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종합대학 법학부 부교수 손혁철
2020.2.4.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당과 조국을 위하여 피 흘려 싸운 영예군인들을 잘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김일성전집》 제39권 6페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우리의 영예군인들은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희생적으로 용감히 싸운 전사들이며 나라의 귀중한 보배들이라고 하시면서 그들이 조국과 인민앞에 세운 공적을 계속 빛내여나가도록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전화의 그날로부터 전후복구건설과 사회주의건설의 나날에 변함없이 당과 수령을 충직하게 받들어온 영예군인들에 대한 생활보장제도는 전쟁의 어려운 속에서 마련되였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제국주의련합세력과의 판가리결전을 벌리는 준엄한 전쟁시기에 영예군인들의 사업과 생활조건을 보장해주는 조치를 취한다는것은 누구나 할수 있는 일이 아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제국주의침략자들의 무력침공을 반대하는 조국해방전쟁에 참가하여 영용하게 싸우다가 부상당한 영예군인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것을 당과 공화국정부가 책임지고 하여야 할 중요한 사업으로 내세우시고 이 사업에 깊은 관심을 돌리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가렬한 조국해방전쟁이 한창이던 주체40(1951)년 2월 12일 당시 로동성의 한 일군에게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전선에서 피흘리고 용감하게 싸우다 부상당한 영예군인들은 응당 사회보장혜택을 받아야 하며 그들을 국가적으로 돌보아주고 원호해줄데 대한 지시를 주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체 인민을 원쑤격멸에로 조직동원하시는 그 바쁘신 가운데서도 귀중한 시간을 내시여 영예군인들이 국가의료기관들에서 무상으로 충분한 치료를 받도록 하며 그들에게 요구되는 의수, 의족을 비롯한 교정기구를 빨리 만들어주기 위한 대책을 취하도록 하시였다. 그리고 영예군인들로 작업소나 생산합작사같은것을 조직하여 그들에게 건강에 맞는 적당한 생산활동을 할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며 농촌에 거주하면서 농사를 지을것을 요구하는 영예군인들에게는 주택과 토지, 종곡, 비료 등을 우선적으로 보장해주도록 하시였다. 또한 로동능력을 상실한 무의무탁영예군인들을 영예군인보양소들에 보내여 그들의 생활을 국가에서 전적으로 맡아 돌보아주며 그들에게 국가정기보조금을 지불하는 사업을 잘 할데 대하여 강조하시였다.
이렇게 되여 영예군인들은 전쟁의 어려운 속에서도 국가로부터 국가정기보조금을 지불받고 치료를 잘 받을수 있었으며 국가의 방조를 받으며 아무런 불편없이 생활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또한 모든것을 전쟁승리에 바쳐야 하는 어려운시련속에서도 영예군인학교를 설치하여 영예군인들이 필요한 지식과 기술기능을 습득하고 해당한 직장에 배치하는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당시 영예군인들속에서는 공화국정부의 옳바른 시책에 고무되여 어떻게 가만히 앉아 국가의 혜택만 받고있겠는가고 하면서 일할것을 요구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에 맞게 주체40(1951)년 3월 3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협의회에서 영예군인학교를 설치할데 대한 결론을 주시고 영예군인들이 인민경제 여러 부문에 진출하여 일할수 있도록 그들에게 필요한 지식과 기술기능을 배워주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영예군인학교로서는 영예군인공업학교와 영예군인농업학교, 영예군인통계부기학교를 설치하며 매 학교의 실정에 맞게 통신기계과, 기계수리과, 공예목공과 같은 학과를 둘데 대한 문제들에 대하여 가르치시였다. 그리고 영예군인학교의 수업년한을 1년제나 2년제로 할데 대한 문제, 영예군인학교 과정안과 교수요강문제, 영예군인학교의 관리운영에 필요한 자금보장문제, 전시조건에서 국가의 부담이 크더라도 영예군인학교 학생들에게 학용품과 교복, 실습복, 신발, 침구 같은 생활필수품을 무상으로 공급하며 영예군인학교를 평안북도와 자강도, 함경북도의 안전한 지대에 설치할데 대한 문제들과 영예군인들이 학교를 졸업하면 건강상태와 기술기능에 맞는 직종에 배치하여 그들이 불편없이 안정되여 일하고 생활할수 있도록 할데 대하여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그리하여 영예군인학교는 주체40(1951)년 4월 13일 내각결정 제254호에 의하여 창설되였다. 초기에 학교에서는 조국의 통일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영용하게 싸우다가 부상당하여 장애자로 된 인민군대, 인민경비대장병들과 내무원, 빨찌산들을 받아 로동능력상실정도에 적응한 기술기능교육을 주었다. 창설당시에는 1~2년제의 영예군인공업학교, 영예군인농업학교, 영예군인통계부기학교 등이 나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영예군인학교를 설치한 후 영예군인학교들에 나가시여 영예군인들의 학습과 생활에서 아무런 불편도 없도록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41(1952)년 6월 21일 영예군인 제1공업학교(당시)에 나가시여 오래전부터 영예군인동무들을 만나보려고 하였으나 좀처럼 시간을 내지 못하여 오늘에야 찾아오게 되였다고 하시면서 영예군인들이 어느 한 공장에서 실습을 할수 있도록 조건을 보장할데 대한 대책도 세워주시고 영양가높은 부식물로 식사질을 높여 영예군인들의 영양보충을 잘해줄데 대한 문제, 영예군인들이 다니는데 불편이 없도록 구내에 있는 길을 잘 닦고 층계도 낮추거나 될수록 없앨데 대한 문제, 학교가 적기의 폭격피해를 받지 않도록 위장을 잘하고 기숙사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분산시킬데 대한 문제 등 영예군인들이 건강한 몸으로 학습을 할수 있게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뜨거운 사랑과 배려속에 영예군인들은 부상당한 몸이라고 절대로 비관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희망과 능력에 따라 육체적조건에 맞는 기술기능교육을 받고 건강한 몸으로 일할수 있게 되였다.
정녕 우리 영예군인들의 사업과 생활, 건강증진을 위해 바치신 위대한 수령님의 심혈과 로고에 대하여 다 이야기할수는 없다.
참으로 위대한 수령님과 같이 영예군인들의 친어버이가 되시여 친자식처럼 그토록 마음쓰시며 사랑을 베푸신 그런 위인은 이 세상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