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김은철
2019.5.27.
인민을 위한 보통강개수공사로부터 첫걸음을 내디딘 주체건축의 갈피갈피에는 인민사랑의 력사가 뜨겁게 새겨져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거리를 하나 형성하여도 인민을 중심에 놓고 인민의 리익에 복종시키는 원칙에서 하고있습니다.》 (《김정일선집》 증보판 제19권 7페지)
지금으로부터 50여년전인 주체47(1958)년 8월 어느날 이른새벽 옥류관위치를 잡아주시기 위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평범한 려객선 《민흥 8》호를 타시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청류벽쪽으로 배를 몰아가게 하시고는 배머리에서 강안의 지형을 유심히 살펴보시였다.
배가 경상골어구를 지나 반월도앞에 이르렀을 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문득 배를 멈추게 하시고 기슭에 솟아있는 바위벽을 오래도록 살펴보시다가 저 바위가 옥류벽인데 집터로는 아주 좋은 곳이라고 동행한 일군들에게 이르시였다. 수행한 일군들도 그 바위주변이 집을 짓기에는 정말 좋은 곳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저 옥류벽우에 대동강의 풍경에 어울리면서도 마치 물우에 떠있는것처럼 보이는 조선식료리점을 하나 건설하여 조선료리도 하고 결혼식도 하여야 하겠다고 가르쳐주시였다.
순간 일군들은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평양에서도 제일 명당자리에 속하는 곳에 대중식당을 짓자고 하실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였기때문이다.
5천년민족사에 모란봉과 대동강의 아름다운 경치를 굽어보며 천하제일강산이라고 노래한 사람은 수없이 많았고 이 나라의 아름다운 곳마다에 통치배들의 놀이터나 궁전은 세웠으나 우리 민족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훌륭한 인민의 식당을 짓자고 발기하신분은 우리 수령님뿐이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옥류관의 터전을 잡아주신 얼마후에 설계일군들이 현지조사를 위해 옥류벽을 돌아보고있었다.
이때 두루마기차림의 한 로인이 허연 수염을 날리며 찾아와 다짜고짜로 책임자를 만나자고 하더니 우리 가문으로 말하면 고조부 때부터 풍수에 도통하여 평양아근에 소문이 자자한 집안이라고 소개를 하고는 자기가 지금까지 평양에 점찍어놓은 명당자리가 세곳이 있는데 묘를 쓰자면 대성산의 주작봉마루가 으뜸이요 관청건물자리로는 장대재가 제일이고 집터로는 모란봉밑의 바로 여기 옥류벽이 명당자리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러면서 그 로인은 이 명당자리에는 우리 수상님의 저택을 지어드리고 저기 장대재우에는 국가정사를 보시는 건물을 짓고 대성산에다는 선친들의 묘소를 쓰는것이 합당할줄 아니 수상님께 그렇게 아뢰여달라고 하였다.
일군이 이 자리는 수령님께서 인민을 위한 식당을 지으라고 말씀이 계셨다고 하자 두눈을 껌뻑이며 아무 말도 못하던 로인이 한참만에야 이 아까운 자리에 백성들의 식당을 세워주시다니 하고는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고 한다.
옥류관의 터전을 잡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건설물이 철두철미 민족적색채가 뚜렷한 조선식건축물로 되도록 세심히 지도해주시고 이끌어주시였다. 주체49(1960)년 8월 몸소 준공식장에 나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위치가 아주 좋다고 하시면서 반짝이며 흐르는 대동강물이 구슬같이 흐르기때문에 바로 옥류라고 부르며 이 집을 옥류관이라고 한다고 뜨겁게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어버이수령님의 숭고한 뜻을 받드시여 옥류관을 본래건물의 고유한 모습을 잘 살리면서 현대적미감에 맞게 대보수하도록 하시고 그후 증축보강하도록 하시여 로동당시대의 걸작으로 완성되게 하시였으며 세심한 지도와 가르치심을 주시여 민족료리의 원종장으로, 세계에 이름난 봉사기지로 되도록 현명하게 령도하여주시였다.
이 하나의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건물을 하나 짓고 거리를 하나 형성하여도 언제나 인민을 중심에 놓고 인민의 리익에 복종시키는 주체건축, 인민대중제일주의건축의 참모습에 대하여 다시금 절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