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임진전쟁의 승리에 기여한 녀인들

 2018.11.13.

올해는 임진조국전쟁이 우리 인민의 승리로 끝난 때로부터 420년이 되는 해이다. 일본놈들을 우리 강토에서 몰아내고 승리를 거둔 이 전쟁에는 남녀로소 가림없이 전체 조선인민이 떨쳐나섰으니 어찌 연약한 녀인들이라고 외면했으랴.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곽재우를 비롯한 애국자들은 의병을 일으켜 도처에서 왜적을 격멸하였습니다. 농민들과 하급관리, 심지어 산중에 은거하는 중들도 의병을 일으켰고 녀성들도 이르는곳마다에서 왜적을 반대하여 싸웠습니다.》 (김일성전집》 제1권 552~553페지)

일본사무라이들은 조선과 명나라를 정복하려는 야심밑에 1592년 4월 20여만명이나 되는 침략무력을 끌고 우리 나라에 기여들었다.

온 나라가 전쟁의 불길에 휩싸이자 우리 인민들은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민족의 자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싸움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섰다. 그 싸움에는 녀성들도 참가하였다.

력사에 임진조국전쟁의 3대대첩으로 알려진 행주대첩에는 우리 녀성들의 애국심과 용감성이 깃들어있다.

1593년 2월 중순 우리 나라의 전지역에서 반공격이 개시되여 쫓겨나고있던 왜놈들은 한성이라도 유지해보려고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한성에 있던 침략군의 총대장인 우끼다 히데이에(부전수가)는 3만명의 침략군을 끌고 행주산성으로 밀려와 하루종일 9차례에 걸쳐 발악적인 총포사격을 들이댔다.

당시 행주산성에 있던 군사들과 인민들은 권률의 지휘밑에 결사전을 벌렸다. 산성이 무너지면 제때에 수리하면서 발악적으로 달려드는 적들을 무리로 쓸어눕혔다. 이때 성안에 있던 녀성들도 앞치마에 돌을 담아 날라오면서 군사들을 도와 놈들을 족쳤다. 우리의 반공격에 더는 견딜수 없었던 적들은 도주하고말았다. 이때부터 녀성들이 밥을 할 때 앞에 두르는 치마에 행주산성의 이름을 붙여 행주치마로 불리우게 되였다.

임진조국전쟁시기 《홍의장군》으로 불리운 경상도 의령 의병장 곽재우의 안해인 리씨부인도 남편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울수 있도록 적극 방조해준 녀성이였다.

임진전쟁이 일어나기 전 곽재우는 나라일은 안중에도 없이 온종일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술이나 마시고 풍월이나 하는것뿐이였다. 그러한 곽재우를 싸움에로 불러일으킨것이 바로 그의 안해였다.

리씨부인은 전쟁전에 벌써 란리를 예견하고 박에다 옻칠을 하고 갖가지 꿀벌과 뱀들을 잡아넣어 《도깨비통》을 만들었고 붉은 천릭(군복의 한가지)을 만들어 싸움할 때 속임수를 쓰는데 리용하도록 하였다.

임진전쟁이 터지자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에서 의병을 조직하고 싸움에 나설 때마다 안해가 만들어준 붉은 천릭을 입고 속임수를 써서 맞다드는 원쑤들에게 큰 타격을 주어 《홍의장군》으로 이름을 떨치였으며 《도깨비통》으로 의령땅에 기여든 적들을 통쾌하게 쳐물리쳤다.

시골에 묻혀 허송세월하던 곽재우가 임진전쟁시기 무관으로서의 능력과 자질을 발휘하여 력사에 애국적인 의병장으로 이름을 남길수 있었던것은 그의 안해 리씨녀성의 공로였다.

임진조국전쟁시기 무쇠바가지로 왜적들을 물리쳐 승리에 이바지한 녀인도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전라도 라주 의병장 김천일의 안해 양씨였다.

양씨는 평시에 박농사를 지어 거두어들이고 거기에 옻칠을 하여 고간마다 쌓아두었으며 야장쟁이에게 부탁하여 박과 꼭같은 쇠바가지를 만들어 이것역시 박과 함께 건사하였다. 한편 남편이 평시에 마을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가져 인심을 얻도록 하였으며 곡식도 많이 저축해놓았다.

임진전쟁이 일어나자 김천일은 라주에서 의병을 조직하였는데 초기에 그 인원이 700여명이나 되였다고 한다.

양씨는 고간마다 쌓아두었던 옻칠한 바가지를 차고 의병들이 싸움하게 하고는 돌아갈 때마다 몸에 찼던 바가지대신 무쇠바가지를 길가에 버리도록 하였다. 왜놈들은 길바닥에 떨어진 무쇠바가지를 발로 걷어찼지만 끄떡도 하지 않는것을 보고 의병들의 힘이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싸울 생각을 하지 못하고 황급히 도망쳐버리고말았다.

김천일이 의병장으로서 큰 공을 세울수 있었던것도 안해 양씨의 도움이였다.

왜적을 물리치는 싸움에는 사회적으로 천시당하던 기생출신의 녀성들도 있었다. 평양의 계월향과 진주의 론개가 바로 그런 녀성들이였다.

계월향은 평양의 기생으로서 임진전쟁이 일어난 후 평양성을 탈환하기 위한 싸움에 자기의 한몸을 바쳤다. 그는 평양성탈환을 위해 관군에게 적정을 알려주었으며 김응서와 협동하여 평양성에 둥지를 틀고있던 적장수놈을 처단하고 적들에게 붙잡혀 희생되였다.

그후 조선봉건왕조에서는 계월향의 공로를 평가하여 의렬사라는 사당을 세우고 그의 애국충정을 길이 전하였으며 그가 살던 곳을 월향동이라고 불렀고 거기에 비석을 세워주었다.

이렇듯 평양의 의기 계월향의 이름은 임진조국전쟁의 승리와 더불어 깊은 추억을 불러일으키고있다.

경상도 진주기생이였던 론개역시 계월향과 이름을 나란히 하고있다. 1593년 6월 진주성을 함락한 왜놈들은 촉석루에서 《전승축하연》을 베풀었는데 여기에 론개도 끌려나오게 되였다. 이때 론개는 진주성인민들의 복수를 위해 적장의 목을 그러안고 남강에 몸을 던졌다.

사람들은 론개의 넋이 깃든 촉석루아래의 너럭바위를 의암(의로운 바위)이라고 불렀으며 그를 위해 진주의기사(진주의 의로운 기생의 사당)를 세우고 매해 6월마다 제사를 지내면서 그를 추모하였다.

이렇듯 임진조국전쟁시기 대부분의 봉건통치배들은 나라와 민족보다도 제한목숨이 두려워 싸움한번 변변히 해보지도 못하고 도망쳤지만 사회적으로 천시당하던 기생들뿐아니라 연약한 녀성들까지도 외적을 물리치는 싸움에 떨쳐나 용감히 싸워 전쟁승리에 기여하였다.

오늘도 우리 녀성들은 항일무장투쟁시기와 조국해방전쟁시기에 발휘한 녀성들의 불굴의 신념과 혁명정신을 이어 혁명의 한쪽수레바퀴를 든든히 떠메고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령도따라 사회주의강국건설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서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