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박사 부교수 박금순
2023.10.28.
해방후 모든 어린이들이 다 공부할수 있도록 하는것은 근로인민의 자녀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며 부강한 새 조선의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중요한 문제였다.
모든 어린이들을 다 공부시키는데서 걸린것의 하나가 바로 연필문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연필문제의 중요성과 절박성을 그 누구보다도 깊이 헤아리시고 연필생산기지를 꾸리기 위한 투쟁을 현명하게 조직령도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속히 연필을 대량생산할수 있도록 적극적인 대책을 강구하여야 하겠습니다.》 (《김일성전집》 증보판 제5권 365페지)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연필문제를 해결하는것은 단순한 실무적문제가 아니라 대단히 중요한 정치적문제라고 하시면서 지방에서 해결하기 곤난한 조건에서 중앙에서 해결대책을 강구하여야 한다고 가르쳐주시였다.
과거 일제는 우리 나라에 연필공장을 건설하지 않았다. 일제는 조선에서 흑연과 목재를 략탈하여 일본에 가져다가 연필을 만든 다음 그것을 우리 나라에 비싼 값으로 팔아먹었다. 그래서 조선사람들은 연필 한자루, 학습장 한권 제대로 써보지 못하였고 학생들은 모래판을 가지고다니면서 거기에 막대기로 글을 쓰군 하였다.
일제가 패망하고 조국이 해방된 후 연필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된 리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5(1946)년 2월 20일 해방후 인민정권의 첫 의정으로 연필문제를 토의하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당장 큰 공장을 건설할수 없는 조건에서 기업가들을 발동하여 연필수요를 보장하도록 하시였다.
주체35(1946)년 2월초 립춘을 앞둔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보통강가에 있는 자그마한 공장을 찾으시였다.
당시 개인기업가가 운영하고있던 공장에서는 18명쯤 되는 로동자들이 모여앉아 수공업적으로 연필을 만들고있었다.
그런것만큼 말이 공장이지 실은 수공업자들의 작업장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자그마한 싹도 귀중히 여기시고 몸소 이들을 찾아주시였던것이다.
우리 인민이 민족의 태양으로 그토록 높이 우러러 흠모해마지 않는 위대한 수령님을 공장에 높이 모시게 된 공장의 기업가는 너무도 뜻밖의 일이여서 미처 인사도 변변히 올리지 못하고 수령님을 사무실로 모시려고 서두르기만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러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시면서 연필 만드는것을 좀 보자고 하시며 현장으로 걸음을 옮기시는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로동자들의 어지러운 손을 허물없이 잡아주시면서 훌륭한것을 만든다고 뜨겁게 고무해주시며 생산공정을 차례로 돌아보시다가 연필심가공반에로 발길을 돌리시였다.
석탄과 흑연먼지가 뽀얗게 일어나는 연필심건조로를 흐리신 안색으로 한동안 바라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심려어린 음성으로 나라에서 설비와 자재를 보장하여주겠으니 석탄건조로대신에 전기로를 만들어 로동자들이 일을 헐하게 하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이어 완성공정에 이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곳에 쌓인 연필들을 환한 웃음을 담으시고 둘러보시며 그중 연필 한자루를 드시고는 우리가 산에서 싸울 때에는 이런 연필이 부족해서 유격대원들이 모래글자를 써가며 배웠다고, 연필은 참 귀중한것이라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지금 수백만에 달하는 우리의 귀중한 어린이들을 책임지고 공부시켜야 하겠는데 제일 걸리는것이 연필문제라고 하시며 나라에서 큰 공장건물도 해결해주고 수송문제도 풀어주고 채벌림지를 떼주겠으니 앞으로 질좋은 연필을 더 많이 만들라고 크나큰 믿음과 배려를 돌려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가 계신지 얼마후 이 공장에 기술자들이 여러명 파견되였으며 거액의 자금과 자동차와 큰 건물도 배려받았고 채벌림지도 오가산에서 제일 좋은것으로 배당받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다음으로 작은 규모의 공장을 꾸리도록 하시였다.
평양, 함흥, 신의주, 원산, 청진같은데서 수공업자들과 중소기업가들을 발동하여 연필에 대한 전국적수요를 어느 정도 보장할데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들고 산업국에서는 평양시를 비롯한 각 지방들에 연필을 생산할수 있는 설비를 차려놓고 연필공장을 건설하기 위한 투쟁을 벌리도록 하였다.
각 도들에서는 2~3개씩의 연필공장을 건설하도록 하였으며 연필시제품생산과 기술자, 설비, 원료보장을 위한 대책을 세웠다. 그리하여 함경남도에서는 함흥에, 함경북도에서는 청진에, 평안남도에서는 평양(당시)에, 평안북도에서는 강계(당시)와 신의주에, 강원도에서는 원산에 연필공장을 건설하기 위한 투쟁이 힘있게 벌어졌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800여m2의 생산면적을 더 늘여 함흥연필공장을 건설하는 한편 연필심뽑는기계, 원료혼합기, 원료분쇄기, 6각기, 평포기를 비롯한 10대의 기계와 설비들을 보내주도록 하시였다.
그리하여 함흥공작소에서는 함흥연필공장에 연필심뽑는기계, 원료혼합기, 연필대깎는 기계를 생산하여 보장하였으며 산업국에서는 전국각지에 흩어져있는 기술자들을 장악선발하여 연필공장들에 파견하여 연필생산을 성과적으로 다그칠수 있게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거듭되는 은정어린 조치에 무한히 고무된 함흥연필공장에서는 생산공정을 꾸리고 원료, 자재보장사업을 진행하는 한편 로동자들에 대한 기능전습을 강화하여 기술수준을 더욱 높여나갔다.
주체35(1946)년 6월에는 함흥연필공장이 정식 조업하여 생산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짧은 기간에 첫 연필시제품을 만들어낼수 있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호소를 심장으로 받들고 떨쳐나선 로동계급의 힘찬 투쟁에 의하여 전국적으로 13개의 연필공장이 완공되여 년간 600만자루의 연필생산능력을 조성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다음으로 큰 규모의 연필공장을 강계에 건설하도록 하시였다.
강계지구는 연필생산을 위한 원료, 자재 및 보장조건이 매우 유리한 곳이다. 강계지구는 연필생산을 위한 질좋은 적목, 피나무가 잘 자라는 유리한 자연지리적조건을 가지고있을뿐 아니라 그 원천이 풍부하였다. 당시 강계민영연필공장은 강계목기종합공장안에 한개 작업반으로 편입되여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8(1949)년 5월 1일 강계연필공장을 조직할데 대한 조치를 취하시고 공장을 강계목기종합공장의 연필작업반과 강계공작소의 일부 기술력량을 통합하여 꾸리며 공장건물을 개건확장하여 년간 500만자루의 연필생산능력을 조성하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높이 받들고 우리의 로동계급이 힘찬 투쟁을 벌린 결과 주체38(1949)년 6월 11일 큰 규모의 국영공장인 강계연필공장이 조업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다음으로 국영연필공장에 민영연필공장을 통합하기 위한 사업도 진행하도록 하시였다.
당시 국영함흥연필공장과 국영강계연필공장의 생산이 높은 수준으로 오르는 반면에 민영공장들에서는 생산을 정상화하지 못하고있었다.
그것은 민영연필공장들이 국영연필공장들에 비하여 기술장비수준이 낮고 자금, 설비, 자재보장조건이 불리한것과 관련되여있었다.
그리고 국영연필공장들에서는 민영연필공장들에 비하여 연필생산원가를 3분의 2 혹은 그 이하로 낮추었지만 민영연필공장들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실태를 구체적으로 통찰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민영연필공장을 국영연필공장에 통합하거나 생산합작사를 무어 경영활동을 합리적으로 개선해나갈데 대한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그리하여 함흥지구의 민영연필공장들은 국영함흥연필공장에, 평양연필공장은 국영강계연필공장에 통합되였다.
그리고 신의주, 원산, 청진지구에 있는 민영연필공장들은 연필생산합작사로 조직되였다.
이처럼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새 조국건설시기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연필생산기지가 꾸려지게 되였으며 배움에 대한 우리 인민들의 평생소원을 풀수 있는 확고한 담보가 마련되게 되였다.