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관대첩비는 임진조국전쟁시기 정문부의병대가 함경도지방에 기여든 왜적을 격멸소탕하고 큰 승리를 거둔것을 기념하여 세운 승전기념비입니다.》
북관대첩은 임진조국전쟁시기 정문부의병대가 함경도의 장평, 쌍포, 단천, 백탑 등 북관(마천령이북)지역에서 왜적들을 물리치고 이룩한 큰 승리를 말한다.
1591년 함경도의 북평사(정6품)로 임명된 정문부는 임진조국전쟁이 일어나자 함경도의 경성에서 의병을 조직하고 관북의 각 고을들에 왜적과의 싸움에 나설것을 호소하는 격문을 돌리였다.
격문이 발표된 후 단 며칠사이에 정문부를 찾아온 사람들의 수는 천여명을 헤아렸으며 이때 정문부는 나라를 사랑하는 백성들의 성의있는 지원밑에 창과 칼, 활 등의 무기들을 자체로 만들어 무장하게 하는 한편 훈련에도 힘을 넣게 하였다. 이에 기초하여 정문부의병대는 북관의 여러 지역에서 매복전과 추격전, 습격전과 포위공격전의 다양한 전법으로 왜놈들을 련속 타격하여 커다란 승리를 이룩하였다.
정문부의병대가 이룩한 북관대첩의 첫 머리를 장식한것은 장평대첩이다.
당시 함경도일대에 기여든 왜놈들은 길주에 도사리고있으면서 남북으로 오가는 교통로를 장악하고 그 주변을 싸다니면서 방화, 략탈을 일삼았다.
1592년 10월 30일 길주성의 왜적들이 략탈을 감행하고 돌아온다는 통보를 받은 정문부는 적들을 매복전으로 소멸할것을 결심하고 길주성 동쪽 10지점인 장평(장덕산: 명간군의 광암리에 있는 산, 높이 163m)고개의 유리한 지형지물을 리용하여 매복진을 펴게 하였다. 매복진과 함께 적들이 도망칠수 있는 곳에는 차단조를 배치하였다.
먼저 원충서가 200명의 기병을 인솔하고 앞장서 내달리며 재물을 략탈해가지고 돌아오는 왜적을 맞받아 들이쳤다. 선두에 섰던 적들이 당황하여 북쪽으로 퇴각하였으며 이때 성안에 있던 적의 대병력이 쓸어나와 제놈들을 지원하였다. 왜장은 정예한 선봉부대 400여명을 끌고 먼저 나타났다.
얼마후 적들이 매복구역에 들어서자 정문부의 신호에 따라 의병들은 맹렬한 공격을 들이댔다. 좌우산속에서 화살이 비발치듯 왜적의 무리속으로 날아갔고 돌사태가 쏟아져내렸다. 삽시에 왜적들은 수많은 주검을 내고 앞을 다투어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그때 류경천이 즉시 군사를 파견하여 왜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량쪽에서 왜놈들을 드세게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아군은 이날 전투에서 적장 5명과 800명의 왜적을 소멸하였으며 많은 군수물자와 무기 1 000여개를 로획하고 놈들이 략탈한 많은 량의 물자를 도로 빼앗아가지고 돌아왔다.
력사에서는 이 싸움을 장평대첩이라고 한다.
정문부의병대가 이룩한 두번째 대첩은 쌍포대첩이다.
1592년 12월 정문부의병대는 령동책에 주둔한 왜적들을 선제타격하기 위하여 전진하던중 복병장 김군신으로부터 그곳에 주둔한 400여명의 왜적들이 림명마을을 략탈하고 방화하며 돌아친다는 련락을 받았다.
정문부는 이곳 지형을 잘 알고있는 의병들과 의논하고 적들이 돌아갈 길목중에서 골짜기가 가장 깊고 험한 돌고개(김책시 림명에 위치함)에 매복진을 치고 적들을 기다리게 하였다. 그가 예견한대로 술에 취한 적들이 해질무렵 저녁추위에 떨면서 무질서하게 매복구역으로 들어왔다. 적의 선두가 돌고개에 이르자 매복했던 의병들이 공격신호에 따라 북소리와 함성을 우뢰소리와 같이 지르면서 적들에게 맹공격을 들이대였다. 화살이 적들속으로 수없이 날아갔으며 크고 작은 돌들이 적들의 대갈통을 내리쳤다. 순식간에 수많은 적의 시체가 땅에 나딩굴었다. 넋을 잃은 적들이 허우적거릴 때 정문부는 의병들을 돌격에로 불러일으켰다.
이날 싸움에서 적들은 조총 한방 쏘지 못하고 수많은 주검을 남긴채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의병들은 적들을 추격하여 또다시 소멸하였다. 이날 싸움에서 살아남은 적들은 겨우 20명정도밖에 안되였다.
이 싸움을 력사에서는 쌍포대첩이라고 한다. 이 싸움으로 의병부대는 령동책에 둥지를 튼 적들의 준동을 완전히 봉쇄해버렸으며 이를 계기로 군사들의 사기는 크게 떨쳐지고 적들은 무서운 궁지에 빠지게 되였다.
이에 대하여 《북관대첩비》에서는 《성진(김책)의 적들이 림명에서 크게 로략질함으로 정예로운 기병을 거느리고 습격하였는데 산에 매복하여 적들이 돌아오는것을 엿보다가 량쪽에서 들이쳐 크게 격파하고 또 수백명의 목을 베였으며 … 이에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떨쳐져 적들이 더욱 무서워하였다.》라고 전하고있다.
정문부의병대가 이룩한 세번째 대첩은 단천대첩이다.
1593년 1월 정문부는 3 000여명으로 확대된 의병부대를 정비하고 전투기재들을 마련하는 한편 단천에서 적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안기였다.
당시 길주성에 있는 왜적들이 포위되자 가또는 비장 사사와 나베시마로 하여금 《구출작전》을 벌리게 하였다. 바로 이때 관군을 거느리고 싸우던 단천군수 강찬이 정문부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정문부는 그 제의를 접수하고 왜적들을 유인매복과 각개격파, 포위소멸 등 각이한 전술과 전법으로 적들을 소멸할 전술을 세웠다.
정문부는 원충서에게 의병들을 인솔하고 왜적을 견지하게 한후 정예기병 200명을 4개의 대오로 나누어 적을 공격하게 하였다.
의병대는 1월 20일 산길을 따라 행군하여 22일 마천령을 넘어 단천에 도착하였다. 정문부는 산세를 살핀 후 유리한 곳에 매복진을 펴게 하고 말을 잘 타는 의병 30명을 뽑아 적들이 도사리고있는 성으로 파견하여 왜적들을 매복구역으로 유인해오게 하였다.
정문부의 의도대로 다음날인 23일에 의병 30여명은 200명의 왜적들을 매복권으로 유인하여왔다. 추위를 극복하며 벼랑과 계곡에 몸을 숨기고있던 의병들은 적들이 매복권에 완전히 들어오자 맹렬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벼랑우에서 의병들이 쏘는 화살과 돌들이 비발치듯 쏟아져 삽시에 왜적의 우두머리와 졸병들을 무리로 쓸어눕혔다. 기병들은 달아나는 왜적들을 성밑까지 추격하여 거의 다 소멸하였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30여명도 반수이상이 화살을 맞고 성안으로 도망쳐들어갔다.
이날 전투에서 왜적 백수십명을 죽이였고 의병부대는 20여리를 옮겨가며 싸웠다. 1593년 1월 23일에 있은 정문부의병부대의 세번째 대승리를 력사에서는 단천대첩이라고 한다.
정문부의병부대가 이룩한 네번째 대첩은 백탑대첩이다.
단천싸움에서 승리한 후 정문부는 일부 군사들을 그곳에 남겨두어 적을 견제하게 하고 자기는 주력을 거느리고 다시 마천령을 넘어 길주와 령동책사이에서 왜적들을 포위하고있었다.
길주성안의 적들은 포위가 지속되자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고있었으며 또한 전반적인 전쟁형편도 적들에게 불리하게 전환되여가고있었다. 바다에서는 리순신장군의 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하고 왜적의 수군함대를 격멸하고있었으며 륙지에서도 련이어 승리가 이룩되고있었다.
이런 형편에서 가또는 퇴로가 차단되기 전에 정문부의병부대가 견제하고있는 령동책의 왜병들을 구원하여 퇴각하려는 계책밑에 수많은 침략무력을 길주로 들이밀었다. 그리하여 정문부는 투쟁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적의 대군과 맞서지 않으면 안되였다.
정문부는 3 000여명의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림명에 매복진을 폈다.정문부는 날랜 기병들과 썰매를 잘타는 의병 60명을 뽑아 림명벌(김책시)주변의 산들에 매복시키고 1 000여명의 군사는 여러 패로 나누어 길주주변의 유리한 곳들에 매복시켰다.
1월 28일 이른 아침 가또 기요마사는 령동책의 패잔병까지 긁어모아가지고 림명벌(함경북도 김책시 동부 림명천하구에 있는 벌)에 들어섰다. 정문부는 적의 선두가 벌을 지나 산모퉁이를 돌아가고 기본대렬의 거의 전부가 벌판에 이르자 공격명령을 내렸다. 날랜 기병들과 썰매를 탄 의병들이 창을 비껴들고 적들을 공격하여 무리로 쓸어눕혔다. 가또 기요마사가 부대를 되돌려세우려 하였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적들의 시체가 벌판을 덮었으며 군량과 무기를 실은 수레는 불에 타고있었다. 복병장 구황, 첨정 박은주, 첨사 강문우 등이 각각 의병과 관군을 거느리고 적의 후미를 공격하였다. 의병들은 유리한 지형을 리용하여 충천한 기세로 적들을 량쪽에서 맹렬히 공격하였다. 이어 의병들은 적의 앞길을 차단하고 허리를 잘라버렸다. 적들의 주타격이 정문부를 비롯한 지휘부에 쏠리자 리희당이 먼저 말을 달려 적들을 막았으며 련이어 가또 기요마사가 나타나자 그곳으로 돌진해갔다. 리붕수도 정문부를 호위하다가 적의 총탄에 맞고 쓰러졌다. 그러자 정문부는 장검을 높이 들고 적들을 사정없이 족치였다. 의병부대는 7시경부터 19시경까지 60여리를 추격하면서 적들의 후미와 허리를 련속 토막내여 족쳤다.
한편 길주성밖 20리쯤되는 곳에 매복하고있던 훈련판관 원충서의 부대가 또다시 적들에게 달려들어 일제히 활을 쏘았다. 경기병으로 편성된 의병들은 백탑(白塔 - 탑처럼 솟아있는 흰바위가 있는 곳, 행정명칭으로는 백탑리라고 불렀다. 현재 함경남도 허천군 사탑리소재지부근으로 인정됨)계선까지 추격하면서 지형이 넓은데서는 사방에서 일시에 공격하고 좁은데서는 후미로부터 적을 소멸하였다.
한길이 넘는 눈덮인 벌판과 길가에는 왜적들의 주검으로 뒤덮였다. 심대한 타격을 받은 가또 기요마사는 길주성에 불을 지르고 시체들을 화장한 후 남쪽으로 도망쳤다. 력사에서는 이 싸움을 백탑대첩이라고 한다.
백탑전투는 왜적에 대한 추격전과 각개격파전술이 배합되여 진행된 전투였다. 의병대는 적의 대부대가 도로를 지나가게 하고는 후미에서 따라가는 적의 부대들을 공격하여 소멸하는 전법을 적용하여 적들을 분산시킨 후 각개격파하였다. 특히 이러한 각개격파전술을 완강한 추격전과 결합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벌림으로써 적들에게 숨돌릴 틈을 주지 않고 전투의 효력을 높인것은 당시 의병들의 전법에서 찾아볼수 없는것이였다. 각개격파전술에 의하여 살상된 적의 수는 이루 다 헤아릴수 없었다.
정문부의 지휘밑에 함경도의 장평, 쌍포, 단천, 백탑 등지에서 벌어진 북관대첩은 임진 9대첩중의 하나로서 함경도지방에서 왜적을 완전히 몰아내고 동부전선에서의 반격의 길을 열어놓은 대표적인 전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