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군들은 인민들속에 들어가 인민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여야 합니다.》
좋은날, 보통때보다도 인민이 아파할 때 친
푸른 하늘을 향해 곧추 자라던 강냉이대들이 모두 한쪽으로 머리를 기울인채 비스듬히 누워있었고 포전의 흙이 보이지 않게 무성하던 검푸른 잎들은 실오리모양으로 갈가리 찢기워 맥없이 흩날렸으며 황금빛이 곱게 물들었던 벼포기들도 모진 광풍에 명줄이 끊긴듯 거멓게 죽어갔다. 지붕의 기와가 날아나고 아담한 울타리가 허물어졌으며 지어 정든 살림집의 벽체들이 폴싹하니 무너졌다.
봄내, 여름내 애지중지 가꾸어온 곡식들이 피해를 본 아픔은 금이야 옥이야 하던 자식을 졸지에 잃은듯 한 심정이였다.
진정을 바쳐 키운 곡식들에 대한 소중한 기쁨과 긍지를 한순간에 휩쓸어간 자연의 재난앞에 손맥이 풀려 무심한 하늘을 원망하고있던 지난 8월 28일 오후 옹진군 긴고개협동농장 농장원들의 앞에 배낭을 지고 작업복차림의 당중앙위원회 일군들의 대오가 나타났다.
긴고개협동농장만이 아니였다. 강령군과 벽성군의 태풍피해를 입은 여러 농장에도 당중앙위원회 일군들이 도착하였다.
인민들이 어렵고 힘들 때 그들속에 깊이 들어가 고락을 같이하면서 힘과 용기를 주고 성심성의로 도와주는것이 우리 당이 응당 해야 할 최우선과업중의 하나이라고, 기쁠 때도 힘들 때도 언제나 인민들과 함께 있는 당중앙위원회가 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당중앙위원회 각 부서들이 황해남도의 농경지와 농작물피해복구사업에 모두 동원될데 대한 지시를 주신
그로부터 며칠후 옹진군과 강령군, 벽성군의 여러 농장에 나갔던 당중앙위원회 일군들이 인민들과 고락을 같이하며 태풍피해복구전투에로 불러일으키는 사업을 성과적으로 마치고 돌아왔을 때
지난 9월 3일, 그날은 우리 나라에 태풍8호에 이어 태풍9호가 덮쳐든 날이였다.
온 나라에 태풍경보가 울리고 수도의 거리에도 오가는 사람 한명, 차 한대 찾아볼수 없었던 바로 그 시각에 모질게 불어치는 비바람과 폭우를 뚫고 힘차게 전진하는 뻐스행렬이 있었다.
황해남도의 태풍피해지역으로 또다시 진출하는 당중앙위원회 일군들이 탄 뻐스들이였다.
그리하여 옹진군 만석협동농장, 장송협동농장과 강령군 금정협동농장, 금동농장, 평무농장, 벽성군 월답협동농장, 대죽협동농장을 비롯하여 여러 농장에도 당과 인민이 하나가 된 혼연일체의 감동깊은 화폭이 펼쳐졌다.
당중앙위원회 일군들이 피해지역 인민들과 고락을 같이한 기간은 길지 않다. 그러나 이 나날 혁명의
마치 농촌마을에 태를 묻은듯 흙묻은 지게도 선뜻 지고 이야기도 토배기들처럼 구수하게 하며 특히 남녀로소 누구를 막론하고 혈육처럼 대하는 일군들의 소탈한 모습은 삽시에 농장원들의 마음을 끌어당겼으며 얼마나 걸싸게 일하는지 작업이 한창일 때에는 누가 당중앙위원회 일군이고 농장원인지 가려보기 힘들 정도였다. 일군들은 불편한 잠자리도, 소박한 식사도 허물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기들이 집에서 정성껏 마련해온 가지가지의 생활필수품들을 한아름씩 안겨주었다.
강령군 부포농장 제2작업반에 나간 일군들은 마을앞으로 흐르는 시내가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물량이 많아지는 장마철이면 징검다리가 물속에 잠겨 오가는 사람마다 신발을 벗고 시내를 건느고있었던것이다. 하루에도 몇번 그곳을 오가야 하는 농장원들이 얼마나 불편할것인가, 이렇게 생각한 일군들은 시내가에 다리를 건설해주기로 마음먹었다.
피해복구전투를 하는 여가에 가물막이공정을 뛰여넘어 기초공사를 할수 있는 공법을 탐구하고 그것을 평양건축대학과 련계하여 과학성과 안전성을 확증하였으며 깊은 밤마다 우등불을 피워놓고 공사를 하고 농장을 떠나는 순간까지 일을 다그친 일군들, 하여 안전란간까지 세운 아담하고 번듯한 다리가 시내가에 일떠섰고 일군들은 농장원들의 불편을 또 한가지 덜어준 크나큰 기쁨을 안고 농장마을을 떠났다.
당중앙위원회 일군들을 바래우는 곳마다에서 일군들이 탄 뻐스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농장원들과 주민들은 모두 와 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멀리까지 따라섰다.
이 눈물의 바다는 인민을 제일 아끼고 사랑하시며 전당의 일군들을 인민에 대한 멸사복무정신의 체현자, 헌신적복무자로 키워주고 이끌어주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