월에는 《장년전원에 대한 징용령》을 공포하고 나이에 관계없이 사냥식강제련행을 벌리였다.
일제는 이렇게 끌어온 조선인로동자들을 내몰아 저들이 강점한 태평양의 섬들에서 《지구적인 임무를 달성해야 한다.》고 하면서 비행장과 항만수리, 진지굴설과 탄약운반작업에 내몰아 노예적로동을 강요하였을뿐아니라 제놈들의 총알받이로 내모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길버트제도의 타라와섬과 마킨섬의 수비대장 시와자끼라는 자는 1944년 2월 미군이 상륙작전을 벌리자 111설영대와 4시설부파견대에 강제련행당한 수천명의 조선사람들에게 참대창을 쥐고 맞받아나가도록 명령하고 이에 불응하는 조선사람들은 뒤에서 총으로 쏘아죽이고 총창으로 찔러죽이는 야만적행위를 감행하였다. 일본의 출판물들과 여러 사회계인사들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마킨섬에서 2 800여명, 타라와섬에서 1 500여명의 조선사람들이 미군의 총탄에 맞아 무고한 죽음을 당하였다고 한다.
당시 이 섬에 강제련행되였던 피해자 로수곤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경상남도 창녕군에서 살던 나는 1942년 10월 징용장을 받고 …구레해군 제111설영대에 배속되였다. 대원 1 500명가운데서 약 1 300명이 일본각지에서 징용된 조선사람이였다. 12월 20일경 111설영대 1 500명전원은 두척의 배를 타고 …길버트제도의 타라와섬에 도착하였다.…얼마후부터 미군의 공습이 번번히 진행되기 시작하였다.…이대로 있다가는 전멸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잇달린 섬으로 도망쳤다. …타라와섬을 지켜보니 섬전체가 불바다로 되였다. 그때 이 섬에 끌려왔던 조선사람전원이 다 희생되였다.》
모든 력사적사실과 자료들은 일제야말로 식민지통치시기 우리 인민들에게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고 감행한 조선인민의 숙적이라는것을 말해준다.
일본은 이제라도 과거죄악에 대하여 우리 민족앞에 정식으로 사죄하고 성의있는 배상을 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