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주자소와 금속활자

 2021.6.25.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인민은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전통을 가진 슬기로운 인민입니다.》 (김정일전집》 제13권 375페지)

지혜롭고 슬기로운 우리 인민은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와 더불어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여왔다. 고려시기에는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출판문화를 발전시켰으며 도서의 나라로 세계에 이름을 떨치였다. 고려의 금속활자주조기술은 조선봉건왕조시기에도 계승되여 더욱 발전되였다.

조선봉건왕조성립후인 1403년에 주자소(鑄字所)가 설치되였다. 주자소란 인쇄에 필요한 금속활자를 주조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을 말한다.

1403년 국왕은 《무릇 정치하는데서는 반드시 서적을 많이 보아야 하는데 판각은 쉽게 모가 깎이고 또한 천하의 서적을 다 간행하기 어렵다. 내가 구리를 녹여 글자를 만들어 필요에 따라서 그것으로 인쇄하여 널리 전하려고 한다.》고 하면서 주자소를 설치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글자의 본을 따서 금속활자를 주조하게 하였다.(《증보문헌비고》 직관고 교서관)

금속활자인쇄는 목판 및 목활자인쇄보다 우월하였다.

목판인쇄는 그 인쇄대상으로 되는 책의 글자수와 맞먹는 분량의 글자를 새겨야 하였으므로 많은 자재와 로력, 시간이 걸리였을뿐아니라 한번 새긴 판목으로는 여러 종류의 책들을 찍어낼수 없었으며 목활자인쇄는 목판활자인쇄방법보다 새로운 방법이기는 하나 인쇄과정에 글자획이 인차 마멸되고 오래동안 쓸수 없었다.

그러나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는 그에 구애되지 않았다.

고려시기 즉 12세기 전반기경에 세계최초로 발명, 사용된 금속활자는 그후 조선봉건왕조성립에 이르는 동안 주조기술이 상당한 정도로 발전하였다.

그러한 발전에 토대하여 조선봉건왕조는 수립후 봉건통치에 필요한 문서와 서적들을 대량적으로 인쇄할 목적밑에 1403년 주자소를 설치하고 금속활자의 주조사업을 전문 맡아보게 하였던것이다.

주자소가 설치되면서부터 조선봉건왕조시기에는 금속활자의 주조사업이 더욱더 활발하게 진행되였다.

이 주자소에서 1403년에 처음으로 만들어낸 동활자로서 《계미자》가 있었다.

조선봉건왕조시기 금속활자의 갱신주조가 있을 때마다 대체로 그 활자의 이름을 주조한 해의 간지년호를 붙여 달았다. 즉 《계미자》는 계미년(1403년)에 만든 활자이라는것이다. 《계미자》는 불과 몇달사이에 만들어낸 동활자로서 10만자나 되였다.

이 《계미자》의 주조는 우리 나라 출판문화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왜냐하면 금속활자주조사업이 12세기 전반기경에 시작되였지만 그후 고려왕조의 혼란된 정세로 말미암아 일시 저조상태를 면하지 못하다가 《계미자》주조를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개화기의 시초를 열어놓았기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대규모적인 주조사업은 이 시기 세계적으로 처음되는 일로서 그의 생산속도가 빠르면서 그 질이 높기때문이다.

주자소에서는 금속활자의 갱신주조사업을 줄기차게 벌려나갔다. 《계미자》를 주조한 후 1403년부터 1407년까지의 기간에 동활자로서 《정해자》 수십만자를 주조하였다.

1420년에 또다시 주조하였는데 이것을 《경자자》라고 하였다. 동활자이다. 그 모양은 작으나 정확하였다. 《정해자》가 크고 바르지 못하다고 하여 다시 주조한것인데 글자모양이 몹시 정교하고 치밀하였다. 그후 1434년에 또 활자를 개혁하였는데 《갑인자》 20여만자를 주조하였다. 세조의 필적을 본따서 만들었다. 《경자자》에 비하여 좀 크나 글자체가 대단히 아름다웠다. 동활자로서 글자체가 깨끗하고 바르며 인쇄에 편리하여 당시로서는 매우 발전한 금속활자였다. 《갑인자》는 우리 나라 활자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우수한 활자로 높이 평가되고있다. 세계적으로도 우수한 활자였다.

또 1436년에 세조에게 명령하여 강목을 큰 글자로 쓰게 하고 연을 녹여 활자를 주조하였는데 《병진자》였다. 세계최초의 연활자였다. 이것은 우리 나라가 연활자의 발명에 있어서도 도이췰란드의 구텐베르그의 연활자발명보다도 30년이상 앞선것으로 된다. 주자용으로 가장 합리적인 연을 도입한 사실은 세계인쇄기술발전에서 새로운 길을 열어놓은것이며 활자력사에서 또 하나의 발명을 의미한다.

1450년에 안평대군 리용의 글자체를 본따서 동으로 주조한 《경오자》가 있었으며 1452년에 종전에 쓰던 《경자자》를 개작하여 주조한 금속활자로서 《임신자》가 있었는데 안평대군 리용에게 글씨를 쓰게 하였다.

1452-1454년사이에 력대 실록을 찍기 위하여 만든 동활자로서 《실록자》가 있었으며 1455년에 당시 봉건학자였던 강희안으로 하여금 글씨를 쓰게 하고 그것을 본따서 주조한 활자로서 《을해자》가 있었고 1465년에 당시 봉건문인관리였던 정란종으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고 그것을 본따서 주조한 금속활자로서 《을유자》가 있었으며 1471년에 주조한 금속활자로서 《신묘자》가 있었고 1484년에 동으로 주조한 동활자로서 《갑진자》 30만여자가 있었으며 1493년에 신판으로 발간된 《통감강목》(通鑑綱目)의 글자를 모방하여 동으로 주조한 《계축자》가 있었다.

15세기 동활자로서 《국문활자》가 있었다.

이렇게 주자소가 설치되여 15세기만 하여도 10여회에 걸쳐 활자주조사업이 진행되였다.

1455년에 주조된 《을해자》를 분석한데 의하면 동 79.45%, 석 13.20%, 아연 2.30%, 철 1.88%, 연 1.66%이다. 이것은 당시의 활자합금기술을 잘 보여준다.

주자소에서의 활자주조사업은 16세기에도 진행되였다.

1519년에 주조한 놋쇠활자로서 《기묘자》가 있었다. 《기묘자》는 많은 서적을 인쇄함으로써 우리 나라 출판문화발전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기묘자》는 그 원료를 놋쇠로 만든 점에서 우리 인민들의 활자주조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꾸준한 노력을 볼수 있게 한다.

1573년에 주조한 철활자로서 《계유자》가 있었다. 갑인자를 개조한것이다. 원래 철활자가 동에 비하여 원가는 눅으나 활자를 만들기에는 기술적으로 더 힘이 드는것이다. 그러나 슬기롭고 재능있는 우리 인민은 금속활자주조에서 얻은 축적된 기술과 경험에 토대하여 철활자를 만들어냈으니 이는 어느 나라 력사에서도 찾아보기 드문 일이며 우리 나라의 독특한 창안인것이다.

1592년에 일본침략자들에 의하여 강요된 임진조국전쟁으로 하여 우리 나라의 다른 문화적재보와 함께 수많은 활자들이 일본침략자들에게 략탈당함으로써 17세기에는 활자주조사업을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1668년에 동철활자로서 《무신자》(교서관자)를 주조하였다. 우리 선조들은 철활자를 만든 경험에 토대하여 동철활자를 만들어냈다. 이 활자는 단순한 철활자보다 더 아름답고 정교하였으며 많은 서적을 인쇄할수 있었다. 이것은 조선에서만 특유한것으로서 세계적으로도 높이 평가되였다. 이때에 만든 활자는 대자 6만여자, 소자 4만여자나 되였다. 1695년 동활자로서 《한구자》가 있었다. 조선봉건왕조 숙종때의 봉건문인관리로서 글씨를 잘 쓰기로 소문난 한구의 필체를 본따서 만들었다. 그래서 《한구자》라고 하였다.

17세기에 파괴략탈된 활자들을 보충하는 과정에 이룩한 성과에 토대하여 18세기에 들어와 금속활자주조기술에서 새로운 발전을 이룩할수 있게 되였다.

1772년에 만든 금속활자로서 《임진자》가 있었는데 세종때의 《갑인자》를 본따서 주조한것으로서 15만자나 되며 1777년에 《갑인자》를 본따서 금속활자 15만자를 주조하였는데 《정유자》라고 하였다.

《임진자》와 《정유자》는 《갑인자》의 우점을 이어받아 발전시키면서 아주 우수하게 제작되였다. 불과 몇년동안에 30여만자를 주조하였다는것은 당시 활자주조기술이 상당히 발전하였다는것을 알수 있게 한다.

1782년에 만든 동활자로서 《임인자》(재주한구자)가 있었는데 평양에서 주조하였는바 8만여자나 되였다. 이미 17세기에 《한구자》를 주조하였는데 글씨체가 잘 째이고 기백이 있는것으로 하여 그후에도 매우 호평을 받으면서 널리 리용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와서 원래 있던 《한구자》는 활자수의 부족을 느끼게 되였다. 그리하여 평양에서 보충주조하게 한것이다.

그후 1795년 봄 의식절차의 규례집을 편찬정리하기 위하여 동활자 30만여자를 주조하였는데 그것을 《정리자》라고 하였다. 합금동으로 대자 16만여자와 소자 14만여자를 만들었다.

1797년에 《춘추강자》5 262자를 주조하였다. 《춘추》를 찍기 위해 만든 철활자이다. 《춘추강자》는 전에 있던것을 개작하여 주조한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 주조한것이다.

1858년에 《무오자》를 주조하였다. 《무오자》를 주조하게 된 동기는 1857년에 주자소가 불타게 되여 거기에 보관해두었던 활자들이 많이 없어졌기때문에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1858년 정월 우의정 조두순의 《주자소가 화재를 입은 후 우리 동방문자의 유래가 생겨나서 쉴새없이 전파되던것이 지금은 다 없어지고 그루터기만 남았습니다. 정조때에 주자한것 외에 태종, 세종때에 주자한 글자들이 다 그안에 들어갔습니다. 500년 유구한 기간 보배롭게 보관하여두었던것이 드디여 전할수 없게 되였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증보문헌비고》직관고, 교서관)라는 제의에 따라 봉건정부에서는 규장각 검교 제학 김병기, 규장각 제학 윤정현, 규장각 제학 김병국을 글자주조를 주관하는 당상관으로 삼아서 9월까지 정리대자 8만 9 203자와 소자 3만 9 416자, 한구자 3만 1 829자 도합 16만 448자를 주조하였다. 그리고 불타다 남은 온전한 글자 17만 5 698자와 함께 부류별로 모아서 주자소에 보관하였다.

1850-1860년에 《운형궁활자》가 주조리용되였는데 그에 대해서 전하는것은 아직 찾지 못하고있다.

이렇게 조선봉건왕조시기 주자소와 평양 등지에서의 금속활자주조사업은 부단히 진행되였다.

우리 나라에서 1403년부터 1863년까지의 기간에 활자주조회수는 30여회, 지금까지 알려진 활자수만 하여도 160여만자에 달한다.

그 모든 금속활자들은 주자소에 소속된 각자공(자형을 만드는 기술자), 주장(주조를 담당한 기술자) 등의 수공업자들을 비롯한 우리 인민들의 창조적로동에 의한것이였다.

슬기롭고 지혜로운 우리 인민은 조선봉건왕조시기 부단히 여러가지 형태의 금속활자를 주조하여 시기시기마다 제기되는 문서와 서적들을 출판간행하는데 적극 이바지함으로써 규장각의 장서를 부단히 늘여나갔다. 조선봉건왕조실록을 비롯하여 실학자들의 저서와 개별적문인들의 문집 등 조선봉건왕조시기의 훌륭한 민족고전문헌유산들은 금속활자를 떠나서 생각할수 없다.

주자소는 처음 설립당시에는 승정원에 속하였으나 1460년에 교서관에 이관되였고 1782년에 교서관이 규장각에 속하게 되자 주자소도 이에 속하게 되였다.

슬기롭고 재능있는 우리 인민은 고려시기에 이어 조선봉건왕조시기에도 높은 금속활자주조기술을 발휘하여 각이한 형태의 금속활자를 수많이 주조해냄으로써 민족문화를 발전시켜나갔다. 금속활자주조를 전문적으로 맡아 수행한 주자소를 가지고있은것은 우리 민족의 자랑으로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