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우를 비롯한 애국자들은 의병을 일으켜 도처에서 왜적을 격멸하였습니다.》 (
곽재우는 임진조국전쟁시기의 애국적인 의병장이였다.
일본침략자들은 1592년 4월 13일 불의에 우리 나라에 쳐들어왔다. 왜적들이 제일먼저 침입한 지역은 경상도였으며 이 지역에서 남먼저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곽재우(당시 그의 나이는 41살이였다.)였다.
* 곽재우는 1552년 8월 28일 경상남도 의령현 세우리(현재 경상남도 의령군 류곡면 세간리)에서 간관, 홍문관의 요직과 의주목사, 황해감사를 지낸적있는 곽월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을 배웠으며 활쏘기와 말타기도 잘하였다. 34살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합격자를 발표하는 명단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그후 그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집가까이에 있는 강가에 작은 정자를 지어놓고 낚시질과 책읽기에 열중하였다. 임진조국전쟁이 일어나기전인 1592년 7월에 그는 유곡찰방으로 임명되였으나 부임지로 가지 않았다.
왜적이 우리 나라에 쳐들어온 이후 부산과 동래성이 련이어 무너지고 상주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관군이 련속패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무리죽음을 당하게 되자 의령에서 살고있던 곽재우는 의병을 일으킬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마을사람들을 모아놓고 《지금 적들이 접근해오고있으니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우리의 부모처자들은 모두 적들의 먹이감으로 되고말것이다. 이 마을에는 젊은이들이 수백명이나 있다. 만약 모두가 단합하여 남강의 솥나루에서 적을 막는다면 마을을 지켜낼수 있을것이다. 어찌하여 싸움도 해보지 않고 죽음을 기다리겠는가》(《기재사초》)라고 하면서 왜적과의 싸움에 떨쳐나설것을 호소하였다. 곽재우는 자기를 따라나선 60여명(50명)의 젊은이들로 의병대오를 조직하였는데 그날은 4월 22일(4월 20일 또는 24일이였다는 자료도 있다.)이였다. 곽재우는 자기의 재산을 군사를 모집하는데 썼다. 그는 자기 집에 있던 노비들은 물론 매부인 허언심을 설복하여 그가 가지고있던 200명의 노비들도 의병에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얼마후 곽재우의 의병은 1 000여명으로 확대되였다. 그는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로 의병지휘부를 꾸리고 의령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의령은 락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근방에 위치하고있었다. 남강과 합류하여 동남쪽방향으로 흐르는 락동강은 물량이 많고 큰 짐을 실은 배들이 자유롭게 다닐수 있었다. 일본침략군은 락동강하구에 위치한 김해의 칠성포에서 군수물자와 병력을 싣고 강을 따라 북으로 창녕-현풍-고령-성주-금산-상주 등지를 오르내렸으며 의령을 통과하는 남강을 거슬러 진주로 기여들군 하였다. 때문에 의령은 군사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었다.
곽재우의병부대는 5월에 의령으로 침입하는 적을 물리쳤으며 계속하여 기강(락동강의 지류)으로 침입하는 적선 30척을 격침시켰다. 곽재우는 6월에 의병대를 거느리고 먼저 령동남쪽으로 9리 되는 지점인 정암진에서 적들을 소멸하기로 하였다. 정암진은 령산현의 동남 9리 되는 곳에 있으며 진주, 산청, 함안을 거쳐 전라도의 남원으로 들어가는 중요 교통로에 위치하고있었으며 특히 금강을 거슬러 진주계선까지 배길이 원활하여 군사적으로 매우 중시되는 지점이였다. 때문에 이전부터 남쪽으로 외적의 침입이 예견되면 반드시 이곳을 지키군 하였다. 6월에 모리 데루모도의 심복이고 히데요시의 신임을 받던 안고꾸지 에께이가 거느린 왜적 2 000여명이 전라도로 침입하기 위해 진출하던중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들어가는 길목인 솥나루에 이르렀다. 적장 에께이는 폭우가 내려 땅이 몹시 질적거려 행군을 제대로 할수 없게 되자 척후를 보내여 지형을 정찰하고 기본부대가 건늘수 있게 말뚝을 박아 표식해놓게 하였다. 적의 흉계를 간파한 곽재우는 밤중에 10명의 날랜 군사들을 그곳에 보내여 표식으로 박아놓은 말뚝을 전부 깊은 진창에다 옮겨꽂게 하였다. 그렇게 한 후 인차 그 주변에 매복진을 치고 적이 오기를 기다리게 하였다.
이튿날 새벽 저들이 박아놓은 말뚝들이 옮겨진줄도 모르고 행군해오던 적들은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이때 곽재우의 신호에 따라 의병들의 공격이 시작되였다. 의병들이 쏘는 화살에 적들이 무리로 소멸되였다.심대한 타격을 받은 적들은 얼마후 대부대로 공격해왔다. 곽재우는 의병부대의 주력을 강의 동쪽에 매복시키고 10여명의 날랜 군사들을 선발하여 붉은 옷을 입고 흰말을 타게 한 후 적들속에 들여보내여 적들을 유인분산시켜 혼란에 빠뜨린 후 소멸할 전술을 세웠다. 당시 곽재우는 붉은 옷을 입고 백마를 탔으므로 적들이 그를 알아보고 사로잡으려 하였다. 곽재우의 지시에 따라 붉은 옷에 흰말을 탄 군사들은 적의 대군이 덤벼들자 적진으로 육박하여 순식간에 여러명의 왜병을 소멸하고 인차 퇴각하였는데 그때마다 적들은 《홍의장군》들의 뒤를 따라 추격하였다. 곽재우의 분산유인전술에 속아넘어간 적들의 주력이 이리저리 분산되면서 기본전투대형이 헝클어지고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적들의 전투서렬이 자기의 의도대로 되기를 바라던 곽재우는 적의 전투서렬이 분산되고 헝클어진 유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강의 동쪽에 매복하고있던 의병들에게 공격을 명령하였다. 적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고있던 의병들은 일제히 돌격을 개시하였다. 아군의 함성과 북소리가 세차게 울리고 화살이 비발처럼 날아가 적들을 무리로 쓸어눕혔으며 아군의 예리한 창, 칼에 의해 적들은 강물속에 처박혀 죽었다.이 전투에서 적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던지 적들의 시체로 하여 강물이 막힐 정도였다. 이 전투로 하여 전라도로 침공하려던 적들의 기도는 심히 좌절되였다.
곽재우는 7월 하순에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현풍성과 령산성을 되찾기 위한 전투를 벌리였다. 그때 하시바 히데가쯔가 지휘하는 9번대소속 1만 1 300명의 왜적들은 락동강동쪽의 현풍, 령산 등지에 주둔하고있으면서 락동강을 오르내리는 수송선들의 호위임무를 수행하고있었다.
현풍성의 적들은 곽재우의병대의 위력에 대한 소문을 잘 알고있었으므로 아군이 공격을 개시하자 성문을 닫고 완강히 저항하였다. 이런 조건에서 곽재우는 낮에는 북소리, 징소리, 나팔소리를 울리고 밤에는 100여리구간에서 일제히 홰불을 올리게 하여 당장 적진을 공격할듯이 위협하여 적들을 극도의 불안속에 있게 하였다. 곽재우의병부대의 심리전에 공포에 질린 왜적들은 싸울 생각을 하지 못하고 밤중에 몰래 성을 빠져나와 창녕의 화왕산고성(둘레 5983자)과 고성(성산면에 있음)으로 도망하였다가 얼마후에는 령산으로 쫓겨갔다.
곽재우가 지휘하는 의병들의 투쟁에 의하여 현풍과 창녕이 모두 수복되였다. 곽재우는 승리한 기세로 련이어 령산성(령산에는 둘레가 3810자인 읍성과 계성고현성이 있다.)을 공격하였다. 곽재우의 요청에 의하여 의령, 초계, 고령 등지의 의병들과 관군이 령산성탈환전투에 합세하였다.곽재우를 포함하는 의병과 관군의 3일간에 걸치는 맹렬한 공격에 견딜수 없게된 왜적들은 어둠을 리용하여 성주로 도망쳤다.곽재우의병부대를 중심으로 한 여러 의병부대들의 맹활동에 의하여 락동강 좌안의 여러 고을들이 수복되고 군수물자들을 수송하던 김해-령산-창녕-현풍을 련결하는 적의 주요 수송로가 아군의 수중에 장악되였으며 락동강 서쪽의 전라도로 침입하려던 적의 기도는 파탄되였다. 왜적과의 투쟁과정에 곽재우는 자기의 대오를 2 000여명으로 확대하였다.
곽재우는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마수원(창녕 서남 약 25리 지점의 포구)에서 매복전을 벌려 략탈한 량곡과 재물들을 싣고 강을 따라 내려오던 적수송선 40여척을 격파하고 수많은 왜적들을 또다시 소멸하였다.곽재우의병부대의 투쟁에 고무된 경상도의 각계층 사람들은 도처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투쟁에 궐기하였다.당시 곽재우가 용맹하게 왜적을 친 사실은 온 경상도에 알려져 아이들과 하인들까지도 그를 《곽장군》으로 불렀다.
곽재우는 1592년 10월에 진주성방어전투를 배후에서 적극 협력하였다. 10월 5일 하세가와가 거느린 3만여명의 왜적들이 진주성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자 곽재우는 선봉장 심대수를 시켜 북산에 올라가 홰불을 올리고 주라를 불며 포를 쏘고 북을 쳐 크게 떠들면서 《전라도 구원병 만여명이 의령의 홍의장군과 합세하여 래일 아침에 와서 너의 무리를 소멸할것이다.》라고 웨치면서 성안의 군사들의 싸움을 응원하였다. 그때 100명의 의병들이 매 사람당 5개의 홰불을 들고 밤마다 함성을 올리자 적들은 공포에 질려 잠을 자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진주성방어전투에서 곽재우가 거느리는 의병부대는 적들을 견제하는데서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그후 제2차 진주성전투가 진행될 당시 곽재우는 경상도 관찰사 김성일로부터 진주성으로 들어가 방어할데 대한 지시를 받았으나 적들의 력량이 많은데 비해 아군의 력량이 적기때문에 성을 고수할수 없다고 하면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김성일은 곽재우에게 정진나루를 지키라고 하였다. 결국 곽재우는 제2차 진주성방어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곽재우의병부대는 후에 관군과 같이 행동하였다. 곽재우는 1593년에성주목사 겸 경상우도 조방장이 되여 왜적을 격멸하는 전투를 지휘하였다. 1594년 10월에는 도별장으로 임명되여 부대를 거느리고 거제도의 장문포에 대한 공격을 진행하였으나 선봉장 김덕령이 각기병을 앓고 섬안에 적들이 가득하다는 정보에 여러 지휘관들이 동요함으로써 실패하였다. 1597년 왜적의 재침입 당시 곽재우는 경상좌도방어사로서 부대를 거느리고 령산의 화왕산성방어전투를 조직지휘하였다.
* 곽재우는 솥나루전투와 화왕산성전투를 직접 조직지휘하였으며 그밖의 전투들은 다른 지휘관들의 지휘를 받으며 전투에 참가하였다. 곽재우가 지휘한 화왕산성은 창녕현의 동쪽 10리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화왕산성은 그때 적들의 주공격대상이였다. 당시 곽재우는 현풍의 석문성과 화왕산성을 수축하고있었다. 곽재우는 적들이 쳐들어오자 1598년 7월 21일 방어군을 편성하고 지휘관들을 임명하였다.
* 당시 조직된 지휘관들은 다음과 같다. 방어사-곽재우, 종사관-성안의, 조방장-리영(밀양부사), 조방장-장응기(창녕현감) 등이였다.
당시 4도 도체찰사였던 리원익도 화왕산성에 들어와있었다.그는 화왕산성이 고립무원한 상태에 있다고 하면서 군사들을 해산시키려고 하였다.곽재우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성을 방어할 계책을 세웠다. 드디여 가또 기요마사가 거느린 왜적들이 화왕산성으로 공겨해오자 성안의 군민들은 적들에게 맹렬한 타격을 가하였다. 아군의 공격에 심대한 타격을 받은 왜적들은 성에 대한 공격을 그만두고 황석산성으로 쫒겨갔다. 곽재우는 정진나루전투와 화왕산성전투에서 커다란 승리를 이룩함으로써 전쟁의 승리에 이바지하였다. 곽재우가 전투에서 적용한 전략전술은 주로 유인매복전과 심리전과 성방어전이였으며 정찰과 적내부교란작전 등 여러가지 기묘한 전법들을 전투에 활용하였다
곽재우는 임진조국전쟁이 끝난 다음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봉찰리사, 선산부사, 안동부사, 충무위 사정 동지중추부사, 장예원 판결사, 한성부 우윤, 안동현감, 경상좌도병마절도사, 3도수군통제사, 호분위 부호군 등 총 26차에 거쳐 봉건국가로부터 관직을 받았으나 거의나 부임지로 가지 않았다.
곽재우는 왜적의 침략으로부터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고수하려는 애국심을 간직하고 경상도지역에서 제일먼저 의병을 조직하고 전라도로 기여들려는 왜적의 침입을 견제함으로써 임진조국전쟁에서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