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세계일등예술품-고려청자기

 2021.2.2.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고려자기는 색과 문양, 모양이 독특하고 아름답습니다. 세상사람들은 예로부터 고려자기를 천하제일이라고 하면서 보물처럼 여겨왔습니다.》 (김정일전집》 제2권 183페지)

중세 우리 민족의 첫 통일국가였던 고려는 정치와 경제는 물론 문화가 상당히 발전하여 《고려》(Corea, Coro)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있었다. 고려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것은 고려청자기가 발전한것과도 중요하게 관련되였다.

청자기가 고려문화발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것은 그것이 대외적으로 중국과 일본은 물론 유럽에까지 세계일등예술품으로 알려져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기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외국의 옛 문헌자료들에 적지 않게 반영되여있다. 거기에는 고려청자기의 신비스러운 청록색과 독특하고 아름다운 문양, 실용성과 예술성이 결합된 모양을 놓고 세계일등예술품이라고 격찬한 당시 외국인들의 반향이 실려있다.

외국의 옛 문헌들에서는 우선 고려청자기의 신비스러운 색갈에 대하여 찬탄을 아끼지 않고있다.

력사적으로 보면 고려사람들은 자기들의 청자기에 대하여 청록색과 같은 색갈을 낸다는 뜻에서 《비색청자》(翡色靑磁)라고 불렀다.

고려에서 비색(청록)은 10세기 중엽에 그 어느 나라보다 먼저 창조되였다. 이와는 달리 중국이나 일본, 유럽에서는 청록색을 내는 도자기를 14세기 이후에 가서야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당나라(618-907년)시기에 연한 풀색을 띤 도자기가 나왔다고 전하고있다. 하지만 그것은 처음에 흰색에 가깝게 제작되여 송나라(960-1279년)시기에 와서야 청록색으로 완성되였다.

하기에 당시 중국에서는 1387년에 출판된 《격고요람》에서 고려청자기를 소개하면서 그것이 처음보는 색갈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도기색갈이 푸른것을 고려사람들은 비색이라고 하는데 근년이래 제작솜씨가 정교해지고 색갈의 광택이 더욱 아름다워졌다.》고 찬양하였다.

한편 일본에서는 고려가 존재하던 당시에 청록색갈의 도자기를 전혀 만들어내지 못하고있다가 16세기 이후에 와서야 도자기생산지인 고마에, 쯔에스게 등지에서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고려청자기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고려도자의 연구》라는 책을 쓴 일본학자인 노모리 겡은 자기의 저서 첫 머리에서 《고려시대에 모든 공예품이 그밖의 미술과 나란히 발달하였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독특한 색을 나타내여 세계적으로 이름높은것은 청자뿐이다.》라고 하면서 격찬하였다.

고려청자기색갈의 신비로움에 대해서는 당시 유럽각지에도 널리 알려져있었다.

유럽에서는 에스빠냐의 발렌씨아지역에서 14세기에 와서야 겉면에 광택이 나는 도자기들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도자기들의 색갈은 거의나 밤색 또는 흙색이였다.

고려청자기는 14세기말에 와서 에스빠냐에 처음으로 알려지고 여러 나라에 전해졌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고려청자기의 색갈이 너무도 신비하여 꼭같은 색갈의 도자기들을 만들어내려고 시도하였으나 18세기에 와서야 기술적으로 완성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청록색갈의 도자기가 프랑스의 작가 뒤르페에 의해 《썰라돈》(Celadon》(청자기)으로 불리웠으며 이때부터 유럽각지에 그 이름이 더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이처럼 고려청자기의 청록색은 한마디의 말로는 그 신비로움을 다 표현할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있어 중국과 일본은 물론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세계일등예술품으로 손꼽히였던것이다.

외국의 옛 문헌들에서는 또한 고려청자기의 독특한 문양에 대하여서도 찬탄을 아끼지 않고있다.

고려공예가들은 11~12세기에 세계에서 유일하게 독창적인 장식기법인 상감기법을 청자기에 적용하여 여러가지 무늬를 형상하였는데 비색바탕에 상감을 한 청자를 특별히 비색상감청자라고 하였다.

고려자기의 겉면에 새겨진 문양의 주제들은 우리 인민이 전통적으로 사랑해온 소나무와 참대, 매화, 국화 등 여러가지였다.

옛 문헌기록을 보면 이러한 자기들은 당시 중국에서는 만들어내지 못하였다. 남송(1127-1279년)시기에 활동한 태평로인은 《수중록》에서 《고려청자기는 천하제일인데 그것은 문양이 매우 우수하기때문이다.》라고 평하면서 문양이 독특하다는데 대하여 놀라움을 표시하였다. 이에 대하여서는 명나라 왕조가 1387년에 내놓은 《격고요람》에도 《고려자기가운데서 분청(粉靑)자기는 매우 귀한데 그 자기는 가치를 매길수 없다.》라고 되여있는데 이것은 독특한 문양이 새겨진 고려청자기가 돈을 주고도 사기 힘든 매우 귀한 자기였다는것을 잘 말해주고있는것이다.

유럽사람들도 고려의 비색상감청자기에 대하여 경탄과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1927년에 도이췰란드에서 출판된 《조선미술》에서는 《고려시기의 청자는 색갈과 문양적인 양상에 있어서 류례없는 방법과 형태의 고전적인 완비 및 표현의 다양성으로 인하여 동부아시아에서뿐아니라 모든 문명한 나라들에 있어서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한다.》고 평가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후에 도이췰란드에서 출판된 《조선인과 그들의 문화》에서도 《고려청자의 첫 종류는 같은 시기의 중국 송나라제품보다 반투명의 보다 맑은 록색의 정결한 표면을 가지고있으며 … 이런 종류의 고려청자기를 수집한 사람들은 모두 찬탄을 금할수 없어한다. 오직 고려청자는 세계에 류례없는 일품이라고 평가하고있다.》라고 하면서 청자기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예술적기법을 높이 찬양하였다.

외국의 옛 문헌들에서는 또한 고려청자기의 개성적이면서도 참신한 모양을 놓고 찬탄을 아끼지 않고있다.

고려청자기는 청록색의 색갈과 아름다운 문양에 실용성과 예술성, 세련된 모양을 보장한것으로 하여 매혹적인 정서를 안겨주고있다.

특히 물형자기의 부드럽고 우아한 형태미는 고려공예가들의 사물에 대한 세밀한 관찰력과 생동하고도 진실한 형상수법, 세련된 공예적솜씨에 의해 이루어진것이였다. 현재 남아있는 《모란꽃새김무늬비색청자꽃병》, 《련꽃모양비색청자꽃병》 등은 고려청자기들의 모양에서 걸작품들로 널리 알려진 작품들이다.

1123년에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송나라 사람인 서긍은 《참외모양의 술단지는 우에 작은 뚜껑이 있는데 련꽃에 오리가 엎드려있는 모양이다. 대접, 접시, 잔, 항아리, 꽃병, 술병과 잔도 잘 만들었다. 그중 술단지가 다른 그릇보다 특별히 잘되였다.》고 하면서 물형청자기가 실용성과 예술성이 결합된 매우 높은 수준의 훌륭한 도자기라는데 대하여 평가하였다.

일본에서는 16세기 이전까지만 하여도 청자기로 된 잔과 잔대를 성(자기의 령지) 한개나 쌀 1만석과 바꾸었는데 이것은 당시 일본에서 고려청자기를 소유한 사람이 재부의 상징으로, 문명의 자랑으로 여기고있었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유럽에서도 고려청자기를 문명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1930년대 중엽에 일본의 한 학자가 베를린에서 살고있던 도이췰란드의 유명한 귀족을 방문하였을 때 그 귀족이 일본학자를 만나자마자 자랑거리로 제일먼저 맵시있는 고려청자꽃병을 꺼내놓고 보여주었다고 한 사실은 유럽사람들이 청자기를 자기들의 문명수준을 보여주는데서 선차적인 자리에 놓고있다는것을 말해주고있다.

우의 자료들은 고려청자기가 세상사람들속에서 특출한 색과 무늬, 참신한 형태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우아하고 고상한 최고의 일등공예품으로, 그것을 문명수준을 보여주는데서 없어서는 안될 보물로 되여왔다는것을 뚜렷이 실증해주고있다.

이처럼 고려사람들의 재능과 지혜에 의해 창조된 고려청자기는 세계에 빛을 뿌린 인류문명의 걸작, 최고의 일등공예품으로 공인되여있었다.

민족의 재보이고 자랑인 고려청자기는 조선로동당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비로소 재생의 빛을 뿌리게 되였다.

그리하여 조선에서는 고려청자기가 500여년간의 잠에서 깨여나 마침내 자기의 자태를 드러내여 오늘은 현대고려청자기로 그 빛을 계속 뿌리고있다.

청자국화, 넝쿨무늬박이귀달린항아리
청자국화, 넝쿨무늬박이귀달린항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