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홍춘희
2018.9.1.
김원균, 오늘 우리 인민들속에는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것은 바로 선생이 창작한 위대한 수령송가, 조국송가의 선률들이 세대와 세대를 이어 이 땅우에 영생불멸의 노래로 끝없이 울려퍼지고있기때문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김원균선생은 우리 나라의 이름난 작곡가였습니다.》 (《김정일선집》 증보판 제24권 92페지)
생전에 김원균선생은 늘 동료들에게 내가 《김일성장군의 노래》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를 창작할수 있은것은 인생의 가장 큰 영광이고 행운이였다. 이 두편의 송가는 정녕 예술적재능의 산물이기전에 이 영광과 행운에 대한 나의 심장의 대답이고 분출이였다라고 이야기하군 하였다.
영생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가 창작되던 당시 작곡가는 30대에 갓 들어선 열혈청년이였다.
주체35(1946)년 5월 당시 평양시의 어느 한 예술단체 부장으로 사업하고있던 김원균선생은 뜻밖에도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께서 친히 다듬어 보내주신 한편의 가사를 받아안게 되였다.
그 가사가 바로 혁명시인 리찬선생이 쓴 《김일성장군의 노래》였다.
순간 그의 가슴은 세찬 격정으로 터질것만 같았다.
위인의 노래가 태여난다. 참으로 생각만 해도 가슴부풀고 긍지가 차오르는 순간이였다.
가사의 구절구절을 읽어내려갈수록 그의 눈앞에 해방전 일제의 학정아래 피눈물로 강토를 적시던 우리 인민의 수난의 력사가 비껴들었다.
바로 그 력사속에 김원균선생의 지난날도 있었던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민족의 구세주, 민족의 태양이 조국땅을 비치고있었다.
그 태양이 수천만 조선민족의 운명을 책임지고계신다.
이런 분을 어찌 노래하지 않을수 있으랴.
그는 온 나라 인민의 소망이 깃든 이 력사적과제를 자신이 맡아안을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너무도 아름찬 과제였다.
그때 당시 김원균선생은 미술과 음악을 사랑하여 그에 대한 조예는 깊었지만 전문교육을 받은 작곡가는 아니였던것이다. 단지 해방에 대한 희열과 감격의 가슴속충동을 누룰수 없어 해방후 첫 가요행진곡인 《조선행진곡》을 작사작곡한것으로 하여 사람들속에 알려진 로동자출신의 신인작곡가였다.
그는 매일밤을 지새우다싶이 하면서 기타를 들고 선률을 모색해나갔다. 위대한 수령님을 칭송하는 노래는 장엄하고 힘있으며 밝고 활기있어야 한다는것이 그의 생각이였다.
이런 악상에 기초하여 끊임없이 사색하고 탐구하기를 그 몇번…
그날도 이른 새벽 대동강가를 거닐며 선률을 더듬던 그의 눈앞에 평양공설운동장(당시)에서 개선연설을 하시던 김일성장군님의 모습이 삼삼히 떠올랐다. 주석단가까이에서 그이의 모습을 뵈오면서 느꼈던 감격과 흥분이 또다시 온몸에 타오르는것을 느끼는 순간 그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선률이 흘러나왔다.
김원균선생은 순간 무릎을 쳤다. 바로 이것이다.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선률을 부르는 그의 눈앞에 누리를 물들이며 불쑥 떠오르는 아침해가 눈부시게 비쳐들었다. 그로부터 한달후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김일성장군의 노래》에 대한 첫 시청회가 진행되였다. 노래는 관중의 심장을 순간에 틀어잡았으며 삽시에 전국의 방방곡곡으로 보급되였다. 노래의 보급과 함께 김원균선생도 온 나라가 다 아는 재능있는 작곡가로 떠받들리였으며 이때부터 작곡가로서 그의 영광넘친 인생의 첫 걸음이 시작되였다.
그의 뛰여난 예술적재능은 그후 위대한 수령님의 세심한 지도와 관심속에 태여난 조국송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창작에서 더욱 뚜렷이 과시되였다.
주체35(1946)년 가을 창작가들을 부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라의 주인이 된 우리 인민에게 하루빨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를 지어줄데 대하여 교시하시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의 곡창작을 맡았을 때 김원균선생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였다고 한다. 땅은 있어도 참다운 조국의 의미는 다 몰랐던 우리 인민,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자랑해도 나라를 대표할 노래에 대하여 생각도 못하던 우리 인민에게 위대한 수령님은 과연 어떤 노래를 주시려고 하실가.
우리 공화국을 대표할 노래는 과연 어떤 선률이여야 하는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에는 아름다운 조국과 슬기로운 투쟁전통을 가진 조선인민의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담아야 한다고 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의 참뜻을 새기기 위해 선생은 인민들속으로 들어갔다. 해방된 조국땅에서 울리는 인민의 심장의 목소리에서 노래의 선률을 찾고싶었고 그들의 목소리를 선률에 담고싶었던것이다. 여러달에 걸치는 피타는 탐구와 고심, 사색과 사색속에 선생은 드디여 장중하면서도 아름답고 숭엄하면서도 환희와 격동이 맥박칠뿐아니라 민족적정서와 숨결이 느껴지는 선률을 찾아내여 곡을 완성하여나갔다.
주체36(1947)년 6월 몸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에 대한 시청회에 참가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작곡가들이 지은 여러편의 곡들을 다 들어주시고 김원균선생이 작곡한 선률을 선정해주시고 노래의 장중한 성격과 참뜻이 더 힘있게 살아나도록 노래의 형상방도까지 세심히 가르쳐주시였다.
이처럼 김원균선생은 조국에 대한 열려한 사랑과 무한한 헌신성, 비상한 창작적열정과 사색을 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를 창작해냄으로써 위대한 수령님께서 찾아주신 영광스러운 우리 조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를 온 세상에 선포하는데 적극 이바지하였다.
하기에 주체95(2006)년 5월 9일 새로 건설된 평양음악대학 (당시)에 나오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온 나라 전체 인민이 대학에 장군님의 존함을 모시도록 하여줄것을 한결같이 소원하고있는데 허락하여주실것을 말씀올리는 일군들에게 고맙다고 하시면서 자신께서는 음악대학명칭에 리면상선생의 이름을 달겠는가, 김원균선생의 이름을 달겠는가 하는것을 많이 생각해보다가 아무래도 수령을 칭송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를 제일 선참으로 창작한 김원균선생의 이름을 다는것이 더 의의가 있다고 보았다고 예상밖의 말씀을 주시였다.
영생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를 창작한 김원균선생, 그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담아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평양음악대학명칭에 김원균선생의 이름을 다는것은 나라의 음악전통과 력사를 보여주는데도 의의가 있다고 하시면서 평양음악대학에 김원균선생의 이름을 다는 조건에서 대학에 그의 반신상을 세워야 한다고 교시하시였다.
이렇듯 백두산절세위인들의 따뜻한 품속에서 자기 희망을 꽃피워 온 김원균선생은 공화국의 력사에 수놓아진 작곡가로 영생하고있으며 그의 영광과 행복에 대한 심장의 대답이고 분출인 《김일성장군의 노래》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는 오늘도 래일도 영원히 이 땅우에 영생불멸의 송가들로 끝없이 울려퍼질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