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16세기 조선의 선진적인 사상가 리률곡

 2020.7.21.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리률곡이 내놓은 사상들을 보면 그가 당대 사회에서는 선진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이였다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는 도탄에 빠진 인민들의 생활에서 당시 사회의 부패성을 보게 되였으며 불공평한 사회제도와 법들을 개혁하고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방위하기 위한 일련의 안들도 내놓았습니다.》 (김정일전집》 제2권 65페지)

리률곡(이름은 리이, 1536-1584)은 16세기에 활동한 선진적인 사상가이며 이름있는 철학가이다. 률곡은 리이의 호이다.

리률곡은 조선봉건왕조시기 녀류화가이며 시인이였던 어머니 신사임당(1504-1551)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신사임당은 부드러우면서도 대바른 성격, 정력적이고 부지런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녀자의 몸이지만 어려서부터 학문을 익히고 시와 문장을 잘 지었으며 그림과 글씨, 수놓이 등에서도 남다른 재능을 보여주었다. 신사임당은 화조화를 특별히 잘 그리였는데 풀벌레, 포도, 기러기, 물오리, 쏘가리, 백로, 매화, 가지 등 집주변에서 흔히 볼수 있는 소재들을 취급하였다. 특히 그림 《쏘가리》는 그의 아들 률곡 리이의 글이 씌여져있어 더욱 가치있는것으로 되고있다. 신사임당은 집안살림에 매여있는 녀성의 몸이였으므로 규수화가로 한생을 보냈으나 그가 그린 화조화들은 밝고 섬세하며 현실감과 향토미를 자아내는것이 특징이다. 신사임당은 화가로서뿐아니라 시인으로서도 문학사에 뚜렷한 자욱을 남기였다.

이러한 어머니의 영향을 받으며 자란 리률곡은 1564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대사간, 리조판서, 우의정 등의 벼슬을 하였다. 그후 벼슬을 그만두고 정계에서 물러나 소현서원(황해남도 벽성군 석담리에 있음)을 차려놓고 후비양성과 학문연구에 힘썼다. 1570년대에 동인과 서인사이의 당파싸움을 조정하려다가 실패하고 서인당파의 편을 들었으나 당시 봉건국가앞에 나서고있던 초미의 정치, 경제적 중요문제들의 해결책을 제기하는데서 진보적견해를 내놓았다.

리률곡은 당시의 사회를 개혁하여 나라의 부강과 백성들의 생활안정을 도모하려 하였다. 그는 대토지소유자들에 의한 토지의 무제한한 점유를 반대하고 백성들에게 가해지는 허다한 부과를 경감할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정치는 마땅히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치가 되여야 하며 백성을 중시하는 중민정치가 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백성을 편안히 생활하게 하는것은 옛날에도 지금도 급선무이며 나라의 생산을 풍부히 하여 백성들을 구제하는것이 현재 가장 중요하고 급한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임금과 백성과의 관계에서 임금보다 백성이 더 귀하며 백성은 먹는 일이 가장 중요한즉 임금된자의 임무는 백성들이 풍족하게 살게 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그는 당시 백성들을 구제하는 길은 온갖 페단 즉 각종 부담을 본인이 물지 못할 때 일가와 이웃사람에게 책임지우는 페단, 백성들의 공물부담이 너무 많은 페단, 중간착취의 페단, 부역을 불공평하게 지우는 페단, 관리들이 가렴주구하는 페단을 없애는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봉건국가가 인민들로부터 수탈하던 공물을 현품대신 쌀로 환산하여 받고 그것으로 필요한 물자를 사서 쓰도록 할것을 제기하였다. 이것은 인민들을 착취한다는 본질에서는 변함이 없는것이였으나 중간착취를 없앰으로써 인민들의 부담을 얼마간 덜수 있고 상업과 수공업의 발전을 촉진한다는 측면에서는 일정하게 긍정적인 제안이였다.

그는 백성들의 토지에서의 류리와 도주가 그들의 천성이 악해서가 아니라 백성들의 경제적파산과 생활의 곤궁때문이라고 지적하고 봉건통치배들의 기생충적생활을 신랄히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만일 통치배들이 사회적페단을 개혁하지 않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착시키지 않는다면 원망은 멈추어지지 않을것이며 적미, 황건폭동과 같은 큰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단언할수 없다고 경고하였다.

리률곡은 봉건통치배들이 낡은 법을 고집하는것을 비판하면서 어느 시대에나 적용되는 보편타당하고 영원한 법이란 없으며 비록 성현이 만든 법이라도 시간이 흐르고 대상이 변하면 페단이 생기는 법이니 법제도 마땅히 개혁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리률곡의 사상의 애국적성격은 그의 국방사상에서 집중적으로 표현되였다.

그는 당시 봉건통치배들이 《태평성세》를 노래하며 국방에 대해 전혀 무관심하고 저들의 부귀와 영화만을 누리고있는 현상을 비판하면서 지금 군사가 퇴페붕괴되고 국경의 방비가 없으니 유사시에는 아무리 훌륭한 전략가가 있어서 전략을 세우고 아무리 훌륭한 장수가 있어서 통솔한다 할지라도 끌고나갈 병사가 없으니 어찌 혼자서 싸울수 있겠는가고 한탄하였다.

또한 그는 국방을 강화하는데서 중요한것은 백성들의 부역을 경감하고 늙은이와 어린이들을 구원하며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의 토지에서 안정하여 농사를 짓게 해주는것이라고 하면서 일단 유사시를 고려하여 10만명의 정예부대를 양성하며 성들을 고쳐 쌓을것을 국왕에게 적극 제의하였다. 이것은 임진왜란을 예견한 당시의 조건에서 진보적인 의견이였다.

리률곡은 중소지주계급의 리해관계를 대변한 《사림파》의 상대적긍정성을 계승한 사람으로서 그의 사상에는 초기 《사림파》가 내세웠던 당시 현실비판과 사회개혁사상에서 일련의 긍정적인 사상이 제기되였다.

그가 사망한 후 로론파량반들은 그의 사상에서 부정적측면만을 끌어내여 끝없는 공리공담을 벌려놓았다. 그러나 그의 사상에서 현실문제에 주의를 돌린 점을 비롯한 일련의 진보적인 측면은 실학자들에 의하여 계승되였다. 그가 남긴 글들은 《률곡전서》로 묶어져 전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