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천문학은 그후 고려시기와 리조시기에도 계속 발전하였습니다.》 (
오래전부터 우리 인민은 과학기술분야에서 높은 발전을 이룩하여 인류문화의 공동의 보물고에 크게 기여하였다.
다른 모든 과학부문과 마찬가지로 고려의 천문기상학도 일찍부터 발전하여 당시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삼국시기에 발전한 천문기상관측기술을 계승하여 고려 475년간에는 이 분야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다. 그 가운데서 중요한것은 우리 민족의 첫 통일국가인 고려에서 천문기상관측사업이 중앙에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국가적인 사업으로 진행되고 발전해온것이다.
고려이전시기인 삼국시기에는 천문기상관측사업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개 나라 령역에서 제각기 진행되여왔다면 고려시기에 이르러서는 이 사업이 우리 나라의 전체령역에 걸쳐 중앙으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관측규범과 세칙에 따라 진행되게 되였다. 고려시기에는 앞선시기 우리 인민들이 이 분야에서 쌓은 경험과 지식에 토대하여 그리고 이 시기 인민들이 쌓아올린 생산기술과 과학문화의 여러 분야에서 이룩한 성과들을 받아들이면서 더욱 체계화되고 과학화되였다.
고려에서는 건국초기부터 천문기상관측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천문대와 관측을 전문적으로 맡아보는 관리들을 두었다. 또한 이러저러한 관측자료들에 기초하여 기상학을 더욱 세분화하여 관측하는 사업도 상당히 심화시키였다.
《증보문헌비고》의 《상위고》는 1770년에 《동국문헌비고》의 《상위고》로 처음 편찬된데 이어 《증정문헌비고》의 《상위고》로 수정보충되였다가 1903년이후부터 1906년까지 다시 수정보충하면서 1770년이후부터 1906년까지의 제반 사실들을 더 첨부한것이다.
특히 여기에는 고려시기의 기상관측에 대한 자료들이 풍부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수록되여있다.
고려시기에는 기상관측을 기본기상관측과 보조기상관측으로 나누어 진행하였다.
기본기상관측으로는 서리와 바람, 비, 눈에 의한 이상저온관측, 이상고온관측, 안개와 구름관측, 비와 흙비관측, 눈과 얼음관측, 우박과 우뢰에 대한 관측들이고 보조기상관측으로는 무지개관측, 무리관측, 기체관측, 동식물관측 등이였다.
고려시기 우리 인민은 이처럼 기상관측을 세분화하여 진행하면서 이 분야에서 뛰여난 슬기와 재능을 보여주었다.
고려시기 우리 민족이 기상관측분야에서 보여준 뛰여난 슬기와 재능은 첫째로, 세계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가지고 바람관측을 진행한데서 찾아볼수 있다.
고려에서는 바람에 대한 관측을 그 세기에 따라 바람을 7개 등급으로 나누어 진행하였다. 구체적으로 보면 큰 바람(태풍), 사나운 바람(폭풍), 돌개바람(선풍), 세찬바람(렬풍), 빠른 바람(질풍), 회오리바람(구풍), 된바람(한풍)에 대한 관측이다.
이와 함께 바람의 방향도 동, 서, 남, 북, 북서, 북동, 남서, 남동의 8개 방위로 나누고 그 정형을 밝혔으며 바람이 불기 시작한 시간과 지속시간 등까지도 정확히 기록하였는데 그 기록자료만도 142건이나 된다.
그 대표적인 기록자료는 다음과 같다.
《태종 15년(932) 5월 갑신일에 서경에서 큰 바람이 불어 관청건물이 무너지고 지붕의 기와가 모두 날리였다.》
《현종 2년(1011) 6월 정사일에 사나운 바람(폭풍)이 불어서 기와장이 날리고 나무가 뽑히였다. 4년(1013) 4월 임신일에 큰 바람이 불다가 3일만에 멎었다.》
《정종 6년(1040) 7월 정축일에 폭우가 내리고 강한 바람이 불어 길가던 사람들이 날려가 죽은 사람까지 있었고 광화문의 치문이 무너졌다.》
《명종 18년(1188) 10월 정축일에 큰 바람(태풍)이 불고 비가 내리였는데 3일동안 계속되였다. 27년(1197) 9월 갑인일에 폭풍이 불어 흥국사 남쪽길가의 나무가 뽑히워 감옥안의 담장들이 모두 허물어지고 감옥가까이에 새로 설치한 보량 18간이 일시에 무너졌다.》
《저왕(충정왕) 3년(1351) 정월 초하루 기사일에 강한 회오리바람(구풍)이 갑자기 불었는데 다음날에야 멎었다.》
《경효왕(공민왕) 16년(1367) 2월 임술일부터 2일동안 큰 바람(태풍)이 불었고 3월 신묘일에 폭풍이 하루종일 불며 누런 먼지가 하늘에 가득하여 사람들이 눈을 뜰수가 없었다.》
《인종 18년(1140) 6월 무진일에 동북풍이 무려 5일동안 계속되였으므로 모든 곡식과 초목들이 절반이상 말라죽고 지렁이가 손에 움켜쥘 정도로 길옆에 나와 죽었다.》
《의종 11년(1157) 정월 무진일에 바람이 서북쪽에서 불어왔다.》
《의효왕(충숙왕) 후 6년(1337) 10월 병신일에 북풍이 크게 불어 모래와 돌들이 날리였는데 사람과 말들이 앞으로 나갈수가 없었다.》
이상의 관측자료들은 세계적으로도 가장 이른시기의 관측으로 된다.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볼 때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바람에 대한 과학적인 관측을 처음으로 하였다고 한다.
실례로 영국의 뷰포트가 풍력등급을 나눈것과 아일랜드의 로빈슨이 풍력계와 비교하여 보면 영국의 뷰포트가 1805년에 처음으로 풍력등급을 13개 등급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일랜드의 로빈슨이 1846년에 처음으로 풍력계를 고안하였는데 뷰포트시기에는 기구에 의한 바람의 정량적관측은 없었다.
그러나 뷰포트가 바람의 등급을 정한것보다 몇백년이나 거슬러 올라가 우리 나라에서는 바람을 7개의 등급으로 나누어 관측하였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바람에 대한 관측에서 세계적으로 앞섰다는것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생동한 자료로 된다. 또한 고려시기 바람에 대한 관측에서는 그 피해상황까지 관측하였는데 이것은 해당지역의 향토를 연구하고 자연환경의 보호대책을 세워나가는데서도 큰 의의를 가진다.
이처럼 고려시기 우리 민족은 세계적으로 제일먼저 과학적인 바람관측을 진행한 슬기롭고 재능있는 민족이다.
고려시기 우리 민족이 기상관측분야에서 보여준 뛰여난 슬기와 재능은 둘째로, 세계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가지고 이상기온관측을 진행한데서 찾아볼수 있다.
《증보문헌비고》의 《상위고》에는 우선 고려시기에 진행한 이상저온현상을 관측한 자료로서 서리관측기록은 37건, 눈관측기록은 17건, 비와 눈관측기록은 10건, 추위에 대한 관측기록은 15건이 수록되여있다.
그 대표적인 자료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현종 18년(1027) 4월 갑술일에 서리가 내려 곡식의 싹들이 해를 입었다. 5월에 공주에 서리가 내려 곡식의 싹들이 해를 입었다.》
《경효왕(충렬왕) 6년(1280) 4월 계미일부터 련 2일동안 서리가 내려 벼모들이 죽었다. 21년(1295) 4월 을유일에 서리가 내려 삼과 보리가 피해를 입었다.》
《신우 6년(1380) 7월 갑인일부터 련 2일동안 서리가 내렸다.》
《공양왕 4년(1392) 7월 신묘일에 서리가 내렸는데 날이 몹시 추웠다.》
《태조 14년(931) 2월 경자일에 많은 눈이 내려 평지에 2자 되게 쌓이였다.》
《문종 9년(1055) 4월에 비와 눈, 우박이 내렸다.》
《인종 3년(1125) 2월 을사일 밤 많은 눈이 내려 평지에 1자이상 되게 쌓이였다. 21년(1143) 3월 병신일에 많은 비와 눈이 내려 사람들속에서 얼어죽은 사람이 있었다.》
《의효왕(충숙왕) 11년(1324) 4월에 비와 우박, 눈이 내려 얼어죽은 사람이 있었다.》
《의종 19년(1165) 3월 신유일에 날이 차고 비가 많이 내려 왕궁을 호위하던 군사 9명이 얼어죽었다.》
《명종 15년(1185) 여름에 추워서 파리가 없었다.》
《경효왕(충렬왕) 3년(1277) 5월 무오일에 바람이 불고 날이 추워서 털옷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다.》
《경효왕(공민왕) 16년(1367) 6월 임신일에 북풍이 불고 날이 대단히 추워서 성안의 모든 사람들이 겹으로 된 털옷을 입었다.》
우의 실례 1, 2, 3, 4는 제철이 아닌 때에 서리가 내린 현상인데 그 당시의 기록을 보면 서리는 대체로 4월에 내린것이 많고 또 제철이 아닌 5월이나 7월에도 내리였으며 서리가 2-3일간 지속되였다는것은 매우 심한 이상저온현상이였다. 실례 5, 6, 7, 8, 9, 10은 해당 계절에 맞지 않게 봄, 여름철에 찬바람이 불고 비와 눈, 우박이 몹시 내려 추웠다는 이상저온의 실태를 반영하고있으며 또한 여기에는 농작물의 피해정형, 여름에 파리가 없었다는것까지도 구체적으로 밝혀주었다.
《증보문헌비고》의 《상위고》에는 다음으로 고려시기에 진행한 이상고온현상을 관측한 자료가 11건이 수록되여있다.
그 대표적인 자료는 다음과 같다.
《의종 4년(1150) 10월에 날씨가 따뜻하였다. 12년(1158) 겨울에 날씨가 따뜻한것이 3-4월의 봄날과 같았다.》
《의효왕(충숙왕) 11월(1321) 계미일에 날씨가 온화한것이 봄날과 같았다.》
《경효왕(공민왕) 6년(1357) 11월 병진일에 날씨가 3월의 봄날과 같이 따뜻하였다. 11년(1362) 11월에 기후가 봄날과 같이 따뜻하였는데 밭들에 떨어진 콩에서 새 잎사귀가 나오기까지 하였다. 16년(1367) 12월 정미일에 아지랑이가 봄날과 같이 피여났는데 여러날동안 계속되였다. 18년(1369) 10월 정해일에 날씨가 봄날과 같이 따뜻하였다. 무자일에 날씨가 봄날과 같이 따뜻하였다.》
이상의 실례들은 모두 10-12월의 추운 계절에 평년보다 훨씬 따뜻하였는데 그 지속시간까지 밝히였다.
이것 역시 세계최초의 온도측정이였다.
실례로 1592년에 이딸리아의 갈릴레이가 일종의 공기온도계를 발명하고 퍽 후에 빌로트가 수은온도계를 창안하였다. 1720년에 화씨눈금이, 1772년에 섭씨눈금이 고안되였다. 따라서 기온관측에 온도계가 리용된것은 18세기 중엽이후이다.
그러나 고려시기 우리 민족이 700-800년전에 기온을 서리, 바람, 비, 눈과 같은 현상이나 사람의 체감, 농작물에 미친 피해상황 등을 통하여 정성적으로 관측하였다는 자료는 세계적으로 앞선 방법을 적용한 매우 슬기로운 민족이라는것을 보여주는 생동한 자료로 된다고 할수 있다.
고려시기 우리 민족이 기상관측분야에서 보여준 뛰여난 슬기와 재능은 셋째로, 세계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가지고 안개와 구름에 대한 관측을 진행한데서 찾아볼수 있다.
고려시기의 안개관측에서는 그 형성시각과 지속시간, 시정, 농도 등 여러 등급으로 나누어 관측을 진행하였고 구름관측에서도 구름의 색갈과 시간, 방향, 형태, 운량까지 구체적으로 진행하였다.
《증보문헌비고》의 《상위고》에는 고려시기에 진행한 안개에 대한 관측자료가 223건, 구름에 대한 관측자료가 67건이 수록되여있다.
그 대표적인 자료는 다음과 같다.
《현종 4년(1013) 정월 경신일에 누런 안개가 끼여 사방이 자욱하였다. 5년(1014) 10월 정축일에 하루종일 짙은 안개가 끼였다. 11월 무술일부터 3일동안 짙은 안개가 끼였다 11년(1020) 10월 갑진일에 짙은 안개가 끼여 지척에서도 사람과 물건을 분간하지 못하였다.》
《문종 21년(1067) 10월 초하루 병오일에 검은 안개가 끼여 사방이 자욱하였다. 37년 12월 초하루에 짙은 안개가 끼였는데 여러날동안 계속되였다.》
《의종 10년(1156) 4월 정해일에 황적색안개가 사방이 자욱하였다. 18년(1164) 11월 계묘일에 음침한 안개가 끼여 사방이 자욱하므로 길가던 사람들이 길을 잃었다.》
《명종 4년(1174) 12월 을미일에 누런 안개가 끼여 사방이 자욱하였다. 7년(1177) 2월 임오일부터 3월 기유일까지 밤낮으로 항상 짙은 안개가 끼여있었다.》
《태조 19년(936) 9월에 태조가 신검을 칠 때 검과 창과 같은 흰 구름이 아군의 머리우에서 일어나 적진으로 향하였다.》
《예종 17년(1122) 4월 임신일 초저녁때에 검은 구름이 서북쪽에서 일어났는데 푸른 기체가 구름사이에서 나타나기도 하고 붉은 기체가 구름의 좌우편에 끼여서 함께 동남쪽으로 향하였다가 초경에 이르러서야 사라졌다. 4월 병신일에 남쪽에 이상한 기체가 나타났는데 오색이 선명하더니 얼마후에 흩어졌다.》
《명종 8년(1178) 10월 신묘일 깊은 밤에 짙은 구름이 끼여서 어둡고 캄캄한데 서북쪽으로는 은은한 빛이 땅에 비치여서 사람그림자가 있었는데 밤이 지나서야 사라졌다.》
《고종 11년(1224) 9월 을축일에 붉은 구름이 서남쪽으로부터 북쪽에 이르기까지 불그림자와 같았다. 44년(1257) 6월 갑술일에 황적색의 구름이 하늘을 둘러싸고있었는데 빛이 낮과 같았고 2일동안 계속되였다. 2월 계미일 밤에 붉은 기체가 하늘에 닿았는데 빛의 밝기가 낮과 같았다.》
《원종 원년(1260) 11월 기미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검은 구름이 하늘에 퍼져있었고 2경에 서북쪽과 동남쪽에서 한갈래의 붉은 기체가 하늘에 닿았으며 3경에도 서북쪽에서 일어나 하늘에 닿았다.》
우의 실례 1, 2, 3, 4에서 보여주는바와 같이 안개관측에서는 지속시간과 시정까지 관측하였으며 농도에 따라 안개를 검은 안개, 황적색안개, 누런 안개, 짙은 안개, 음침한 안개 등으로 구분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안개관측에서는 형성시각, 지속시간, 시정, 농도에 따라 4개 등급으로 분류하여 관측하였는데 이것은 현재 쓰고있는 관측규정에 매우 접근한것으로서 선행시기에 비하여 정량적관측에로 넘어간다는것을 보여준다.
우의 실례 5, 6, 7, 8, 9에서 보여주는바와 같이 구름에 대하여서는 그 색갈, 시간과 방향, 형태와 운량에 대하여서까지 다양하게 관측하였을뿐 아니라 밤에도 구름의 형성방향과 동태, 이동상태까지 구체적으로 관측하였으며 노을, 빛고리 등에 의하여 생기는 구름색갈, 규모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관측하였는데 이것은 정상적인 관측이기는 하지만 현대관측범위에 비교적 가까운것으로서 세계적으로 가장 앞선 관측기록으로 된다.
실례로 1803년에 영국의 호와드는 구름모양을 처음으로 분류하였는데 그는 구름의 주형을 권운(cirrus), 적운(cumulus), 층운(stratus) 등 3개로 정하고 이 주형들을 결합하여 권층운(cirro-stratus), 권적운(cirro-cumulus), 층적운(cumulus-stratus) 등으로 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이것도 불완전한 분류이다.
우의 실례에서 보여주는바와 같이 고려시기에 진행한 구름관측에서는 호와드의 분류보다는 구름모양이 뚜렷하지 못한 점도 있지만 서방보다 500여년간이나 앞서 관측하였으며 구름의 관측에서도 구름의 색갈, 시간과 방향, 형태, 운량, 동태에 대하여 주야로 관측하였다는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높은 수준으로서 우리 민족의 뛰여난 슬기와 재능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수 있다.
고려시기 우리 민족이 기상관측분야에서 보여준 뛰여난 슬기와 재능은 넷째로, 세계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가지고 비와 우박, 우뢰에 대한 관측을 진행한데서 찾아볼수 있다.
《증보문헌비고》의 《상위고》에는 우선 비와 흙비에 대한 관측자료가 각각 52건, 4건이 수록되여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강우량이 년내분포가 고르지 못하고 또한 변동이 심하므로 예나 지금이나 강우문제는 농업기상학적으로 매우 중요하였다. 그러므로 고려시기에도 비에 대한 관측을 비, 작은 비, 큰 비, 궂은 비, 장마비, 오랜 비 등으로 세분화하고 진행하였다.
그중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태조 7년(924) 가을 수도에서 큰물이 나 민가들이 떠내려가고 거리에 물이 넘쳐났으며 물이 붉은색으로 되였다.》
2. 《현종 17년(1026) 7월 수도에 큰비가 무려 4일동안 내려서 민가들이 허물어지고 물에 떠내려갔다. 9월에 서경에서 큰물이 나서 파괴되고 물에 떠내려간 민가가 80여호나 되였다.》
3. 《선종 5년(1088) 5월 폭우로 강물이 범람하여 강가에 있던 민가들이 떠내려갔고 배들이 전복되거나 떠내려갔다.》
4. 《예종 8년(1113) 7월에 큰비가 내려 평지의 물깊이가 1자이상나 되였다.》
5. 《고종 12년(1225) 5월에 2일동안 큰비가 내려 평지에 물깊이가 7-8자가량 되였다. 43년(1256) 2월에 수은과 같은 비가 내렸다. 45년(1258) 6-7월까지의 기간에 장마가 들었다.》
6. 《신종 3년(1200) 윤 2월 무신일에 사방이 캄캄하면서 흙비가 내리였는데 2일동안 계속되였다. 경오일에도 사방이 캄캄하여지면서 흙비가 내렸다.》
7. 《원종 원년(1260) 정월 갑오일에 흙비가 내리였고 해가 어두워져서 빛이 없었다.》
우의 실례 4, 5는 비물이 평지에서 땅에 스며드는 깊이를 측정한것으로 강수량의 정량적관측의 맹아를 보여주는 자료들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우리 나라가 1441년에 측우기를 발명하여 강우량의 정량적관측을 시작할수 있게 하고 나아가서 측우기에 의한 기상관측의 시문을 열어놓은 기초로 되는 귀중한것들이다.
실례 6, 7은 흙비에 대한 관측자료인데 원래 비가 내리는 상태를 무심하게 보아서는 보통비인지 흙비인지 가늠할수 없으나 흙비를 관측하였다는것은 이 시기 우리 민족이 비에 대한 관측사업을 매우 세밀하게 진행하였다는것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증보문헌비고》의 《상위고》에는 또한 우박에 대한 관측자료가 13건이 수록되여있다.
우박에 대한 관측에서는 우박의 크기와 형태, 그 우박이 내린 량 등으로 세분화하여 진행하고있다.
그중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의종 13년(1159) 4월 경인일에 큰 우박이 내리였는데 3치되게 쌓이였다. 14년(1160) 8월 정미일에 우박이 내리였는데 크기가 주먹만 하였다.》
《명종 14년(1184) 4월 무오일에 우박이 내리였는데 크기가 살구만 하였다. 16년(1186) 8월에 우박이 동주와 장주지방에 내리였는데 크기가 주먹만 하여 지붕의 기와가 모두 부서졌다.》
《경효왕(충렬왕) 2년(1276) 윤 3월 을묘일에 녕월지방에 우박이 내리였는데 그 크기가 따오기알만 하여 참새들이 맞아 죽기도 하였다. 27년(1301) 5월에 경상도 안동부지방에 큰 우박이 내리였는데 그 우박 한개를 몇사람의 힘으로도 들수가 없었다. 우박들에 노루와 사슴들이 맞아 죽기도 하였다.》
《의효왕(충숙왕) 9년(1322) 9월 을미일에 우박이 내리였는데 그 크기가 오얏과 매화열매만 하였으며 그 모양이 네모져서 마치 질려풀 같았다.》
우의 실례에서 보여주는바와 같이 우박의 크기를 대체로 과일의 크기, 주먹 등의 크기와 비교하였으며 우박의 형태까지 자세히 기록하였다. 우박은 농작물의 성장, 결실에 큰 영향을 미치므로 그에 대한 관측기록이 많아야 하겠으나 다른 자료들에 비하여 비교적 적다.
《증보문헌비고》의 《상위고》에는 또한 우뢰에 대한 관측기록은 41건이 수록되여있다.
그중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목종 9년(1006) 6월 무술일에 천성전의 치문에서 우뢰가 울고 벼락이 쳤다.》
《문종 8년(1054) 5월 을유일에 회경전에서 우뢰가 울고 벼락이 쳤다. 9년(1055) 9월 갑오일 혜일 중광사의 탑에서 우뢰가 울고 벼락쳐서 불각 경루가 불탔다.》
《선종 6년(1089) 6월 임자일에 회빈문에서 우뢰가 울고 벼락이 쳤다. 7년(1090) 8월 신해일에 보제사의 서쪽골목길에서 우뢰가 울고 벼락이 쳤다. 또 건릉의 소나무에 벼락이 쳤다.》
《의종 원년(1147) 5월 을유일 밤에 우뢰가 울고 내제석원에 있던 사람이 벼락을 맞았다. 4년(1150) 10월 을유일 운흥의 창고에 우뢰가 울고 벼락이 쳤다.》
《경효왕(충렬왕) 5년(1279) 4월 경자일에 보제사에서 우뢰가 울고 벼락이 쳤다. 14년(1288) 11월 낮이 어두웠고 우뢰가 울면서 사람에게 벼락이 쳤다.》
우의 실례에서 보여주는바와 같이 우뢰에 대한 관측은 제철이 아닌 때 있었던 이상현상, 제철이라고 하더라도 집이나 사람, 집짐승, 나무 등에 벼락쳐서 피해가 심했을 때에 진행되였으며 우뢰현상은 8월 중순이전에 많았으며 그 이후에 나타난 경우는 특이한것으로 보아진다.
이상에서 보는바와 같이 우리 민족은 우박이나 우뢰에 대한 관측에서 발생시간, 크기, 형태, 피해정형 등을 구체적으로 진행하였는데 이것은 현대관측규정에 접근한것이라고 할수 있다.
《증보문헌비고》의 《상위고》에 반영된 고려시기의 기본기상관측에 대한 자료들은 우리 선조들이 뛰여난 슬기와 재능을 가지고있다는것을 보여주는 반증자료로 될뿐 아니라 당대에 기상관측분야에서 다른 나라들에서는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귀중한 자료로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