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과 정견이 다른 사람들도 누구든지 우리
그가운데는
1990년 9월 28일 밤 도꾜의 나리다비행장에 착륙한 한대의 려객기에서 70객의 늙은이가 틀진 걸음으로 승강대를 내렸다.
그러자 역사앞에 모여있던 기자들이 그를 에워싸고 평양방문에 대한 소감과 기분상태 그리고
제가끔으로 떠들어대는 기자들을 천천히 일별하면서 그는 정말 훌륭한 방문이였다고 하면서
그가 다름아닌 일본에서 비행기를 타고 3국을 경유함이 없이 우리 나라에 직접 온 첫사람으로서
가네마루 싱은 1990년 당시 자민당 다께시다파의 회장이며 고문으로서 정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있었다.
1990년 9월 조일 두 나라사이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하여 전 부수상 가네마루 싱을 단장으로 하는 일본의 자유민주당대표단이 평양에 오게 되였다.
이어 조선로동당과 일본의 자유민주당, 사회당의 공동회담이 진행되였다.
주체79(1990)년 9월 28일 평양에서는 조선로동당과 일본자유민주당, 일본사회당대표단이 3당공동선언 조인식을 진행하고 3당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가네마루는 3당공동선언이 합의되여 발표된것을 두고 매우 만족해하였다. 그는
가네마루의 평양방문은 일본은 물론 서방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며 특히 일본의 우익세력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아우성을 쳤다.
이로부터 일본의 우익반동들은 평양으로 기울어진 가네마루를 돌려세우기 위해 별의별 비렬한짓을 다하였다.
그들은 우익잡지 《슈깡분순》, 《슈깡지지》에 《굴욕의 외교》, 《나라를 팔아먹는 가네마루》라는 험담기사를 내는가 하면 방송차를 동원하여 가네마루의 사무소와 집주변을 돌아치며 그의 정치적인기를 떨구기 위해 온갖 비방중상을 일삼았다. 지어 폭력배들을 내세워 그에게 협박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위압전화를 걸기도 했다.
어느날 낮 가네마루의 사무소에 뛰여든 정체불명의 사나이들은 그의 가슴에 권총을 들이대고 조선로동당과 일본의 자유민주당, 일본사회당사이의 3당공동선언을 무효화하고 평양을 찬미하는 일체 활동을 중지할것을 강압해나섰다.
삶이냐 죽음이냐 하는 운명의 갈림길에 서게 된 가네마루는 주저없이 자기를 겨눈 총구앞에 나서 추상같이 웨쳤다.
《나는 이미 어느때 어떤 놈의 총이나 칼에 맞아 죽는다 해도
너희들도 내 고집을 알테지, 난 한번 마음먹으면 그만이다, 총이 아니라 대포를 가지고 온대도 내 고집은 돌려세울수 없어, 난 신의를 목숨보다 더 귀중히 여긴다, 그러니 마음대로 해라.》
너무도 도고한 가네마루의 기세에 위압된 정체불명의 사나이들은 비실비실 도망쳐버리고말았다.
가네마루는 우익반동들의 발악이 우심해질수록 3당공동선언실현을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었다.
그는 수상과 외상에게 일조국교정상화를 위한 정부간교섭을 빨리 추진시키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아직 한번도 관여해본적이 없던 일조우호촉진의원련맹을 정계의 고위인물들로 대폭 갱신하도록 하고 자기가 직접 그 조직의
그리고
일본사람들은
《김 가네마루》 …몇천, 몇만마디의 말과 글로도 담겨진 뜻을 다 표현할수 없는 그 이름에는
주체80(1991)년 2월 조선로동당대표단이 일본을 방문하였다.
그때 가네마루는 우리 대표단성원들을 만난 자리에서 나는 진심으로
그러면서 그는 나는 신의를 지키는 사람이며 만약 내가
가네마루 싱, 그는 바로 이런 사람이였다.
가네마루는 1996년 3월 28일 81살로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자기의 마지막사명을 끝까지 다하였다.
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