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우리 인민은 문화를 찬란히 꽃피워왔으며 훌륭한 문화재를 수많이 창조하여 나라와 민족의 명성을 온 누리에 떨쳤습니다.》 (《
슬기롭고 문명한 우리 민족은 오랜 옛날부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워왔으며 훌륭한 문화적재부를 수많이 창조하였다.
고구려초기 문헌인 《류기》의 편찬을 놓고보아도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잘 알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태학박사 리문진에게 명령하여 옛력사를 요약하여 〈신집〉5권을 만들었다. 건국초기에 처음 문자를 사용할 때 어떤 사람이 사실 100권을 기록하고 이름을 〈류기〉라고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덜어버리고 수정하였다.》
우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에서는 나라를 세운 초시기에 어떤 사람이 당시에 알려졌던 사실들을 기록하여 100권의 분량으로 된 문헌을 만들고 이름을 《류기》라고 하였는데 그것을 그후 《신집》이라는 력사책을 만드는데 리용하였다는것이다.
물론 《류기》가 오늘까지 전해지지 않아 그 내용과 서술체계에 대하여 잘 알수는 없지만 그것이 후세에 전해지면서 문헌편찬에 자료적으로 리용되였던것만큼 그후에 편찬된 문헌들에 기초하여 그 내용과 서술방식을 어느 정도 가늠해볼수 있다.
《류기》는 《사실》을 기록해놓은 문헌이였다. 여기서 말하는 《사실》이란 객관적으로 현실에 실재하였던 일이다. 즉《류기》는 고구려의 건국초기에 현실적으로 실재하였던 일들을 기록한 문헌이였다.
《류기》는 분량이 100권이였다. 옛날에 《권》은 권축본 즉 두루말이형태로 장정한 문헌을 세는 단위였다.
《류기》가 두루말이형태로 이루어진 문헌이였다고 해도 그 분량이 100권이라면 당시로서는 상당히 부피가 큰 문헌이였다. 이것은 고구려초기 문헌편찬의 발전수준을 보여준다.
《류기》는 봉건국가가 주관하여 편찬한 문헌이 아니라 《어떤 사람》 즉 개인이 만든 문헌이였다.
고구려의 건국초기에 개별적인 사람이 이처럼 분량이 많은 문헌을 독자적으로 편찬할수 있었다는것은 당시 사람들의 높은 문화적식견과 지식수준, 미학정서적요구의 수준이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었다고 볼수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류기》를 가리켜 《옛력사》, 《고사》라고 하였다. 이것은 《류기》가 반영하였던 내용을 집약적으로 말해주는 표현이다.
지난날 봉건사회에서 력사란 일반적으로 지나간 시기에 있었던 사건, 사실들가운데서 사람들에게 경험과 교훈으로 되며 귀감으로 삼을만 한것을 기록해놓은것을 가리켰다.
1145년에 김부식은 세나라시기의 력사를 묶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후세사람들에게 교훈으로 되고 경계하도록 할것을 기록한다고 하였다. 김부식의 이 견해가 곧 고구려건국초기 사람들의 견해로 되는것은 아니지만 력사를 대하는 중세사람들의 관점과 립장을 대변한것이라고 볼수 있다.
결국 《류기》는 고구려건국초기에 개인이 편찬한 력사문헌으로서 당대 현실에서 제기되였던 사건, 사실들가운데서 사람들에게 경험과 교훈을 주고 귀감으로 될만한것들을 선택하여 기록한 문헌이였다고 할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류기》는 고구려초기에 편찬되였던 력사문헌이였다.
《삼국사기》에서는 600년에 봉건국가가 리문진을 시켜서 다시 력사를 편찬하면서 《류기》를 《옛력사》라고 하였고 그것을 덜어버리거나 수정해서 《신집》을 만들었다고 썼다.
이것은 력사문헌으로서 《류기》의 내용과 편찬방식을 일정하게 가늠할수 있게 한다.
《류기》에는 고구려의 건국과정과 건국초기에 있었던 여러가지 사건, 사실들이 기록되였을것이다.
고구려건국초기에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사건, 사실들이 많았다. 새로운 면모를 가진 나라의 건국과 나라와 겨레를 위하려는 진보적인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 그리고 새 환경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여러가지 활동과정에는 의외적이고 비범한것도 있었으며 후세에 반드시 전하여야 할것들도 있었다.
실례로 고구려를 세운 주몽과 그의 아들에 대한 비범한 이야기나 낡은 노예소유자국가인 부여의 압제에서 벗어나고 부여의 세력을 견지하다가 나중에는 포섭한 과정 등 력사적변천속에는 사람들을 격동시키는것이 많았고 또 교훈을 찾고 귀감으로 삼아야 할것들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다양한 사건과 사실들을 중세 문헌편찬체계에 따라서가 아니라 쓰는 사람의 견문과 식견에 따라 기록해놓은것이 《류기》였다.
후세의 봉건사가들에게는 력사적인 사건들과 사실들을 기록할 때에 자료의 선택과 서술에서 반드시 견지해야 하는 원칙들이 있었다. 《신집》을 편찬할 때도 이러한 원칙들이 일정하게 적용되였을것이지만 《류기》에서는 아직 이러한것에 구속되지 않았다고 할수 있다.
《류기》에서는 필자가 보고 들은것들을 자신의 식견과 미학정서적요구에 맞게 서술하였을것이다. 그리하여 고구려건국초기 사람들속에 전해지던 설화적인 이야기들과 실재한 사건, 사실들이 기록되였으며 널리 알려진 인물들의 활동이 자유롭게 서술되였을것이다. 다시말하여 자료의 선택과 서술에서 그 어떤 구속도 받지 않았을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주는것이 《신집》의 편찬과정에 대한 기록과 각종 《고기》들의 내용이다.
600년에 봉건군주의 명령에 따라 《신집》이 편찬되였다. 이때 《옛력사》책인 《류기》의 내용을 삭제하거나 수정하였다고 하는데 이때 삭제하고 수정한것은 당시 지배계급의 립장과 세계관에 저촉되거나 시대적으로 볼 때 고쳐야 할 이야기들이였을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많은 《고기》들이 인용되였는데 그 내용은 매우 다양하고 풍부하다.
《고기》를 모두 《류기》나 《신집》이라고 단언할수는 없다. 그리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인용된 《고기》를 같은 문헌으로 보거나 고유한 문헌이름으로 인정하기 어려운것도 있다.
《삼국사기》에 인용된 《고기》는 구《삼국사》를 비롯하여 《삼국사기》편찬이전에 나왔던 세나라시기의 사실을 기록한 문헌들을 포괄하여 부르는 말이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인용된 《고기》는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 대한 이야기들과 불교의 전파과정에 있었던 사건, 사실들을 기록한것이다.
실례로 《삼국유사》에서 고조선, 부여에 대하여 기록하면서 인용한 《고기》는 고조선에 대한 문헌이였고 《태종춘추공》, 《후백제, 견훤》 등에 인용한 《고기》는 후기신라시기의 력사적사실들을 기록한 문헌이였으며 《전후소장사리》, 《어산불영》 등에 인용한 《고기》는 우리 나라에 불교가 전파되던 과정에 있었던 일들을 기록한것이였다. 그리고 《삼국유사》의 《보장봉로, 보덕암》에 인용된 《고려고기》는 고구려후기의 력사적사실들을 기록한것이고 《삼국사기》의 《악지》에 인용된 《신라고기》는 전기신라시기의 사실들을 기록한것이며 《삼국유사》의 《태종춘추공》에 인용된 《백제고기》는 백제의 력사를 기록한것이다.
이처럼 내용이 다양한 《고기》의 자료들을 종합하여보면 《고기》란 개별적인 문헌의 이름이 아니라 《옛기록》이라는 의미로 볼수 있으며 세나라시기의 사실들을 반영한 《옛기록》은 나라별로 된것, 시기별로 된것 등 여러가지가 있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이러한 《고기》들가운데는 직접 《류기》나 《신집》에서 인용한것도 있을것이며 또 그 내용을 인용한 다른 문헌을 자료적으로 옮겨놓은것도 있었다고 본다.
《류기》는 내용구성과 서술방식에서 사회계급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제한을 크게 받지 않고 편찬되였던 문헌이였던것만큼 거기에는 고조선시기의 이야기나 부여의 사실들도 들어갈수 있었고 고구려초기의 력사적사건이나 사실들도 반영될수 있었다.
《류기》의 편찬목적은 대체로 고구려의 건국과정과 고구려를 강대한 나라로 만드는 과정에 있었던 력사적인 사건들과 사실들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교훈을 찾고 귀감으로 삼도록 하자는것이였다. 이러한 교훈과 귀감은 나라와 겨레를 위해 필요한것이였다.
뿐만아니라 지나간 력사의 나날에 있었던 의의있는 사건들과 사실들 그리고 사람들의 높은 헌신성과 고귀한 업적을 길이 전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였다. 편찬자는 자신의 견문으로 의의있다고 인정되는 모든 사건, 사실들과 그와 관련한 인물들의 활동, 고구려건국초기 사회에 이바지한 사람들의 공적 등을 수필형식으로 자유롭게 서술하면서 거기에서 찾아야 할 경험과 교훈은 무엇이며 귀감으로 삼아야 할것은 어떤것들인가를 기록하였을것이다. 그러므로 서술방식은 수필이지만 내용은 력사적인것이였다.
《삼국사기》나 구《삼국사》의 기록들을 종합하여보면 《류기》에 반영되였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것들이였다고 볼수 있다.
그것은 우선 고구려의 건국과 강성과정에 대한 이야기들이였다. 다시말하여 주몽의 활동과 그의 건국과정, 비류국 등 이웃소국들을 고구려에 포섭하던 때에 있었던 사건, 사실들과 인물들이 들어있었을것이다. 뿐만아니라 나라를 세운 다음 궁궐을 세우고 성벽을 쌓으며 나라의 위용을 떨치기 위해 진행하였던 사건, 사실들이 기록되였을것이다.
그것은 또한 신비주의, 미신적관념에 따라 평가된 여러가지 자연, 기후현상들이였다.
《삼국사기》와 구《삼국사》에 들어있는 력사적이야기가 다 《류기》의 내용은 아니라 하더라도 현재 기록으로나마 전해지는 고구려초기의 문헌으로서 《류기》가 제일 신빙성이 있는 조건에서 그것들을 서로 련관시켜 보지 않을수 없다. 다시말하여 《삼국사기》에 올라있는 고구려건국초기의 사건, 사실들은 많은 경우 《류기》에서 《신집》으로 옮겨지고 다시 각종 《고기》들과 구《삼국사》에 인용되여 쓰인 자료들이라고 보아진다.
《류기》는 편찬자의 립장에서 반드시 전하여야 하겠다고 인정되는 사건, 사실, 인물들을 기록한것으로서 문헌이름도 《남겨놓은 기록》이라는 의미로 명명되였을것이다.
고구려초기에 편찬된 《류기》의 내용편성과 서술방식은 후날의 문헌편찬에 큰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본다.
후기신라때에 김대문은 신라의 력사를 리해하는데 참고가 되는 기록들을 남겨놓았는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인용된 그 기록들은 대체로 신라의 력사적인 사건과 사실들에 대한 해설이다. 이것은 《류기》가 담고있는 내용과 서술방식에서 비슷하다.
즉 고구려건국초기에 편찬된 《류기》는 그후 《신집》을 비롯한 력사문헌편찬에 자료를 제공해주었으며 중세초기 우리 나라에서의 력사서술방식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우리는 앞으로 력사기록속에 남아있는 문헌들을 깊이 연구하여 그 내용과 가치를 밝힘으로써 우리 민족이 이루어놓은 문화유산으로서의 민족고전들의 면모를 정확히 립증하고 민족유산을 풍부히 하는데 이바지하여야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