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순은 9살을 살고 영생을 얻은 소녀였다. 9살이면 꽁다리연필처럼 짤막한 생애이다. 그러나 번개의 섬광과도 같이 번뜩거리다가 사라진 이 어린 나이에 그는 인생이 도달할수 있는
간고한 항일혁명투쟁시기
그 영광스러운 대오속에는 김금순과 같은 열살도 안되는 나어린 소녀들도 있었다.
1930년대초 일제에 의해 강점된 간도지방에서는 조선소년들이 도처에서 아동단, 소년선봉대, 소년탐험대와 같은 혁명조직들을 뭇고 조직된 력량으로 일제와의 싸움의 마당에 뛰여들었다.
부모들로부터 혁명적영향을 받으며 성장한 김금순도 어린 나이에 왕우구의 북동아동단학교에 다니면서 조직에서 주는 각종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으며 특히 유희대활동에서 남다른 모범을 보이였다.
그는 8살 때인 주체22(1933)년에 소왕청유격근거지에 가서
그때 금순이는 그렇게 하면 좋기는 하겠지만 그러면 언제 어른이 되겠는가고, 자기는 빨리 어른이 되여 조선을 독립하고싶다고 대답을 드리였다.
이처럼 금순이는 나이는 비록 어리였지만 조선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치려는 그의 각오는 사상적으로 매우 조숙하였다.
근거지에 들어온 금순이는 마촌아동단학교에 편입하여 아동단조직생활을 하게 되였다.
왕청유격근거지사람들은 눈동자가 새까맣고 또 나이에 비해 몸이 체소한 금순이를 《깜장금순이》 혹은 《마촌콩새》라고 사랑담아 불렀다.
금순이는 왕청아동유희대성원으로서 노래도 잘 불렀고 특히 탑프춤을 잘 추어 유격대원들과 근거지인민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으며 순결하고 재롱스러운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기쁨과 신심을 주었다.
그는
주체23(1934)년 가을 9살난 금순이는 요영구혁명조직에서 적구에 보내는 극비문건을 전달할 임무를 책임적으로 수행한 후 백초구에서 일제헌병들에게 체포되였다.
금순이가 유격구에서 왔다는것을 알게 된 놈들은 조그마한 소녀애한테서 유격구의 비밀을 쉽게 뽑아낼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놈들은 처음에 금순이에게 음식을 가져다놓고 달콤한 말로 달래다가 말을 듣지 않자 위협도 하고 모진 고문도 들이대였다.
악착한 고문을 당하여 살점이 떨어지면서도 금순이는 단 한마디도 조직의 비밀을 불지 않았다.
왜놈들은 비밀을 대지 않으면 금순이를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금순이는 《더럽다! 너같은 강도놈들과는 말하지 않겠다.》고 쏘아붙였다.
그 어떤 회유로도 고문으로도 금순이를 굴복시킬수 없었던 일제교형리들은 나어린 금순이를 사형장에 끌어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여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나어린 소녀애를 보고 사람들은 모두다 이를 갈며 치를 떨었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금순이는 오히려 자기를 동정하고 불쌍히 여기는 군중들을 향해 이렇게 웨치였다.
《
《일제놈들을 타도하라!》, 《조선혁명 만세!》
9살밖에 안되는 나어린 소녀의 최후의 웨침에는 그의 불굴의 신념이 그대로 맥박치고 짧고도 영원한 그의 생애가 담겨져있었다.
금순이의 최후에 대한 비통한 소식은 왕청일대의 혁명군중을 분기시키였다. 요영구골안에서는 금순이의 추도식이 엄숙히 거행되였으며 동만 각 현에서 격노한 수십명의 남녀청년들이 금순이의 복수를 다짐하며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였다.
국제당계렬의 잡지와 중국과 일본의 출판물들은 세계 피압박민족들의 해방투쟁력사에서 전례를 찾아볼수 없는 이 어린 영웅에 대하여 앞을 다투어 보도하였으며 《어린 렬녀의 략전》이라는 제목으로 금순이의 영웅적생애를 격찬하였다.
이처럼 김금순은 겨우 9살을 살고 영생을 얻었다. 그는 아직은 엄마품에 안겨 응석을 부릴 그 어린 나이에 인생이 도달할수 있는
하기에 김금순은 오늘도 나어린 소녀영웅, 민족의 장한 딸로 우리 인민의 사랑속에 영생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